잘 알려진 이야기
5월 17일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잔인하게 피살당했다. 범인은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해서’라는 이유를 남겼으나 경찰에 따르면 그것은 정신질환에 따른 피해망상의 결과라고 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굳이 많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 얘기는 여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공과대학이다. 1989년 12월 6일 오후 마크 르팽이라는 남학생이 총기를 들고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와 위협한다. 그는 남학생은 모두 내보내고 여학생들만 구석으로 몰아넣은 후 차례로 쏘아 죽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한 여학생의 협상시도도 소용없었다. 곧이어 그는 식당과 다른 강의실로 장소를 옮겨 총기를 난사했고, 그날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모두 열네 명, 모두 여성이었다. 그녀들이 살해당한 까닭은 그들이 공대에 다니는 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남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죄’.

그는 평소 페미니스트를 죽이고 싶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후 ‘개인적 고통’을 토로한 메모가 발견되었으나 이 사건은 결국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되었고(그렇게 되기까지 페미니스트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난 12월 6일은 여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되어 해마다 기념식이 열리고, 기념식에서는 여성폭력 현황이 발표되고, 총리는 성명을 낸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한편 “여성과 광기”로 유명한 필리스 체슬러가 “죽이고 싶은 여자가 되라(원제: Letters to a Young Feminist)”라는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는데, 여기서 ‘죽이고 싶은 여자’가 바로 폴리테크닉 대학의 희생자를 가리킨다. 우리 모두에겐 그가 죽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여자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그녀는 역설한다. (읽은지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위에 링크한 기사에 따르면 안드레아 드워킨이 한 말이라고 한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체슬러가 드워킨을 인용한 것인지도.) 그 책을 읽은 후로 나 자신에게 가끔 묻는다. 나는 그가 죽이고 싶어 했던 그런 여자가 되어 가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이야기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아주 훌륭한 책이 있다. 일본 정신장애인 공동체를 소개한 책인데, 개인적으로는 내 성격이 극단적으로 이상해서 이것이 정신장애인 걸까 고민했을 때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큰 위안을 주었던 책이다. 그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정신장애에 대한 많은 편견을 깰 수 있다. 정신장애인들의 범죄율이 몹시 낮다는 사실, 그들 대부분은 폭력성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무엇보다 그들이나 비장애인이나 그저 주어진 삶을 치열히 사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사실... 지금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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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6/05/27 08:00 2016/05/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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