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잡담

몇 년 전, 민우회 신입회원 소모임 토론에서 화장실 표지판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곁다리로 들은 적이 있다(그렇다, 나는 야근 중이었다;). 이야기는, 대부분의 여자 화장실 표시가 빨강, 남자 화장실은 파랑으로 되어 있다는 데서 시작되었다. 색깔로 구분하는 게 마땅찮으면 그림으로 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림은 또 천편일률적으로 치마 입은 사람은 여자, 바지 입은 사람은 남자(하지만 이건 우리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벗고 있는 건지 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치마 입은 빨간 남자는 어때?), 이렇게 구분해 놓았다는 게 문제다. 직접적인 사람 아이콘 대신 쓰이기도 하는 ♀♂ 표시 역시 각각 (여성의) 거울, (남성의) 창과 방패를 상징한다는 반론에 부딪혔다. 그래 당시 어떤 분은 성기 모양을 그려 구분하자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는데, 이 경우 각각의 성별에 부과된 고정관념 일부는 깰 수 있을지 몰라도, 둘 중 어느 하나에만/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과제가 남는다. 성별에 따라 '당연히' 그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 그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어렵지만 대안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고, '생물학적'으로 둘로만 구분되었다고 믿는, 그 이분법을 깨는 건 더더욱 어렵다는 걸 절감했던 사례다.

이 얘기가 떠오른 건 며칠 전 어느 블로그에서 본 글 때문이다. 그 글을 쓰신 분은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칭하는데, '지구인'스럽지 않은 독특한 외모 때문에 남자 화장실에도 여자 화장실에도 들어가기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남자들이 깜짝 놀라고,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면 여자들이 깜짝 놀란단다. 화장실 하나 쓰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하다니, '다르다'는 이유로 이 사회는 개인들에게 기본적인 생리욕구 해결까지 신경 쓰도록 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좀 불편해졌다. 지금부터는 그 글에서 비롯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들.

글 쓰신 분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장했듯, 그럼 '외계인용' 화장실을 새로 만드는 게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짧게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닐 것 같다. 이 경우 자신이 '남성'이나 '여성' 카테고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지하인, 동물인, 식물인 등등, 자신을 '남성'이나 '여성'으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외계인'도 아니라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할 수 있다)의 욕구에 따라 온갖 종류의 화장실이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별개로 하고라도, 현재와 같은 성별 구조에서 '여성용'이나 '남성용'이 아닌 화장실에 들어가는 '외계인'들을, 뭇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길 리가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만다. '외계인'들은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볼 일을 보기를 원하지,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즐기며 쉬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아예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은 어떨까. 남성용 소변기를 없애고 전부 칸막이 처리를 하는 거다. 예전에 케이블에서 많이 해줬던 미국 드라마 <앨리 맥빌>네 회사 화장실은 '유니섹스' 아닌가. 왜 굳이 둘로 나누어야 하지? 하지만 이런 경우엔 또, '성폭력'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와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이 좀 많아야지. 게다가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특히나 성별 다른 인간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부끄러움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화장실 사용습관마저 성별화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성기 차이에 의한 까닭도 있겠고, 문화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여성과 남성이 화장실을 다르게 쓴다는 건 어쨌든 현재로서는 사실인 것 같으니까(변기 중간 덮개를 올렸네 내렸네 싸우는 신혼부부들을 보라!).

하지만 어쨌든 여러 번 생각해 봐도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성별 구분 없는 화장실에 뒤따를 수 있는 여러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 하에,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기본적인 생리욕구 해결'이라는 대의 아래 '화장실' 하나로 수렴되는 게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디까지나 '궁극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거 참, 어디 앨리네 회사 같은 '모범사례' 없을까나.

* 덧붙임 *
노파심에 한 마디. 비록 내 생각이 이렇다 해도, 현재 장애인용 화장실에 성별 구분이 없음을 문제제기하는 사람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화장실 설치 주체인 공공기관들이 내가 고민한 문제들+@를 모두 고려한 '끝에' 성별 구분 없이 화장실을 설치한 것도 아니요, 비장애인용은 '여성용'과 '남성용'을 명확히 구분해 놓았으면서 장애인용만 '공용'으로 설치했다는 건, 장애인을 성별 구분 없이 '장애인'으로만 환원한 차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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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7/21 17:00 2010/07/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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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SHIN 2010/07/21 20:50 # M/D Reply Permalink

    아...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만은, 트랙백이 알라딘 밖을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전 님이 당연히 알라딘 서재에서 글 쓰는 줄 알고 OK 한 건데...이거 참...;;;

    제가 '외계인용 화장실을 만들어달라'는 것은 농담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말로는 차라리 '중성인 화장실'이 낫겠죠.(웃음)
    저는 성별에 연연해하고 싶지 않은데, 사람들은 항상 '남자냐' '여자냐' 꼭 구분을 정확히 하고 싶어하더군요.
    물론 헷갈리게 생긴 제 외모도 절 불편하게 하지만 말입니다.^^;

    1. etcetera 2010/07/21 21:41 # M/D Permalink

      그러시군요.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아 일단 제 블로그 트랙백은 삭제했습니다. 애초에 글에 엘님을 특정할 수 있는 단어 등은 쓰지 않았고요 ^^; 그러니 해당 페이퍼에서 트랙백 삭제하시면 서로 연결은 끊길 테니 염려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외계인용 화장실 얘기를 농담으로 하셨던 건 알고 있고요(ㅎㅎ), 전 그냥 그 글에서 뻗어나온 생각들을 이리 저리 끄적여 본 것뿐이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 참 신기하죠? 왜 꼭 그렇게들 나눠 놓고 싶어 하는지 말예요 ^^;

    2. etcetera 2010/07/21 22:03 # M/D Permalink

      아, 다시 보니 제가 '강요' 운운 하는 바람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비칠 여지가 있네요 ^^;;; 수정하겠습니다~

  2. 작게작게 2010/07/23 12:03 # M/D Reply Permalink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따우 님의 문제의식은 어디까지인가.
    저는 그런 생각만 했어요. 남자들은 똥오즘 누는 변기 나눠져 있어서 두 배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그러니 여자 화장실 변기는 남자 화장실의 두 배가 되어야 해, 정도.
    기호나 상징으로 남녀를 구분하자면 그 어떤 기호라 하더라도 '전형적인'이고 '고정된 관념'을 피할 수 없죠. 그게 기호니까요.
    그런 점에서 그나마 남 / 녀 man / woman이 가장 중립적인데... 그건 또 문맹자나 글자를 배우지 않은 아동들에게 어려울 수 있겠네요.

    앨리맥빌에서 유니섹스 화장실... 기억나요.
    전 그런데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서로를 곤란하게 하는 용도로 더 많이 쓰였던 것같아요.
    일 보는 순간 들어와 일 보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곤 했잖아요. 약할 때 공격한다는 느낌이어서.

    1. etcetera 2010/07/23 13:50 # M/D Permalink

      man/woman도 별로 중립적이지 않잖아요, 으하하(자궁 있는 man이 woman. 오죽 한이 맺혔으면 "이갈리아의 딸들"이 여자를 '움' 남자를 '맨움'이라고 했겠어요 ^^).

      근데 음, 앨리 맥빌네 화장실이 그랬단 말이죠(사실 꼼꼼하게 챙겨 보질 않아서 ^^;;) 이거 좀 실망인데요, 흙. 근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일 볼 때'야말로 지위에 상관 없이 인간이 가장 약할 때인 것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일 보느라 '약한 상태'지만 그 위치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근데, 근데... 첫 줄 그거 칭찬 맞죠? 헤벌쭉~

    2. etcetera 2010/07/23 13:50 # M/D Permalink

      참참, 저는 다음 주에 이른바 '여름휴가'라는 걸 간답니다. '여름휴가'라는 걸 근 10년 만에 챙겨 보다니(첫 직장 관둔 이후로 처음) 떨떠름하여요. 어쨌든 덕분에 오랜만에 엄마 얼굴 보고 변함없이 잘 싸우고 올 예정입니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돌아올 예정인데 목요일 저녁쯤, 민우회 카페에서 술이나 한 잔 하시렵니까? ^^

    3. 작게작게 2010/07/26 16:12 # M/D Permalink

      자궁있는 인간은 자궁없는 인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라. :)
      여름 휴가 계획을 보니... 이 글은 훨씬 뒤에 읽으실 것같기도 하고.
      첫 줄, 당연히 칭찬입니다.
      두번째 줄도 따우 님에 대한 칭찬이죠.
      엘리 맥빌네 로펌 사무실.. 저도 제 느낌엔 그랬다는 것이지 실지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우선, 그 화장실 설립 자체가 바람둥이 로펌 사장의 관음증 충족을 위한 것이었는데.. 나중에 여자들도 역공으로 쓰더라.. 어쨌든 별로 유쾌하지 않아, 정도였어요.

      그리고 목요일 저녁 민우회 카페에서 술 한 잔은 아마도 어려울 거예요. 다음주 목요일이라면 아마 30일일텐데요... 그 날은 제가 엄마 집에 내려가야 하거든요. 그게 아니어도... 요즘 자숙기간이랍니다.

      휴가 잘 보내세요.

    4. etcetera 2010/08/02 09:56 # M/D Permalink

      댓글은 지난 주에 읽었는데 댓댓글은 이제 달아요. 잘 다녀오셨나요? 아님 아직도 어머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신 중? 목욕도 같이 다녀 오시고요? ^^

      어이하여 자숙기간에 돌입하셨는지 궁금하여요. 저도 술은 거의 안 마시니 그럼 커피 마셔욧!

  3. 비밀방문자 2010/08/02 10:36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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