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시간대는 쥔장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실제와 다르게 표기되었음)

이번 내 귀향(거기 고'향' 아니잖아!)은 깔끔하게 2박 3일로 예정되었다. 우리 모녀는 만난지 3일째부터는 언제나 싸움 모드에 돌입하기 때문에 연휴가 더 길어도 그보다 오래 있으면 안 된다. 그래 화요일 새벽 부스스 일어나 고속버스 터미널로 낑차낑차. 원래 밤을 새우고 가려고 했으나 새벽 세 시 경 졸음이 쏟아져 결국 두어 시간 자고 기적처럼 일어나 나온 길이다.

원래 나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출발 20분쯤 전에 터미널에 도착할 테니 며칠 동안 커피다운 커피를 입에 못 댈 내게 아이스 에스프레소 한 잔 쥐어주고 우아한(퍽도;;;) 서울녀의 모습으로 고속버스를 타는 것.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 좋았다. 내가 탈 게이트에 사람들이 삐져나와 안쪽으로까지 줄을 길게 늘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웬일로 사람들이 저렇게 서 있나, 벌써 차가 들어와 있는 건가, 그렇담 이 무거운 짐을 좀 부려두고 커피를 사러 가도 되겠지 하며 밖으로 나온 순간, 오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첫 직장 출근길 지하철 밀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옴짝달짝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게 대체 무슨 사태인가 파악하길 5분 여.

내가 타야 할 차는 7시 50분 출발. 앗 그런데 그 코너에 서서 확성기로 사람을 모으고 있는 차는 7시 20분. 심지어 내가 알기로는 그 사이에 우등고속도 한 대 더 배치되어 있다. 꽥. 이거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거구나. 몇 분 여를 더 있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안으로 들어가 커피나 마셔야겠다 싶어 죄송합니다 잠시만요를 연발하며 한 발짝씩 버스와 멀어지던 그 때, 확성기를 든 분이 소리친다. "7시 50분 버스 타실 분 오세요!" 오호. 안 온 사람이 있나 보네. 다시 몸을 틀어 낑차 낑차 차에 접근해 본다. 아 그러나 내 앞에는 그 말을 듣고 이미 버스 앞에 진 친 사람들이 너댓 명. 꽥. 그러나 나는 혼자.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이들보다 더 유리하다. 기회는 있다! 아니나 다를까. 5분 여 그러고 있으니 확성기 아저씨 외치신다. "7시 50분! ㅇㅇ으로 바로 가실 분 한 분!" "저요 저요!" 흠화화홧. "승차권 주시고 비어 있는 자리 가서 앉으세요." 얏호. 내 앞에서 과일박스 머리에 이고 있던 가족 대표들께 심심한 위로를. 혼자 사는 사람한테 이 정도는 양보해 주시라요.

내가 타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그 때가 이미 7시 50분. 어쨌든 내 입장에선 제 시각에 타서 출발하긴 한 거네, 흐흐. 그런데 문제는 다음. 웬 말쑥한 청년 하나가 버스 문을 마구 두드린다. 기사님, 확성기 아저씨한테 얘기하라는 손짓을 보내지만 막무가내. 쾅쾅쾅 소리에 기사님이 문을 여니 다짜고짜 고성(괴성?)이 튀어나온다. 우짖는 목소리를 종합해 보니, 이 냥반은 7시 20분 차표를 가지고 '방송해준다'는 소리에 이제나 저제나 이 차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 출발하는 차를 보니 그게 바로 자기가 타야 할 차였고, 그 때문에 이성을 잃은 거. 최소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렸을 모양새다. 그런 귀에 언제 뜰지 모르는 다음 차 태워주겠다는 얘기가 들릴 리 만무하다. 방송해 준다더니(확성기로 7시 20분 승객 한참 찾던데;;;)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내 자리 내놓으라고 고래 고래 소리 지르는 청년을 가뿐히 무시해 주시고 차를 돌리는 기사님. 오오, 그러나 이건 웬 미저리인가. 터미널을 빠져 나오는데 뒤에서 계속 쾅쾅 치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 속도를 따라잡을 만큼 너무 빠른 데다 소리도 우렁차서 진심, 누가 차에 매달리는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 결국 차량정체로 터미널 입구에 멈춰선 차를 다시 따라잡은 청년. 이제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자리 좀 마련해 줘 버리라며 기사님에게 부탁할 정도. 그러나 이게 무슨 관광버스도 아니고 운전석 옆에 가이드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버스는 결국 택시 한 대를 긁고 확성기 아저씨는 청년과 멱살잡이를 하고 뭐 그랬다는 야그. 그 광기어린 눈빛의 청년은 그 후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야그. 그 괴성만 아니었으면 내 자리를 내어주려고도 했었다는 야그. 그러니까 공공장소에서 웬만하면 고성은 지르지 말자는 야그.

그러구러 한참을 달리다 서다, 부모님 사시는 지역 인근 톨게이트를 지나 제법 갔을 때였다. 사람들이 수군수군 하는 소리가 심상찮다.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니 길을 잘못 든 모양. 왜 길을 잘못 드냐고? 명절 때는 고속버스 수요가 너무 많아서 평소 관광버스를 운전하시는 지입차주들과 계약을 맺고 노선을 알려주고 고속버스처럼 운행을 하게 하기 때문이지. 내가 탄 차 역시 땡땡고속과 운송협정을 맺은 땡땡관광버스. 한마디로 기사님이 늘 다니던 길이 아니라는 얘기다. 뭐 아무튼 길눈 어둡고 별 급할 것도 없는 나만 룰루랄라 하고 있는 와중, 드디어 용감한 승객 한 분이 휴대폰 네비게이션을 들고 운전석으로 간다. 용감한 그분 덕에 힘을 얻어 그제야 사람들 목소리가 커진다. 길 잘못 든 거 맞지 않냐며 왜 이 길로 왔냐며. 시골 사람들 특유의 큰 목소리가 아주 우렁차다. 기사님은 알려준 길로 왔을 뿐이라며, 길 잘 아시는 분 계시면 앞으로 나와 알려 달라 부탁해 보는데, "이미 잘못 들어와서 우리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오! 오기 전에 얘길 했어야지!(아 이건 사투리 원본으로 들어야 제맛인데)" 하는 아저씨 고함에 웃어버리는 건 나뿐.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가보겠다며 죄송해 하는 기사님이 안쓰러워 부러 좀 큰 목소리로 "네~ 괜찮습니다~" 해 드린다. 다들 잠깐 잊은 것 같은데, 지금 이 운행을 가장 끝내고 싶은 사람은 저 냥반이라구요.

결국 평소 걸리던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 더 걸려 시골 터미널 도착.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정체와 헤맴이다. 예전에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11시간인가 걸린 적도 있었는데 뭐. 그 땐 정말 내가 비행기 타고 캐나다를 가지 싶더라만.

뭐, 당일엔 재미나서 한참 떠들었는데 며칠 지나고 보니 생동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팅을 하는 이유는, 그분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로 보고하기 귀찮아서이기도 하고, 독자제위(응?)께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날 결국 엄마랑 또 한 판 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잘 있다가 왔다. 밥도 한 끼에 두 그릇씩 먹고.

그나저나 제 블로그 방문해 주시는 몇 안 되는 서울 독자님들, 집들은 다 무사하신가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서울 거리가 조금은 무서웠던 어젯밤, 두근두근 문 따고 들어가 보니 제 집은 다행히 멀쩡하더라구요. 디자인 서울보다 물 잘 빠지는 서울(권재홍 앵커 이럴 땐 참 마음에 들어요)이 얼른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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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9/24 10:43 2010/09/2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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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게작게 2010/09/24 14:45 # M/D Reply Permalink

    궁금한 1인 여깄슈! 보고 감사!

    1. etcetera 2010/09/24 17:07 # M/D Permalink

      ㅎㅎㅎ 추석 잘 쇠셨어요?

    2. 작게작게 2010/09/25 18:36 # M/D Permalink

      잘 보냈어요.
      어쨌거나 물난리에도 따우 님 집은 무사했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3. etcetera 2010/09/27 09:42 # M/D Permalink

      너무 거짓말 같아서 무서운 물난리였어요. 도시는 어쩜 그렇게 하루 만에 아무 티도 안 나는지. 침수된 집들은 아직도 그대로일 텐데.

  2. 라일라 2010/09/27 04:46 # M/D Reply Permalink

    으하하하하하하하 빵빵 터졌습니다. 저도 슬슬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단계에 돌입했어요. 이런 식으로 일 못해서 시집가면 누구 욕 얻어먹냐 그러길래 내가 일하러 시집가냐, 부터 시작해서 윽윽윽 ㅠㅠㅠㅠ

    1. etcetera 2010/09/27 09:45 # M/D Permalink

      앗. 역시 귀향민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걸까요 ㅎㅎㅎ 저는 이제 그런 유의 얘기는 농담으로 받아요. 엄마는, 제가 안 싸우려고 농담으로 받는다는 걸 눈치 못 채고 계속 얘길 끌고 가다 결국 절 폭발하게 해서 문제지만요, 흐하하. 앞으로는 싸우지 마시고, 요새 일 잘하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가 일하러 시집 가겠냐. 밥 잘하는 남자 데려올 테니 걱정 마시라, 하셔요. 뭐, 부모님 응대도 하다 보면 늡니다요 ^^

  3. 비밀방문자 2010/09/28 00:48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etcetera 2010/09/28 11:48 # M/D Permalink

      헉!

  4. 냐옹 2010/10/02 09:32 # M/D Reply Permalink

    추석 잘 쇠셨나요? 먼길 다녀오시느라 애쓰셨어요 너무 늦은 인사인 듯 하지만 ㅎㅎ
    공연은 잘 하셨는지요 궁금해서 다녀가요~

    1. etcetera 2010/10/05 11:07 # M/D Permalink

      안녕하세요 냐아옹~! 계속 바쁜 척하다 추석 쇠고 몸살 나서 정신 못 차리다가 이제 겨우 한숨 돌린 참입니다. 공연 얘기는... 으하하하하... 엉망진창이었습죠. 그러나 이번 토요일에 또 하겠다고 나섰다지요. 님은 어케, 한식 잘 배우고 계셔요? 오늘 내일 시간 내서 놀러 갈게요. 지 블로그 방치하다 보니 마실도 통 못 다녔네요.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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