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1.
일가붙이와 처음 '자취'했던 집은 반지하였다. 기름 보일러를 때는 방 두 개짜리 다가구 주택. 언덕배기에 있어서 볕은 잘 안 들었어도 침수 걱정은 없었던 곳. 하지만 여름을 부모님 댁에서 나고 돌아와 보니 벽지와 책에 곰팡이가 한가득 피었더랬지. 몇 군데는 물이 직접 샌 데도 있었다. 처음으로 서울 집중호우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그 해였다.

반지하 2.
지난 번 살았던 집 역시 언덕배기에 있었고, 주소 상으로 '지하'인 곳이었다. 하지만 집이 컸고, 경사로에 있던 집이라 방 셋 중 둘은 지상에, 방 하나만 반지하인, 꽤 쾌적한 곳이었다. 가끔 비가 많이 오면 집 옆으로 콸콸 흐르는 물소리에 조금 겁을 먹었던 때도 있지만 침수 걱정은 해본 적이 없다. 그만하면 곰팡이도 별로 없었고(제습기 만세!)

1층 1.
내 생애 최악의 집이라 할 만한 그 1층집에는 지하층이 없었다. 그랬더니 볕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땅의 습기가 바로 집으로 올라와 여름엔 습식 사우나에 사는 것 같았다. 방습공사를 제대로 안 해서겠지만, 방습공사를 제대로 했다면 좀 더 나았을까? 그런데 그 집은 그런 주제에 '1층'이라고 시세보다 높은 보증금을 요구했었다.

1층 2.
지금 사는 1층집에도 지하층이 없다. 구조도 이상해서 볕도 거의 안 든다. 덕분에 올 여름, 제습기를 틀고 슬리퍼를 신지 않으면 방바닥의 물기를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창틀이며 세면대며, 보이건 보이지 않건, 공간마나 있으면 곰팡이가 창궐하는 집이다. 그러나 이 집 역시 '1층'이라 같은 조건의 반지하보다 보증금이 비싸다.

그러니까 걱정스러운 건 이런 거다. 반지하 없애면 안 그래도 재개발이다 뭐다 해서 갈 데 찾기 힘든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나 역시 이사할 때마다 고민했더랬다. 반지하냐, 옥탑이냐. 습기에 곰팡이냐, 한여름 땡볕에 한겨울 한기냐.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지하 같은 1층에 살고 있으니 아직 끝난 고민은 아니다. 호우대책, 침수대책 세우시는 분들이 이런 고민, 해보셨을라나 싶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만약 반지하 신축을 전부 막아버리면 1층은 또 어떻게 되냐는 거다. 우리집에 물기('습기' 아님)가 고이는 건, 땅에서 올라오는 그 습기를 '대신' 흡수해 줄 반지하 집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반지하 건축을 금지하면 자연스럽게 1층이 지금의 반지하집 같은 주거환경을 갖게 될 공산이 크다(건축주들이 완벽한 방습공사를 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하지만 집주인들이 반지하가 없다는 이유로 보증금이나 월세를 낮춰주거나 반지하 집에 준해 세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셋방이 하나 줄어드니 다른 층 세를 더 올려 받을 거라는 예측이 오히려 그럴싸하다. 어쨌거나 그 집은 '지상' 1층이니까. 그런데 또 그 상황에서 이번처럼 비가 많이 오면, 어쨌든 그 지역 배수용량이 한계에 다다르면 그 빗물은 또 어디로 가나? 지하가 없으니 이제 1층 차례겠지. 안 그래도 이번 물난리 때 우리집은 멀쩡한 걸까 마음 졸였던 터다. '지상'에 있는 광화문 대로가 그 지경이 된 걸 보면, 그럴 수는 없다고 배 두드리고 있을 일은 아니다. 그럼 그 땐 주거민의 층수만 다를 뿐, 우리는 똑같은 광경을 목도해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때는 다시 1층 건축금지 정책을 내놓을 텐가? 그럼 이번 참에 아예 그냥 신축건물은 지반에서 최소 50cm 높이의 기둥 위에 지으라고 하는 건 어떨까?

반지하 집을 계속 만들어서 돈 없는 사람들을 들이고 그들의 열악한 주거조건을 기반으로 1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반지하 신축 금지가 물난리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고리타분한 얘기다. 하물며 현재 반지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반대하는 '대책'을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걸 보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그래도 이런 걸 바로 '근시안적 정책'이라고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줬으니 조금은 고맙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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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9/30 11:02 2010/09/3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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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게작게 2010/09/30 12:52 # M/D Reply Permalink

    반지하를 짓지 못하게 하고 이미 있는 반지하는 서울시가 사들여서 임대주택으로 사용한 후 폐기한다 어쩌고였던 거 같은데요... 그 얘기 들으면서 저는 임대주택 사는 사람들은 그럼 반지하 살아도 되냐, 무슨 법이 그래? 이러면서 여하간 경박하기는 이렇게 투덜거렸어요.
    어쨌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 똑같네.. 이러면서.
    저는 1층에 산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보곤 이게 무슨 1층이냐 반지하이지 해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우겼는데 생각해보니 0.8층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곳은 곰팡이도 없고 습하지도 않았지만 비 많이 왔을 때 우리 집 잠기면 어쩌지? 걱정하긴 했어요. 우리 집은 0.8층 이니까요.

    1. etcetera 2010/10/01 11:04 # M/D Permalink

      아, 그래요. "경박"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습니다. 부수적인 대책이라고는 하지만 여러 모로 씁쓸한 '대책'이에요. 킁.

  2. 작게작게 2010/10/01 22:17 # M/D Reply Permalink

    감기는 안 되우! 감기 조심하시오! 뭐 그리 고액연봉자라고 **에까지 차출되고 그러우. 어쨌거나 조심 또 조심. 울 엄마 말마따나 없이 사는 것들은 그저 건강이 최고라고요.

    1. etcetera 2010/10/05 11:08 # M/D Permalink

      이제 몸살은 거진 나았어요. 그날은 정말 세 시간 동안 내리 서 있느라 발바닥이랑 발목이랑 허리 나가는 줄 알았슈. 같이 건강하십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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