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가 생겼고,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이북(전자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글 책은 아직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결제수단이 한정되어 있어 많이 사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종이 대신 모니터를 보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인터땡땡 이북 카테고리에서 드디어 휴대폰 소액결제가 가능해졌을 때, 젠장,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구나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번 책 <대학로 좀비 습격 사건>은 내가 인터땡땡에서 돈 내고 '구입'한 세 번째 이북이다. 가격도 무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보다 비싼 5,000원!

뉴에이지 문학선이라는 생경한 소개글(편집장님, 책 소개글 참 좋더군요. 작품보다 오히려 책 소개가 더 훌륭해 보였다는 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지만요)도, 서점에서 먼저 보았다면 아마도 구입할 일 없었을 소재도, '블랙 코미디'를 의도했다고 하나 나와의 교감에는 실패한 책의 내용도, 다 이해할 수 있다. 나 이외의 누군가는 그 내용에 몹시 흡족해 했을 테고, 그것으로 책의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일 테니까. 그건 다만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작 나를 분노케 한 것은 바로 책의 만듦새였다. 이북의 '만듦새'라니, 오오, 나도 내가 저런 단어 조합을 만들어 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나 분명 내가 몇 개월 만에 텍스트 앱까지 다운 받아가며 블로그에 글을 올리게 한 건 분명 이 책의 만듦새다.

각 장(챕터)제목을 본문과 한치의 구분도 없이, 심지어는 띄어쓰기도 없이 본문 위에 대충 얹어놓은 모양새는, 무료로 다운 받아 읽은 <인형의 집을 나와서>보다 못했다. 그뿐이랴. 분명 하나인, 따라서 '한 줄'로 처리되어야 할 문장이 갑자기 줄바꿈 되면서 새로운 문단으로 시작하는지, 왜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시로 일어나서 글 읽기를 방해하는지. 혹시 '좀비'라는 '무서운' 소재를 가지고 쓴 무서운 소설에 너무 몰입하지 말라는 편집진의 배려인 걸까?

아마추어라도 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교정교열은 또 어땠던가. 띄어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띄어쓰기에 자신없어 하는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거푸 나오는 '만신창이' 아닌 '망신창이'는 내가 어찌나 다 '망신'스럽던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책의 종이책은 어떤 모습일지. 이북 버전처럼 '망신창이'일까? 아님 그쪽은 그나마 '책'이라 불려도 좋을 만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부디 후자였으면 좋으련만. 안 그럼 그 때문에 잘려나간 나무들이 너무 불쌍해서 오늘밤 잠을 못 이룰 것 같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역시나 이쪽 동네도 대형 출판사들의 발빠른 대응과 비교적 깔끔한 편집(epub가 깔끔해 봤자긴 하지만. 하긴 그래서 이 책에 더 화가 나는 거긴 하지만.)에는 못 당해내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박완서님의 책들은 벌써 이북으로 속속 제작되었고, 유명작가들의 책을 내는 유명 출판사는 이제 종이책 신간과 거의 동시에 이북도 발매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래도 부족한 편집일손과 자금력으로 그들과 똑같은 수준의 책을 만든다는 건, 군소출판사(이 책을 낸 곳이 군소 출판사인지는 모르겠다만. 다만 지금은 일반적인 추측 경로를 따를 뿐.)로서는 가랑이 찢어지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럴 때는 엉거주춤 가랑이 벌리고 있느니 잠깐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듣보잡 블로거한테 혹평이나 듣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기적인 안목으로 천천히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그러나(대체 왜 자꾸 '그러나'로 문단을 시작하는 것이냐! 블로깅 안 하는 동안 접속사는 '그러나' 말고는 다 잊어버란 것이더냐!)어쩌면 이 책을 이북으로 구입한 게 더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산 맞춤법 가관인, 유명 출판사에서 낸 유명 번역가의 유명한 소설은 그래도 '책'이라고,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읽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책꽂이에 밀어넣어 두었는데 이 책은 그냥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물경 오천 원이면 밥이 한 낀데 쩝, 하는 탄식과 더불어.

그나저나 이북도 미리보기나 샘플 내려받기 좀 얼른 갖춰 주십쇼 쫌. 사고 싶은 책 있어도 번역 편집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구입 안 하고 있는 책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 혹시 내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수많은 이북 대부분이 이보다 못한 모양새인 것은 아닐까?...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 펴냄 / 2009년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11/02/22 22:56 2011/02/2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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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tcetera 2011/02/22 23:17 # M/D Reply Permalink

    꺄올, 이제 아이패드로 줄바꿈도 하고 글자색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2. etcetera 2011/02/22 23:26 # M/D Reply Permalink

    그간 몇몇 일들이 겹쳐 블로그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새학기를 맞아 다시 열심히 해 보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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