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는 무서워

도착 첫날. 한국에서 생각해 둔 계획은 이랬다. 아침 여섯 시 반에 리마에 도착하면 일단 버스 터미널에 가서 배낭을 맡긴 후 시내를 쏘다니다 밤에 버스 타고 북부 트루히요(Trujillo)로 이동하기. 유명 관광지들이 대개 남쪽에 있어서 중미에서 넘어오지 않는 한 한국 여행자들은 북부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트루히요에 잉카 이전 시대의 유적지가 있다 해서 일정에 넣었다. 트루히요에 갔다 리마로 돌아와 남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잉카만 보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첫 이동이라 트루히요까지 가는 버스는 미리 예약해 둔 터다. (몸소 겪었음에도 생각할수록 세상 참 신기하다. 한 자리에서 지구 맞은편 고속버스 좌석까지 예약이 가능하다니.)

별일 없이 새벽에 도착해 수많은 택시 호객꾼을 물리치고 iPeru(페루정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여행안내 센터)를 찾았다. 이크, 비행기 도착은 1층인데 iPeru는 2층에 있다. 배낭까지 이고 지고 찾아가야 하는데 참 불친절한 동선일세. 까딱 잘못하면 'Free tourist information'이라 우기는 여행사 호객꾼에게 잡혀가기 십상이다. (실제로 두 번째 방문 때 당했다.) 2층에 올라가도 한참 헤맨 끝에야 작은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 거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수준으로 질문을 던지는 앞 사람 덕에 한참을 기다리다 (계속 끝날 것처럼 보이는 통에 배낭도 그대로 짊어지고 계속 기다림. 그 사람 결국 내가 나올 때까지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찍고 있었음) 겨우 지도를 얻으며 물었다. Linea 버스 터미널(페루는 종합 고속버스 터미널이 없고 각 버스회사마다 독자적인 터미널을 운영한다. Linea는 페루 북부지역을 운행하는 버스회사 이름)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택시란다. 내가 바보지, 왜 가장 빠른 길을 물어봤을까. 제일 싼 길을 물었어야지, 라고 며칠 뒤에야 생각이 나더군.

어쩔 수 없이 택시 호객꾼에게 잡혀 드려야 할 판이다. 결국 다시 내려와 그린택시 팻말을 목에 건 사람을 따라갔다. 가격을 물으니 정찰제라며 팻말 뒤쪽을 보여주는데 55솔. 한화 25,000원쯤 된다. 어리바리 따라 나서는 게 아닌데, 택시 타고 나오면서 보니 공항 밖에 일반 택시들이 진을 치고 있다. 내가 탄 건 아무래도 모범택시쯤 되는 모양이다. (그린택시는 공항 안에서 합법적 영업이 가능한 택시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번 공항방문에서는 제법 똘똘하게 굴었으니 아주 헛돈을 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택시비가 아니었다. 탄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화충격에 휩싸인 쥔장.

사람인 척하는 차와 자동차인 척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차와 사람이 한데 뭉쳐 다니는 광경은 참으로 당황스러웠으니, 차가 지나가는데도 사람들은 그 앞을 휙휙 지나간다. 차는 사람을 보고 멈출 생각이 없다. 경적만 울려댈 뿐. 그제야 론리가 '이것만은 가지고 가세요'에서 왜 귀마개를 꼽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차들이 왜 하나같이 긁혀 있고 테이프 덕지덕지인지도. 타블로이드 신문을 무릎에 펼쳐두고 짬짬이 읽는 것(짬짬이, 라 함은 신호에 멈췄을 때와 차가 막혀 천천히 가고 있을 때 모두를 포함한다)도 불안해 죽겠는데 대체 이 사람들 뭐 하자는 건가, 얼이 빠졌다. 한번은 웬 남자와 내가 탄 택시가 서로 양보 없이 지나가다 부딪칠 뻔한 상황을 보고 으헉, 깜짝 놀랐더니 기사 아저씨가 쟤 왜 저런다냐 하는 얼굴로 한동안 쳐다보다가 "옴브레(남자)?" "시(네)!" 했더니 막 웃는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고. 아이고야, 나 완전 한국 촌뜨기 된 듯.

페루의 자동차들
<페루의 자동차들>

두 시간 같은 20분이 지나 터미널에 도착. 내가 그렇게 모자라 보였던 건지 이 아저씨, 60솔 줬더니 대놓고 5솔은 팁으로 달란다. 됐거든요! 그러나 정작 험난한 하루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다 사전준비 없이 무작정 떠난 내 탓이다.


스페인어를 못 하는 사람과 영어가 안 되는 사람이 만나면

발권하는 직원한테 아이패드를 띄워 예약내용을 보여 줬더니 발권 시스템을 한참 뒤진다.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온 사람을 처음 본 모양새다. (아이패드도 처음 보았을지 모른다.) 어찌 어찌 예약여부는 확인한 것 같은데 미리 출력되어 있는 티켓 철을 뒤적이더니 "I don't have a ticket(표 없어요)" 하는 거다. 뭐라? 밑도 끝도 없이 표가 없다면 어떡해?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뭘 물어도 I don't have a ticket. 그 와중에도 '텐'을 들은 것 같아 영어로 "제가 너무 일찍 온 건가요? 밤 열 시에 다시 올까요?" 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불쾌한 표정의 스페인어 답변뿐. 그래도 눈칫밥 40년, 결국 지금 발권은 안 되니 밤에 다시 오라는 얘기렷다. 그게 아니어도 지금 당장 뭘 할 수는 없어 뵈고, 일단 배낭이나 맡기자.

큰 짐도 각자 알아서 버스 하단 짐칸에 넣고 찾는 한국과 달리, 페루 고속버스에는 비행기 수하물 수속처럼 짐을 받아 관리해 주는 직원이 따로 있다. 이 사람이 짐에 번호 태그를 달고, 주인에게 표딱지를 준다. 도착해서 짐을 찾을 때도 짐에 붙은 번호와 티켓이 일치하는지 확인 후 내어준다. 추가 수하물에 대해서는 추가운임도 받는다. 물론 이 모든 서비스는 비싼 버스일 때 얘기다. 이 동네는 버스 회사와 좌석 등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 두세 배도 차이가 난다.

짐 수속원은 참 착하게 생겼지만 영어라곤 '예스'도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내가 밤 열 시 반 버스를 탈 건데 그 때까지 배낭 좀 맡아 달라는 얘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일이삼사오, 부에노스 디아스, 아디오스, 베사메무초...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다고는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게 언제인데 생각이 날 리가. 이때 오지랖 택시 기사 (여기까지 데려다 준 기사 아니고 터미널에 진 치고 있는 기사 중 한 명) 등장. 오지랖은 고마운데, 그게 걸맞은 영어는 갖추질 않아서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계속 짐 수속원에게 티켓을 보여 주라고, 그래야 짐 맡아 준다고, 참 친절히도 설명하신다. 아 티켓 없다고! 저 언니가 안 줬다고!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이따 밤에 다시 오면 준다고 했다고! 아이패드 열어서 예약증 보여주면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 소동은 결국 기사 아저씨가 나와 아이패드를 데리고 발권 데스크에 가서 좀 전의 그 무서운 언니한테 스페인어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에휴. 어쨌든 이제 짐도 덜었으니 리마 탐구생활을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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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9/04 11:34 2013/09/0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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