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는 터미널 위치가 안 나와 있기에 구석에 앉아 지도 탐구부터 시작했다. 미리 정해 놓은 루트는 있고, 문제는 출발점인 산 마르틴(San Martin) 광장까지 걸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한참 만에 터미널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거대물체가 지도에 있는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 나 진짜 기특한 거 같아. 확인을 위해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한테 건물을 가리키며 "스타디움?" 했더니 "시"란다. 우하하. 그라시아스(Grasias, 고맙습니다)!

길 묻는 얘기 나온 김에. 해외로 자유여행을 가고는 싶은데 언어가 안 돼서 못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언어가 되면 훨씬 많은, 양질의 경험을 보다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뭔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참고로 현지어 하나 모르는 내가 돌아다니면서 길 묻는 방식은 이랬다. 일단 길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 앞을 막아선다. "익스큐즈 미. 땡땡땡(목적지)?" 그럼 백에 아흔아홉은 손짓 발짓 표정을 섞어 성심성의껏 알려준다. 그럼 난 확인차 되묻는다. "아,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라고요?"라던가. "건너가야 된다고요?"라던가. 영어 아니고, 스페인어 아니고, 한국어 맞다. 자국어만 쓰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영어나 한국어나 못 알아듣는 말이긴 매한가지인데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내게도 외국어인 영어를 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톤이나 표정, 행동 등의 언어외적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객에게 친절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건 언어구사력보다는 눈치라는 데 한 표.

아이패드에 지도를 띄워놓고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 열심히 걷는다. 한 20분 걸으면 목적지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웬 정체불명의 제복 입은 남자가 내게 관심을 보인다. 군인인가? 경찰인가? 했지만 그냥 그 건물인지 회사인지의 안전요원. 사람을 만난 김에 다시 한 번 확인한다.

- 산 마르틴 광장이 이쪽 맞아요?
- 이쪽 방향은 맞는데, 그거 뭐예요?
- 응? 뭐요?
- 그 테이블.
- 테이블? 테이블?
- 손에 들고 있는 그거요.
- 아, 아이패드. 태블릿요.
- 길거리에서 그거 들고 다니지 말아요. 언제 누가 들고 달아날지 몰라요. 그런 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확인하도록 하세요.
- (헉) 네.

그 시간 이후로 아이패드는 졸지에 아기캥거루가 되어 여행 내내 내 뱃속에 파묻혔다. 아이패드는 놓고 가라는 그분 말씀 들을 걸.

왕복 8차선쯤 되는 대로의 교통신호조차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어 교통경찰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교통경찰도 통행에 방해되는 수준이 아니면 신호위반 따위는 묵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무사히 길을 건너려면 빨간불이냐 녹색불이냐 같은 건 잊고, 능숙하고 당당하게 다니는 현지인을 졸졸 따라가야 한다. 무섭고 겁나는 와중에도 한 가지 웃겼던 건, 대로 중간에 광장처럼 생긴 공원이 있길래 혹시 목적지? 하고 가보려는데 들고 날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다, 아하하; 그런데 공원엔 벤치도 있고 막; 이건 정부에서 무단횡단 권장하는 건가?

드디어 산 마르틴 광장 도착.

산 마르틴 광장
<산 마르틴 광장(정확히는 광장의 중앙장식)>
(별 의미 없지만 여행에서 처음 찾아간 목적지이고 처음 찍은 사진이라 올림)

원래 오늘의 계획이 걷기, 였으니 여기서부터 아르마스 광장까지 걷기 시작한다. 이 길에는 페루 최초의 미사가 열린 곳에 세웠다는 성당 Iglesia de la Merced가 있다. 한국말로 하면 은혜교회; 성당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서 깊은 곳이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도 많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나도 뭔가를 빌고 싶었지만 딱히 기도할 거리가 없다. 그러다 잠시 서서 마음의 평안을 빌었다.

미사를 드리는 공간 양쪽 벽에는 마리아와 예수, 성자들을 형상화 한 장식들이 가득이다. 그런데 구유에서 출산한 성모 마리아는 웬걸, 선녀 같은 옷을 입고 계신다.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예수님 형상은 그 와중에도 보라색 '비로도'에 금실 수가 놓인 옷을 입고 계시고. 보라색은 '왕의 색',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색깔이었다. 왕의 색이 된 이유는, 합성염료가 없던 시절, 염색하기 가장 어려웠던 색이기 때문.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색이 보라색인 게 여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남성을 상징하는 파랑이 만나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이것이 "여성에게 권력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어떤 게 맞는 말인지, 혹은 둘 다 맞는 건지는 궁금한 분들이 알아서 찾아 보시도록. 어쨌든 참으로 스페인 사람처럼 생긴, 보라색 빌로드 옷을 입은 예수님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다른 지역 성당에서도 계속 비슷한 모습이라 그 인상은 곧 사라졌지만, 거대한 마호가니 장식만은 이 성당이 유일한 것 같다.

성당을 나와 유니온 거리를 걸었다. 옛날에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던 거리다. 역사 따윈 이름에만 남아있고 지금은 거대한 쇼핑거리가 되었다. 기분이 묘하다.

유니온 거리의 끝에 아르마스(Armas) 광장이 나온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이 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다.) 광장 주위에는 대통령궁과 대성당이 있다. 대성당의 입장료는 만 원? 만오천 원? 이미 택시비로 적잖은 돈을 써버린 터라 들어갈지 말지는 며칠 뒤 다시 왔을 때 결정하기로 한다. (결국 여긴 들르지 못했다. 피사로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던데, 교인이 아니라서인지 크게 아쉽진 않다.)

리마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

리마 대성당
<리마 대성당>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통령궁 문은 닫혀 있고(당연;)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거기가 대통령궁인지도 모르고 어슬렁거리다 웬 군인에게 딱 잡혔다. 불심검문 같은 건 아니고, 현지인과도, 보통의 관광객과도 구별되는 얼굴이어서인 것 같다. 왜들 그렇게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하는지. 아무튼, 열두 시에 경비대 교체식이 있으니 구경 오란다. 오호, 좋은 정보 감사. 한 시간 반 정도 남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실제로 도착부터 지금까지 지난 시간은 고작 네 시간 가량이라는 거. 대체 한 달 여행 가지고 포스트 몇 개를 우려먹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열두 시가 될 때까지 주위를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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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09:41 2013/09/0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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