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이날의 일지는 고작 다섯 줄이다.

10:30 예정인 투어 전에 성당 보려고 나감. 한목소리로 피사로를 알려 준 승객들, 광장까지 바래다 준 소이 엄마 무한감사.

아르마스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성당은 비신자에게는 오전에만 개방된다. 그래서 투어 전에 잠깐 둘러 보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 트루히요 행 봉고버스를 탔다. 아침으로는 호스텔 식당에서 탄 식빵 두 쪽과 버섯 오믈렛. 아 배고파. 어쨌거나 어제 시행착오를 겪은 덕에 아르마스 광장까지 가는 길은 자신이 붙었다. 그래도 안내원에게 광장 간다고 얘기는 해 둔 터. 마침내 광장 언저리에 이르자 승객들이 너도 나도 "여기야 여기, 내려!" 한다. 내가 탔던 버스 승객 모두 내 행선지를 알고 있고, 그 승객 모두가 내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려 주는 그런 경험은 늘 유쾌하다. 겪을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마침 같이 내린 아기 엄마도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가 보다. 버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인데, 광장은 이쪽 길이라며 알려준다. “저 이 길 알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란 말을 스페인어로 못 해서 함께 걸으며 서로 안 통하는 말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듣자마자 잊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행길에 잠깐 스친 인연, 다시 볼 일 없는 사람 이름은 기억해서 뭐 해? 하는 생각을 내가 미처 하기도 전에 뇌가 알아서 필터링 해 버린 거다. 듣고, 잊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 해서 1초나 될까. 내 마음은 언제 이렇게 건조해져 버린 걸까. 그래도 신속하게 반성했으니 조금은 덜 여문 걸까. 어쨌든 그 '반성' 덕에 아기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된 거다. 돌도 안 된 귀여운 아기의 이름은 ‘소이’였다. 까꿍 몇 번에 까르르 웃는다. (참 신기한 게, 한국 아가들은 나를 보면 일단 무서워하고 경계하는데, 여기 아가들은 일단 날 보면 웃어준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해서 소이 엄마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어디로 가세요? 그제야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저 뒤쪽을 가리킨다. 생판 모르는, 인생에 다시 볼 일 없을, 길이 서툰 여행자를 위해 추운 날 아기를 안고 한참을 동행해 준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왈칵. 정말 미안해요, 그런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서. 의미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네요.


리마성당처럼 화려한 마리아와 예수. 리마가 더 낫네.

성당에 들어갔다. 앞으로도 여행길에 무수히 보게 될 성당들. 규모도 크고 장식도 화려하지만 내게는 리마의 ‘은혜교회’가 더 끌린다. 대충 둘러보고, 오늘도 마음의 평안을 빌고,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서 조나단 또 마주침. 아 불편

생각보다 성당구경이 짧아져서 광장을 떠돌았다. 어제 조나단에게 설명 들었던 광장 조각상을 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헉, 조나단; 안녕;;;

어제 안녕 빠빠이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니 뻘쭘하다. 내가 수다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낯모르는 사람의 얘길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제는 설명 들으면서 막 이해하는 척 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와서 다시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데 조나단은 내가 엄청 반가운가 보다. 하긴 그런 성정이니 안내원을 하겠지. 하지만 미안, 당신은 참 착하고 친절하지만 난 여기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땡땡아, 언제 떠나니? 하길래 오늘, 찬찬투어 마치고,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후다닥 도망. 안녕 안녕.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다니거나 유적지를 보는 것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최고라고들 한다.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눴던 대화들, 마음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겐 그런 행위들이 별 의미 없고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뭐, 다시 볼 거야? 아니잖아. 그들을 통해 뭔가 참신한 얘기나 생각을 듣고 싶어? 사람들 사는 거,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더 어릴 때는 재미났던 일들이, 이젠 허허롭기만 한 걸 보니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인가. 흔히 여행은 젊을 때 가라는 얘기들을 한다. 난 이게 체력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인 걸 알고는 있지만, 어쨌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서로 서로 넘치는 열정을 나누는 것, 거기서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나를 보여주고 너를 읽는 것, 이건 몸이든 마음이든 젊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할머니 마음을 가진 내겐 이제 그 모든 것들이 귀찮고 버겁다. 아우, 비생산적이야. (아 그러고 보니 ‘한량’ 다음의 내 장래희망이 ‘멋진 할머니’인데 ‘멋진’은 몰라도 ‘할머니’는 벌써 이룬 건가.) 아아, 그래서 여행은 ‘젊을 때’ 가야 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달의신전 재밌지만 피곤.

데이투어 차를 타고 황야를 달리다 보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산이 하나 나온다. 옛날 사람들도 틀림없이 나처럼 느꼈을 거다. 그러니 그 주위에 신전을 두 개나 지었겠지.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느낌은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유적 하나하나 설명을 마친 후 질문 없냐고 묻는 가이드에게 모두들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날 내가 한 질문은 딱 한 개. “저 산 이름은 뭔가요?”였다. Cerro Blanco, 흰 산, 이라고 했다.

달의신전은 어느 정도 발굴되어 둘러볼 수 있었지만 태양의신전은 돈 없어서 아직까지 못 열어보고 있단다. 달의신전도 독일인가 프랑스의 어느 재단에서 발굴비를 대줘서 그나마 관광객을 받을 모양이나마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전 흙벽의 문양은 한국 도깨비 무늬랑 참 비슷하게 생겼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지구 중앙에 반대편과 통하는 길다란 터널이 한 개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한쪽에서 그 터널을 타고 와 다른 편에 정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 먹고 찬찬 투어. 아 진짜 나는 배낭족 아니고 휴양족이었던 것. 그래도 북쪽에 오길 잘한 듯.

데이투어는 원래부터 ‘데이’가 아니라 사실 오전 투어 + 오후 투어이다. 오전에는 모체(Moche) 유적지인 달의신전과 박물관 구경, 오후가 찬찬(Chan Chan) 투어다. 따라서 오전만 하거나 오후만 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니 팀과 함께 점심을 먹어도 되고 따로 먹어도 된다. 버스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드가 데려다 주는 식당에 가겠다고 한 모양이고, 나는 당연히(?) 혼자 해결하겠노라 하고 내렸다. 오전 투어를 함께 했던 멕시코 커플이 함께 내린다. 그들은 오후 투어는 안 한다며, 내게 점심을 같이 먹겠냐 묻는다. 가이드가 데려다 준다던 그 식당은 엄청(물론 배낭여행객 기준이겠지;) 비싼 데라며.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다니는데 이 친구들 좀체 메뉴를 선택하지 못한다. 수십 군데 식당의 메뉴와 가격을 보고 고민만 하다 지나치느라 나도 덩달아 몇 블록이나 걷게 되었다. 이보세요, 당신들은 체력이 되나 본데 저는 오전 투어만으로 이미 삭신이 쑤시거든요. 발목이랑 발바닥이랑 허리가 나갈 것 같아요! 하며 뒤에서 찌릿찌릿 레이저를 쏘아댄 기운이 느껴졌는지, “그런데 너 시간 되겠어? 한 시 반까지 가야 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 버렸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응, 나는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래, 넌 뭘 먹을 테냐?” “글쎄, 샌드위치나 먹을까 봐.” “그래, 샌드위치는 언제나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 거기 광장 가는 길에 싸고 괜찮은 집 있어.” 이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서로 각자의 길로. 그리고 나의 점심은, 슈퍼에서 만들어 파는 중국식 볶음면 한 컵. 반찬은 길바닥으로 내리쬔 햇빛. 이렇게 또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오후 투어는 방대한 찬찬 유적을 둘러보고 완차코의 석양을 보는 데서 끝나는 일정이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방대한’ 유적은, 모두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 아니고, 그냥 흙을 이겨 만든 건물과 벽, 궁전이다. 아니 대체 그 건물들이 몇 백 년 동안 어떻게 보존이 된 거지? 그러니까 그 무모해 보이는 짓을 한 사람들은 그 지역에 비 따위는 결코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그들의 낙관은 틀렸다. 20년 전쯤, 지구 온난화의 따뜻한 손길이 여기에도 뻗쳐 마침내 비를 내려 주었으니, 그때 상당량의 찬찬 유적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뭐,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대의 도래를 예상치 못한 게 선조들 잘못은 아니다.

이 같은 불상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흙담 위에는 참으로 허술해 뵈는 슬레이트 지붕이 쳐져 있다. 여행사진을 본 사람들이 모두 “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물었던 게 바로 그 지붕 사진이었는데,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왜 찍었는지 모를 그 사진에는 찬찬의 과거와 페루의 현재, 지구의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정정. 아무래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게 찜찜해서 찾아보니, '점점' 더 훼손되고 있는 건 맞지만 엘니뇨는 이미 그들이 살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아직도 조금만 걸었다 하면 발목과 허리가 금세 아프다. 사실 오후 투어를 시작할 때쯤 나는 이미 고관절에서 소리를 내며 발을 끌고 있었다.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여기서 또 한 번. 도저히 더는 못 움직이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건 네 시쯤. 그러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차는 완차코에 도착했다. 석양사진 찍고 모이라는 가이드에게 내 숙소는 여기니 나는 이만~ 하고 돌아섰다. 5~10분이면 걸을 거리를 근 한 시간이나 걸려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덕에 완차코의 석양을 만끽. 왜들 그리로 사진 찍으러 모이는지 알겠더라는. 그리고는 다시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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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4/01/09 12:20 2014/01/0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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