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시 리마 공항. 늦은 시각인데도 공항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돈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몇 달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없는 가게가 없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잠! 좌석이 개방되어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으려니, 종업원이 근처 테이블에 다가가 메뉴판을 내민다. 주문하지 않는 자여 앉지도 말라. 다행히(?) 나는 눈에 띄지 않았던지 내게 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 짐을 이고 지고 잘 만한 공간이 있는지 탐사에 나섰다.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미관을 크게 해치면 안 되므로 노숙공간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마침 맞춤한 통로 발견. 이미 몇몇 이들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다. 나도 졸지에 공항 거지가 되어 통로에서 쪽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조심 조심 방어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배낭에 살짝 기대고, 그 다음엔 옆으로 누웠다가, 한두 시간 만에 드디어 집에서처럼 누워 자기 시작. 이제 페루에 막 도착한 것 같은 삼삼오오 무리들은 잘 생각은 않고 맥주며 카드를 가져와 논다. 어휴, 체력도 좋다.

자다 깨다, 추위에 몸부림 치다 마침내 일어난 때는 4시쯤. 이 시각에 사용 가능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렷다. iPeru에 다시 한 번 들렀으나 역시나 별 신통한 얘길 듣진 못했다. (제발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좀!) 그래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낫겠지. 밖으로 나가 막 손님을 내려주고 떠나려는 일반 택시를 하나 잡았다. Cruz del Sur 터미널을 외치니 50솔을 부른다. 아우, 트루히요에서 공항 갈 때도 그러더니 이 동네는 뭐 물어보기만 하면 다 50이래. 그 가격 아닌 거 다 알거든요. 못 알아들은 척 손을 폈다 구부리면서 손으로 표시해 달라는 시늉을 했더니 그걸 10으로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바로 25솔에 데려다 주겠단다. 지난 번 탔던 그린택시의 55솔에 비하면 감지덕지라 더 따지지 않고 고고.

덕분에 터미널에 무사 도착해서 직원이 출근하길 기다렸다. 다행히 여섯 시 반 이카(Ica)행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나의 리마는 여기까지. 하지만 수도와 잘 맞았던 적이 없는지라 그닥 아쉽지는 않다. 수도와 나의 악연(?)은 아마도 이스탄불(엄밀히 얘기하며 이스탄불은 수도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도나 마찬가지니까; 너무 갖다 붙였나?)이 그 시작인 것 같은데, 도착한 첫날 삐끼와 걷기에 너무 치인 나머지 하루 이틀 머물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날 밤에 다음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구경은 한 달 뒤 다시 돌아왔을 때 하기로. 그 때쯤이면 터키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여행 막바지, 마침 50년 만에 내린 폭설로 고속버스 휴게소에 만 하루 넘게 갇히는 사고 발생. 터키 정부에서 주는 구호물자도 받아 먹고, 내내 앉아 있던 통에 다시 없을 굵기의 종아리도 가져 보고, 9일 동안 머리 안 감기 기록도 세워 보고,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결국 귀국 전날 밤 늦게야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바람에 구경이고 뭐고 이스탄불은 빠빠이.

흠, 그러고 보니 리마라는 지명을 처음 들은 건 어릴 적 읽은 금성사 소년소녀세계명작에서였다. 티티카카 호수도 나오고, 라마라는 동물도 나오고, 리마라는 이름도 모두 거기서 처음 들었다. 젊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고, 말이 안 통하는 ‘신비로운’ 원주민 여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그린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고 성질 낼 게 분명한 작품이지만, 어린 마음에 남은 건 그 신비로운 분위기와 이국적인 이름들이었다. 마침내 도착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때가 더 나았다. 그러니 어쩌면 더 ‘자세히’ 탐험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리마 안녕.

무사히 차를 타고 언제나 나를 굶주림에서 구원해 주는 버스식량을 흡입했다. 여행정보에 따르면 7시간 정도 걸린다던데, 불과 5시간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모르고 못 내릴 뻔; 사람들이 작은 도시 이카에 가는 이유는 대개 그 인근에 있는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오아시스 마을 때문이다. 가는 방법이 택시뿐이라 터미널에 ‘공식’ 택시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그 셈에 넘어가지 않고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와카치나는 물가가 비싸다기에 슈퍼에서 물이라도 사 가고 싶었다. 웬 블로그에는 근처에 마트가 있다고 하던데, 나는 결국 못 찾았다. 길을 걷는 주민들에게 ‘슈퍼마켓?’이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무시하고 지나간다. 내가 방문한 곳을 통틀어 최고로 불친절하고 불쾌한 곳이 이카였던 듯. 서비스 노동자가 보여줌직한 친절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나, 말 거는데 대꾸도 안 하는 건 너무하잖아. 심지어 길거리에서 나를 향해 중국 사람을 흉내내며 조롱하는 아저씨들까지 만났다. 결국 슈퍼 찾기는 포기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서 점심 겸 토스트 한쪽을 먹었다. 론리에서는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지만 역시나 가격에 비해;;; 싸다는 건 어디까지나 론리 편집진 그들 기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췌. 후다닥 해치우고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흥정한 뒤 와카치나로 갔다. 미리 생각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짐을 풀고 오아시스 구경 겸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남쪽으로 오니 확실히 관광객, 특히 유럽 미국 애들이 많이 보인다.

오후엔 버기투어. 와카치나에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은 버기투어와 숙박을 세트로 판매하는데, 개조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누비는 건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차가 롤러코스터인 척도 하고, 샌딩보드도 스릴 있고. 그러나 역시 내 성정에는 투어보다는 사막이 더 매력적이다. 신비한 물결무늬와 사람 잡는 발빠짐.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종일토록 사막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모래만은. 흑. 결국 포토시(볼리비아의 광산도시)에서 쓰려고 마련해 온 마스크를 여기서 개시했다. 함께 차를 탄 일행(유럽과 미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무리들)은 마스크 쓴 나를 보고 히히덕거렸지만. 얘들아, 내 기관지는 소중하단다.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내가 묵은 방에는 프랑스 남자애 셋과 이탈리아 남자애 하나, 영국 여자애 하나가 더 있었다. 역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백인들이라 금세 친해져 어울려 술 마시고 놀고, 싸운다. (이 동네 호스텔은 주로 레스토-바를 겸업하고 있어 게스트들은 밤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며 노닥인다.) 다행히 서로 낄 생각도, 초대할 생각도 없다. 귀마개랑 수면안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얘들아, 굿나잇. 그런데 조금만 조용히 해 주면 고맙겠구나.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14/01/13 16:01 2014/01/13 16:01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187

Trackback URL : http://etceteras.pe.kr/trackback/187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 197 : Next »

블로그 이미지

투덜투덜

- etcetera

Archives

Authors

  1. etcetera

Recent Posts

Calendar

«   2018/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1313773
Today:
986
Yesterday: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