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번째 자발적 등산은 약 10년 전, 태백산이었다. 회사 관두고 싶다고 난리 친 끝에 일주일 휴가를 받아 울릉도에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는데, 인터넷이고 뭐고 제대로 안 되던 시절인지라 묵호항에서 출발하는 울릉도행 배는 하루 한 번 오전에만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 리가. 어찌 할까 고민하다 그 길로 오후 기차를 타고 태백으로 갔다. 왜 태백이었는지는, 글쎄다, 내 무의식이나 기억할까. 광부들의 사택을 개조해 만든 콘도형 민박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무식해서 용감하게) 아이젠도 없이 산에 올랐다. 주머니에는 이소라 4집이 든 CDP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숙소에서 발딱 일어나 ‘지금 나갈까? 아냐, 지금 나가기엔 너무 일러. 날도 추운데.’ 하다가 맞춤한 시간인 것 같아 (그래봤자 여섯 시나 좀 넘었을까) 나가보니 헐, 이미 긴 줄이 형성돼 있다. 한 명을 붙잡고 “이거 버스 티켓 줄인가요?” 했더니 끄덕끄덕 해서 줄 끝으로 가서 대기. 아 그러나 한참을 기다린 내 앞에 보인 것은 매표소가 아니라 버스였으니... 버스표는 저~쪽에서 구입해 왔어야 한다는; 내 발음 그렇게 후지지 않았다고. (발음이 후질 만한 단어가 없잖아;) 그냥 못 알아들었다고 할 것이지 끄덕끄덕을 왜 하냐고! 어쨌든 덕분에(!!!) 우다다다 달려 매표소 가서 표 사고 다시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우쒸.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와이나픽추는 건너 뛸 생각이었다. 올라가려고 예약을 해 두긴 했지만 이 몸으로는 무리인 것 같았다. 게다가 악명이 워낙 높아야 말이지. 그런데 막상 마추픽추에 들어가니 할 게 없었다. 음... 그럼 입구만 살짝 구경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와이나픽추 화살표를 따라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새로운 관문이 나를 맞고, 7시 예약자들이 삼삼오오 들어가고 있다.

와이나픽추. 마추픽추가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고 와이나픽추는 젊은 봉우리라는데, 그 네이밍에 지리학이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페루정부는 마추픽추의 하루 입장객을 2500명으로, 와이나픽추의 입장객을 400명(오전 7시, 10시 각 2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와이나픽추에 올라가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능력 좋은 현지 여행사는 임박해서도 표를 구해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나는 거의 한 달 전 한국에서 예매했기 때문에.)

와이나픽추의 위용
<와이나픽추>

저 사진 뒤쪽에 우뚝 선 봉우리가 와이나픽추다. 그 아래 헛간처럼 생긴 건물과, 그 근처 개미만 한 사람들이 보이는지. 그로써 저 산의 규모와 경사가 가늠 되시는지? 헥헥.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입구만 보고 가는 건 좀 서운하다. 저 문은 넘어보자 하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표를 검사하고 노트에 이름과 여권번호, 입산시각 따위를 쓰라 한다. (나올 때는 들어갈 때 썼던 이름 옆에 하산시각과 사인을 써 넣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고관리' 때문이지 싶다 --;) 그런데 내 바로 뒷사람 두 명이 표 없이 왔다가 돌아나가는 광경 목도. 음, 저 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표 없어서 못 올라가는데 내가 여기서 바로 나가면 좀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럼 조금만 가볼까? 힘들면 돌아오면 되지 뭐. ...(중략)... 모두가 말한 그대로였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등산은 아니나 한 시간 동안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 곳도 와이나픽추. 마추픽추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곳도 와이나픽추. 성취감 끝내주는 것도 와이나픽추.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절대 가면 안 될 와이나픽추. 별 거 아님. 진심 실족사만 주의하면 됨 -_-; (이렇게 엄살 떨었지만 막상 올라가서는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이도 보고, 70세는 되신 것 같은 할머니도 뵙고 그랬다;) 나중에 보니 양쪽 무릎은 다 까지고 내가 미쳤었지 싶었지만, 잘 미쳤었다. 뭘 해도 다섯 시간을 위해 수백만 원을 들여 스무 시간을 날아온 미친 짓보다야. 암.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본 마추픽추 전경
<와이나픽추에서만 찍을 수 있다는 마추픽추의 전경>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길이 마추픽추 전용 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버스값이 왕복 2만 원 돈인지라 돈 없고 체력 좋은 이들은 걸어서 오르내리기도 한다.)

와이나픽추 표지
<와이나픽추 인증. 해발 2693미터>

와이나픽추에서 내려오니 열 시 팀들이 입구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떡실신(;) 된 우리를 보고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 미소를 보여준다. 아아, 행운을 빌어요!

이제 뭘 한다? 그냥 떠돌았다. 가이드도 해설서도 아무 것도 없이. 거기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있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뱅뱅 돌았다. 그분이 사진 많이 찍으라셔서 (이럴 때만 말 잘 듣는다) 사진은 잔뜩 찍고.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도 왠지 혼자 거기 있는 느낌이 든다. 실제 찍은 사진을 봐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되레 고즈넉한 느낌이다. 신기하다. (물론 세계 어디에나 진상은 있다.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노래 부르고 떠들고 다니길래 한국말로 조용히 "니네 어제 기차에서 떠들던 걔네지 __+" 했더니 삽시간에 조용해지더군. 곧이어 대체 우리가 지금 들은 말은 어느 나라 말일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하더라는, 흐흐.)

마추픽추 전경
<모두들 찍는 그 각도에서 찍은 그 사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을 다룬 방식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땅에서 솟아 파낼 수 없을 때는, 그 바위를 초석 삼아 벽을 만들었다. 돌 두 개의 아귀가 맞지 않을 때는 잘랐는지 갈았는지, 아니면 서로 어울리는 돌을 찾아내었는지, 어쨌든 서로 맞추어 담을 쌓았다. 피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함께 흘러가기. 그러면서도 내 중심은 잃지 않기. 어쩌면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충고.

마추픽추의 정교한 담벼락
<마추픽추의 벽>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CCTV와 관제탑이 아니라 사람이 관리하도록 한 방식. ‘최첨단’ 시설을 들이기에는 돈과 기술이 부족했을까? 고용창출이 선결과제였을까? (안전요원이 생각보다 엄청 많다.) 글쎄,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 기막힌 잉카의 후손들이 최대한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무렴, 마추픽추 관광객이 페루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마추픽추의 안전요원
<마추픽추의 안전요원>

점심이 지난 어느 순간, 드디어 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음력으로 쇠는데(‘내’가 쇠는 건 아니다),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양력-음력 생일이 겹치는 날이기도 하다. 생일선물 참 거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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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4/01/22 10:40 2014/01/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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