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기차 타러 나갈 채비를 하는데 호스텔 아저씨가 여덟 시라며 깨우러 왔다. (원래 깨워주고 그런 시스템 아니다. 이 동네 체크아웃도 보통 아침 아홉 시나 열 시다.) 에스파냐어로 뭐라 뭐라 하는데 모르겠고, 그저 간밤의 일이 거듭 미안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뺨 부비부비를... 흑.

기차 타고 왔던 길을 달려 오얀타이탐보에서 아무 콜렉티보나 골라 타고 쿠스코로 돌아왔다. 원래는 올 때든 갈 때든 시간을 내어 오얀타이탐보 구경을 조금이나마 하려고 했었는데 결국 기차역 구경만 하고 왔다는; 쿠스코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 있었다. 정처 없이 길을 걷다(그렇다, 쥔장은 맨날 ‘정처 없이’ 길을 걷는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제일 아까워하는 인간이, 조금만 걸어도 발목과 발바닥에 무리가 가는 인간이, 밖으로만 나가면 하염없이 걷는다) 마침 ‘사이판’이라는 이름의 중국식당 발견. 아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지. 나는 사이판에 세 번 다녀온 사람이고, 사이판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고, 사이판에서 중국집은 안 가본 사람이고, 서브웨이와 파스타집, 일본라멘집만 다니는 사람인데 지구 반대편에서 사이판 중국집을 발견하다니. 아 그래, 이건 서울에서 ‘여수횟집’ 간판을 본 기분과 비슷하다. 그러니 메뉴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들어가야지. 대충 허기를 채우고 산 페드로(San Pedro) 시장 구경에 나섰다. 기념품, 과일, 잡화, 식료 등등을 파는 안쪽에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다. 상인들이 추렴해서 간판을 통일했나 보다. (이 집에는 있는 메뉴가 저 집에는 없는 경우도 있긴 한데, 메뉴에 없어도 옆집에서 해 주는 건 다 해줄 것 같은 느낌) 아니 그런데 이렇게 쌀 수가! 내일은 꼭 여기서 밥 먹을 테다. 메뉴판 사진 찍어 와서 스페인어 사전 찾았다구!

쿠스코 시장의 메뉴판
<산 페드로 시장의 메뉴판>

어제의 등산 덕에 허벅지 근육이 다 터졌는데 그래도 컨디션이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끙차 소리가 절로 나긴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볼리비아 영사관 가서 비자를 받았다. 다른 분들 블로그를 보니 비자 받기 어려웠다는 사람도 간혹 있었는데 나는 “서류 가져왔나요?” “네.” “이거 작성하세요” 하고 서류 작성하고 있으려니 그새 여권에 비자 찍어서 주더라는. 아무래도 복불복인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앞에서 초인종 눌렀는데 2층에서 언니야가 커튼 열고 기다리라고 했을 때 짜증 안 내고 문 열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서인 것 같기도 하다, 흐흐. 비자 받기에 성공한 후 다시 시내로 나와 모라이 투어 예약하고 현금을 좀 찾았다. (카드로 찾았는데 현금서비스인 거 알고 완전 짜증나서 포스트 또 올림) 오전 중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다니 짝짝짝! 오늘은 쿠스코에서 하루 종일 놀기로 했으니까 시내 구경이랑 시장 구경을 해야지.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에 큰 성당이 두 개 있는 건 쿠스코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신자가 아니라 큰 감흥은 없고, 오히려 고풍스런 건물 2층에 자리한 스타벅스가 더 신기했다.

쿠스코 스타벅스
<쿠스코 스타벅스>

시골이라더니, 한국 시골에는 스타벅스 없다구요.

어제 결심한 대로 산 페드로 시장에서 3.5솔짜리(1500원도 안 된다) 달걀밥을 사 먹었다. 밥 위에 달걀 프라이, 감자튀김이 올라가 있고, 나름 양파, 토마토 같은 채 썬 채소들이 사이드로 얹혀 있다. 만족 만족 대만족. 단언컨대 이 달걀밥은 페루에서 사 먹은 것들 중 가격 대비 가장 훌륭한 음식이었다. (쥔장 식성이 원래 일품음식 좋아하고 반찬 많이 안 먹음) 저녁에는 L님을 만나 현지인들이 가는 소심장 꼬치구이 가게에 갔다. 내가 편식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L님은 내가 과연 그걸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돼지염통도 먹는데 소심장은 못 먹을 리 없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사실, 심장은 근육이라서 식감만 따지자면 닭가슴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콜라겐의 식감을 못 견디는 내게는 맞춤인 음식이었던 셈.

L님 덕에 일개 여행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현지인 식당도 가 보고, 작고 예쁜 기념품 가게도 가 보고, 혼자라면 안 들어갔을 카페도 가 보고, 혼자 다녔을 때보다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래서들 친구가 필요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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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4/01/28 10:52 2014/01/2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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