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초등학교 졸업 전부터 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특출나게 공부도 잘하면서 온갖 학생활동도 잘하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그에게는 그만큼이나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동생까지 있어서 그들 남매는 모두 학교에서 유명했고, 나 역시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그가 나를 알게 된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이다. 다른 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고등학교 동문 모임(속칭 쪼인트 동문회)에서 나는 비로소 그와 인사를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를 만나는 건 늘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사람을 ‘즐거움’으로 기억하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나 그는 그 명석함에 어울리지 않게 성격까지 좋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만나본 그 학교 출신 중 거의 유일하게,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 똑똑함을 대학에 따라 나눈다고 오해할 분을 위한 첨언: 그의 학교는 관악구에 있는 국립대였다.) 게다가 그는 좋지 않은 이야기도 긍정적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만나 얘기하고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군대에 간 그는 종종 편지도 보내왔다. 한창 박홍 목사의 선동이 유행할 때라, 학과 이름 때문에 주사파로 오인 받은 이야기, 포에 손가락을 다친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유일하게, 내게 군대 면회라는 걸 경험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구러 우리는 각자 졸업을 했고 취업도 했다. 그의 명함을 받아 챙긴 기억이 있으니 그래도 서른 즈음까지는 연락을 했었나 보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고,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나는 아는 사람도 없는 그 결혼식에 혼자 씩씩하게 다녀왔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는 딱히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려 애쓰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각자의 삶을 살았고, 당연한 수순으로 연락은 끊기게 되었다. 한두 번 생각이 날 때면 잘 살겠거니, 잘 살아주겠거니 했을 뿐.

지난 주 한 모임에 갔다가 나는 우연히 그와 같은 회사를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이 회사가 맞던가? 그는 여전히 잘 사나? 싶어 그의 회사명과 이름을 구글에 입력해 보았고, 검색 결과는... 이미 몇 년 지나버린 그의 부고를 전하고 있었다. 어렵게 수소문해 들은 바, 사고라 했다.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그의 시간은, 내가 그의 부재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그곳에 멈춰 있고, 나는 이미 그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몇 년째 살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를 만나 가슴이 떨려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알아야 했던 일을 당시에 알지 못했던 데 대한 안타까움일까. 남편에 이어 아들마저 먼저 보내게 돼 버린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곰곰 생각하다 사실 그를 기억하면서 따라오는 키워드는 즐거움이 아니라 짠함, 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오래 오래 사는 것과 반드시 같지는 않으므로. 그의 생은 비록 짧았으나 충만하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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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6/03/01 16:34 2016/03/0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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