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치한 관련 몹쓸 통계를 인용한 몹쓸 기사에 통박을 주는 글을 하나 올렸더니 몇 주 동안 '지하철 치한' 관련 검색어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은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사례'를 찾는 분이 계셨던 모양인데... 여기 있소, 사례!

첫 직장에 첫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지금과 달리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식빵 굽고 달걀 튀겨 아침도 든든히 먹고 여덟 시 반 출근에 맞춰 그 유명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출근시간대니 당연히 지하철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었고, 아 또 지금과 달리 적당한 길이의 치마 정장에 화장까지 곱게 하고 뾰족구두까지 신었던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

그도 그럴 것이 꽤 오랫동안 내가 기거하던 곳은 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였던 데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하철 타는 걸 싫어하여 웬만한 곳은 버스로 이동(환승할인이 없던 시절에도 버스 두 번 타는 걸 마다하지 않은 적도 꽤 있었다)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 맞춰 가야 하는 출근길에, 그것도 새파란 막내사원이 세월아 네월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지옥철'이라고도, '순대'라고도 하는(누군가는 '쥐'라고도 한 모양이지? 인터넷에서만 시끌시끌하던데 뭘 그리들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건지. 혹 각하의 추종자들이신 건지?) 그 지하철을 타보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 이것 참, 발 디딜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실은 옆 사람에게 지탱하고 있는) 와중에 웬 사람의 손이 내 배에 와 닿는다. 이건 대체 뭥미?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일부러 틈을 파고들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위치인 거다. 그래서 기다렸다. 일말이라도 내가 틀렸을 가능성은 있는 거니까. 제발 당신을 의심한 날 부끄럽게 해 줘!

아 그런데 왜 그들은 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인지, 이 손이 스멀스멀 위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옳거니, 너 잘 걸렸다. 나 꼬까옷 입고 첫 출근하는 날이라굿!

"손 좀 치워주시겠어요?"

손의 임자를 똑바로 보면서 내가 한 말은 저게 다였다. 반말지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못 하고, 화가 날수록 한없이 공손해지는 말투를 가진 인간인지라, 최대한(?) 예의를 갖춰 주었다.

출근시간대 지하철은 몹시 붐비지만 상대적으로 몹시 조용하다. 자다 깨서 나온 사람들이 시끄럽게 굴 일이 뭐 그리 있겠나. 아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저 한 마디면 근방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당사자에게 쏟아진다. 거기다 웬? 손 치워 달라니? 아하, 저 놈 나쁜 놈이구만그래, 하는 시선으로 바뀌는 데는 채 1초가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쯧쯧, 출근길에 웬 처자 가슴팍이나 한 번 만져 보겠거니 했던 그 인간은 어쩌면 보고 듣던 지하철 성추행범 매뉴얼에서 한 치도 안 벗어났던지, "내가 뭘 어쨌다고" 운운부터 "아침부터 재수 없게" 운운까지 빼먹지 않았다. 마지막도 매뉴얼스럽게, 다음 정거장에서 은근슬쩍 하차.

그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마다 나는 말하고 있다. "그 손 좀 치워 주시겠어요?"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나는 더욱 당당해지고 그는 순식간에 움츠러든다. 그런데 지금 문득 든 생각. 손 말고 다른 걸 갖다 대면 어쩌나. "그 고추 좀 치워 주시겠어요?" 해야 하나? -_-a

성추행을 겪는 대부분의 여성은 그냥 몸이 굳은 채 멍하니 그 상황을 흘려보낸다. 그러나 가위눌림과 마찬가지로, 말 한 마디, 손짓 하나만으로도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성추행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방법을 쓰든 그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지하철수사대에 신고까지는 못 하더라도 그런 인간이 아침부터 희희낙락해서 쏘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그렇고, 지하철에서 "옆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삼갑시다" 어쩌구 하는 안내방송이 지하철 성추행 하지 말라는 말이란 걸, 요즘 사람들은 알까? 나는 저 방송 들을 때마다 '내게 불쾌감을 주는' 지하철에서 떠드는 사람도 처벌될 수 있겠다 싶어 혼자 몰래 웃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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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10/07 22:34 2009/10/0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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