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동에는 뭐가 있나. 살아본 적은 없으니 이렇다 할 추억의 장소도 없다. 가끔 다녔던 밥집, 칼국수집, 돈까스집, 콩나물국밥집, 술집, 편의점. 아, 동네부엌과 두레생협도 있다. 성미산학교도, 작은나무 카페도. 그 동네에 처음 가본 게 불과 1년 전이건만 그분과 몇 번 갔던 두부집은 이제 없어져 부대찌개집이 되었고, 저녁 8시면 빵값을 깎아 팔던 제과점 겸 커피집은 보쌈집이 되었다. 배드민턴 가게는 없어졌나 그대로 있나. 그리고, 웬 새 건물에 들어선 떨떠름한 창고 하나는 카페가 되었다. 카페 문. 달다방.

내 입맛은 나도 종잡을 수가 없어 남들 다 짜다는데도 맛있게 먹기도 하고, 남들 다 맛나다는데도 너무 짜고 시다기도 하고, 타서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는 음식도 와구와구 밀어 넣기도 하고, 산화가 되다 못해 녹이 슬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커피로 내린 커피 한 잔에 감동하기도 하고(아아, 그러나 사실 이건 뻥이다. 이런 커피는 못 마신다. 상황에 따라 감동은 할지언정;;;), 남들 다 잘만 먹고 있는, 멀쩡해 보이는 밥에서 수돗물 냄새를 맡고 멀리 치워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커피 얘기에서 살짝 내비쳤듯이, 나는 맛없는 커피는 안/못 마신다. 사무실에서 사다 마시는 싸구려 K커피(1.36kg에 2만 원이 안 된다)를 입에도 안 대고 주야장천 커피믹스만 타 마시는 건 그래서다. 맛없는 커피를 마시느니 그냥 커피 같지도 않은 커피맛 설탕물을 마시겠어. 열량도 듬뿍, 아침 대용으로 그만인 커피믹스.

맛없는 커피 운운에서 또 살짝 내비쳤듯이, 커피를 평가하는 내 언어는 딱 둘이다. 맛있어. 맛없어. 맛있는 커피는 맛이 있다. 쓴맛, 단맛, 신맛... 등등의 비율이 어쩌고 바디감이 어쩌고 하는 거 모른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는데 어쩔 거냐는. 맛있어서 맛있다고 하는데 또 어쩔 거냐는. 물론 어린 장금이와 내가 다른 점은, 홍시가 불고기에 들어간 건 '사실'이지만, 맛은 주관적이라 내가 열광하는 에스프레소를 먹고 어떤 사람은 으웩, 사약이닷! 할 수 있다는 거다(물론 그런 경우 물을 좀 타주면 바로 '맛있당~'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기 커피 맛없다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 '맛'에도 '객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별 쓰잘데 없는 얘길 하느라 많이 돌아왔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성산동에 카페 <문>이라는 가게가 생겼다. 커피도 팔고 차도 팔고 병맥주도 판다. 간단한 안주도. 카ㅇ 500ml가 고작 4,000원, 벡스 다ㅇ가 5,000원밖에 안 하는 게 불만(?)이지만서도. 커피는 에스프레소/아메리카노 3,000원부터 시작. 자기 컵을 가지고 가면 10% 할인도 해준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여기서 쓰는 원두는 모두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아름다운 커피'라는 거다. '공정'이라는 말은 왠지 멋없고 맛없고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느낌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사실 부직포에 담겨 나오는 1회용 '아름다운 커피'는 내 입에 안 맞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공정무역 커피가 이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생두를 들여와 직접 볶고 블렌딩 해서 신선한 원두로만 커피를 내린다(직접 봤으니 하는 말이다). 원두의 산지는 네팔, 페루, 티모르. 모두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들. 이 원두로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면, 고작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렸을 뿐인데도 사람 미치게 만드는 커피향이 집안 전체를 감싼다. 못 믿겠다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 보고 말씀하시라.

성산동엔 달다방이 있다. 6호선 망원역 지하철역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직진하면 망원우체국 사거리가 나오고, 횡단보도를 통해 그 사거리를 건너 한 블록쯤 더 가면 다솔동물병원이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3분쯤 직진하면 외벽의 나뭇살이 눈에 띄는 건물, 시민공간 <나루>가 나온다. 지하에 성미산 마을극장이 있는. 그 건물의 1층이 바로 카페 문이다. 카페 문, 커피와 당신을 이어주는 문이 되길. 당신과 커피 농민을 이어주는 문이 되길.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문이 되길. 그리하여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문이 되길. 그러니 그대, 성산동에 가거든, 카페 <문>에 한 번 들러 주시라. 또 아는가. 예기치 않은 어느 밤 이 정체불명(?)의 블로그 쥔장이라도 만나게 될지. 뭐, 쥔장 따위 없어도 매일 아침 아홉 시에 문 열러 나오는, 타로 잘 보는 카페 쥔장-이자 바리스타- 언니(내가 '문지기'라는 별칭을 지어주었으나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는 않는다. 쳇)랑만 놀아도 충분하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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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4 17:01 2009/11/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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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w 2009/11/24 20:38 # M/D Reply Permalink

    달달한 글이로세. 내일은 나도 문지기^^가 타주는 커피 마셔야지~
    -오랜만의 늦퇴근에 즐겁게 삐다방을 즐기는 나우 다녀감, 라라~

    1. etcetera 2009/11/25 10:28 # M/D Permalink

      달달한 글은 뭔 글이여? 늦퇴근과 즐거운 삐다방이 뭔 상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쉬엄쉬엄 일해랑.

  2. 작게작게 2009/11/25 21:15 # M/D Reply Permalink

    성산동이면 근처인데... 확 땡기네요.
    오랜만이죠 따우님.
    카페 문에서 직접 로스팅을 하는 모양이네요. 아름다운커피나 카페티모르에서 생두를 구입해서.
    좋지요. 그 방법.
    아, 배트민턴 가게는 아직 있을 거예요.(물론 몇 달 전의 기억이긴 합니다만)
    최근 동네부엌 쪽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물론 작은나무 카페도 그대로 있습니다.

    1. etcetera 2009/11/26 10:05 # M/D Permalink

      어머. 그 근처로 이사하신 거여요? 저 아직도 한 달에 두어 번은 성산동 가요. 제가 한 달 전쯤 작은나무에서 커피 마시면서 봤더니 배드민턴 가게가 비어 있고 간판작업을 새로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후로 체크(?)를 못 해봐서 어찌 되었는지;;;

      그나저나, 달다방에서 보십시다욧! 제가 12월엔 학원을 좀 쉬려고 해서 평일에도 시간이 나요. 연락 드리겠사와요~

    2. etcetera 2009/12/10 13:22 # M/D Permalink

      며칠 전에 확인한 바... 배드민턴 집은 이동통신사 대리점으로 바뀌었네요. 가본 적도 없으면서 괜히 아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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