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보내 드리느라 세상과 며칠 격리되어 있다 가까스로 다시 발을 들여놓은 어젯밤, '향일암 전소'라는 인터넷 기사 제목을 마주해 버렸다. 정황파악을 위해 기사를 클릭하기는 했지만 부러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내게는 낙산사 화재보다, 숭례문 전소보다 더 먹먹한 소식인지라 궁금한 게 많을 법도 하지만, 아마 오랫동안 기사를 정독하는 일은 없지 싶다.

향일암 올라가는 길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험했었다. 변변한 계단도 없고 사람 하나 빠져 나가기가 힘들어 보이는 바위틈이 몇 개고 있는, 그토록 '불친절'한 길을 한참이고 걸어야 비로소 절벽에 면한 절과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훗날 아주 조금 친절해진 그 길에 놓인 계단에는 어머니가 시주한 계단 두어 개가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아마 어제 새벽에 타버린 기왓장 안쪽에는 내 이름도 몇 개쯤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 험한 길을 오르는 것 자체가 마음 닦는 길이었음을, 어린 나는 알았을까.
 
어머니가 가족의 안녕과 대학합격을 빌고 빌었던 그 석불 앞에서 나는 어설픈 절을 흉내내며 무엇을 빌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 것도 빌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다만 관광객이 무시로 드나드는 번잡스러움을 피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암자가 있다는 걸 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늘 그쪽을 흘낏거렸던 기억이 있다.

먼 데서 온 사람들이야 새벽길을 걸어 그곳 일출을 보지만, 성정상 어디를 가든 부러 일출을 보지는 않는 데다 외지인도 아니었던 나는 거기서 해돋이를 본 적은 없다. 내게 남아 있는 건 다만, 바위틈새마다 누군가가 놓아두었던 촛불들, 거대한 거북이 등딱지 같았던 절벽, 그리고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에 걸맞고도 걸맞았던,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언제나 세상 끝인 것처럼 눈부셨던 햇빛.

무엇이건 빌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지척에 오랫동안 살았으면서도, 험한 길 핑계에, 늘 거기 있을 거라는 안일함이 더해져 몇 번 걸음하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 연고도 없는, 내 유년의 동네. 어린 내가, 청소녀인 내가, 말썽쟁이였던 이십 대의 내가 그곳에서 반쯤 타버린 것만 같은 기분. 불에 그슬린 나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곳에 오르기까지 걸었던 그 길만큼, 그곳에 머물렀던 그 짧은 순간만큼 내 삶이 조금은 더 쉬워지고 조금은 더 가벼워졌었던 거구나 깨달았다.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슴에 저마다의 향일암을 하나씩 갖고 있을 거라는 위안으로는 모자라다. 그러니 지금은 다만, 추모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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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12/21 19:51 2009/12/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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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rgettable 2009/12/22 09:55 # M/D Reply Permalink

    여수에서 향일암 말고 또 좋았던 기억이 훈훈한 청소년들의 외모였는데,
    따우님이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소문이 증빙되는 순간이군요. 여수출신이셨구나. ^^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봄'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남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절로 돌아와서 스님이 시키는대로 사람을 죽인 칼로 불경을 새기는 장면이었는데요. 그게 마음을 닦는 행동이라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에 피가 나도록 열심히 하더라구요. 향일암을 오르는 어린 따우님의 마음이 그와 비슷했던건 아닐까 생각해보니 부럽습니다. 전 그저 외지인에 북적대는 관광객일 뿐이었다는게 아쉽고 부끄럽기도 하구요.

    토닥토닥
    (길게 썼는데 오류나서 지워지는 바람에 다시 썼는데 처음께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아흑)

    1. etcetera 2009/12/22 21:51 # M/D Permalink

      아이고, 어쩌나요. forgettable님이 가셨을 때 전 이미 서울시민이 된 지 오래... ㅎㅎㅎ 저 떠나오고 나서 인물들이 좀 괜찮아졌나 봐요;;;

      지금 댓글도 참 좋아서, 아까 오후에 읽고도 뭐라 답글을 달아야 할지 몰라 내내 머뭇거리고 있다가 친구랑 밥이랑 술 한 잔 하고 들어온 김에 한 줄 남겨요. 같이 위로할 사람이 있어서 다행인 밤이에요 :)

  2. 비밀방문자 2009/12/23 12:38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etcetera 2009/12/23 23:30 # M/D Permalink

      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라 믿어요. 저는 별로 안 슬프답니다. '실감'하기엔 아직 너무 짧은 시간인 것 같아요. 그나저나 망년회는 천상 신년회로 밀려나는 분위기군요. 원래는 지난 주쯤 연락해서 이번 주에 뵈었으면 했는데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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