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섭에게 바퀴벌레가 있었다면 내겐 '다리마니 벌레(이건 내가 부르는 이름이고, 정식 이름은 '집그리마'라고 한다)'가 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이 벌레를, 처음에는 소스라치면서 약으로 잡았다가, 혐오스런 모습(그것도 누구의 눈으로 본 '혐오'란 말인가!) 말고는 별다른 해도 없다기에 웬만하면, 그러니까 내 영역을 많이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보아 넘기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다리마니 벌레란:
세○코 게시판에 가서 찾아보니(질문이 재미없어서인지, 답변이 예전만큼 재미있지는 않은 듯하다), 원래 한국에는 없던 벌레로, 전후 미국에서 들여온 짐에 숨어 들어온 것들이 이렇게 번창한 것 같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물품을 공수해 올 만한 집이면 당연히 좀 있이 사는 집이었을 테고, '돈벌레'라는 별칭은 그렇게 붙은 게 아닌가 싶다고. 백과사전을 뒤져보면,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따뜻하고 음식찌꺼기(혹은 잔 벌레들)가 있는 집구석으로 모여든다는데, 우리 집에는 사시사철 상주한다.

아무튼, 요 녀석들이 겨울 들어 안 보인다 싶었다. 벌레마저 못 사는 환경이 되었단 말인가 자책(응?)하던 무렵, 침대 옆쪽 벽과 바닥장판 사이로 벌어진 틈에서 나는 그 녀석의 무수한 다리 끝을 보아버렸다. 벌레 한 마리 숨어들기 딱 좋은 공간이 거기 있었는데, 녀석은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도 살아야지. 거기서나마 겨울을 나렴. 그렇게 우리의 공식적인 동거가 시작되었다.

외로워서 '그'와의 동거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내게 외로움은 익숙하고 편한 것이다. 다만 나는 점점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벌레마저 아낄 만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단지 나와 생김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를 뿐, 내게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집 계약서에 내 도장 찍었으니 너희 집은 아니라고 얘기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하는 의문. 살면 살수록 사는 게 조금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왜 살면 살수록 어렵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지.

다리마니 벌레는 보통 내가 없을 때 집안을 누비다가 문을 열고 불을 켜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가는데, 이 녀석은 내 눈을 거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그 자리에 딱 그만큼만 다리를 내놓고 있는 녀석이 뭘 먹고 사는지, 밖으로, 그러니까 내 방으로 나오기는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CCTV도 없으니 궁금함은 궁금함으로 놔둘밖에. 그저 나는 밤마다 슬쩍 한 번 쳐다보고 오늘도 안녕? 뭘 좀 먹긴 했니? 바나나껍질 안 치우고 놔뒀는데 먹은 거야? 아니면 방바닥에 떨어진 살비듬으로 한 끼 때웠니? 혼자서 웅얼웅얼.

여기서 다시 잠깐, 그 녀석이 우렁각시라는 설에 대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집안이 조금씩 더 지저분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다른 종류의 우렁각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그런데 오늘,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 불을 켜니 아니 이런, 그 녀석이 다른 쪽 벽을 타고 있는 게 아닌가. 다리가 좀 더 늘어진 모습을 보고 장판 사이 거주자가 아닌 걸 알았어야 했는데, 다른 녀석이 있을 리 없다는 막연한 고집(은 역시 위험하다-), 멀리서 입으로 후후 불어도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대담함(그건 다리마니 벌레의 천성이 아니라구!), 심지어 벽을 툭툭 쳐도 끄떡 않는 배짱은 결국 오랜만에 레○드를 손에 들게 하였다. 계약을 어긴 건 너라구. 내가 있을 땐 장판에서 안 나오기로 했잖아. 취익~ 췩~

다리마니 벌레든 바퀴벌레든, 벌레를 죽일 때는 레○드를 익사할 정도로 흠뻑 뿌린다. 바퀴벌레는 얼른 죽여 없애고 싶어서. 다리마니 벌레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단축시켜 주기 위해서. 물론 죽는 모습을 직면할 수는 없으니 실눈은 필수.

벽지를 흠뻑 적신 레○드를 맞고 땅에 떨어진 녀석을 보고서야 혹시 장판 거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장판 사이를 힐끗 보니 아뿔싸. 변함없이 아주 조금 드러나 있는 다리들. …… 우리는 여기까지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 동료를 죽였다고 밤에 나를 물어버릴지도 몰라. 혹시 좀 전에 그 녀석이랑 응응해서 알이라도 깐 거 아냐? 그럼 집은 다리마니 벌레들의 천국? 으아악.

취익~ 췩~
그냥 거기서 생을 마감했으면 좋으련만, 장판 사이에 뿌리니 참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 얼른 가렴. 취익~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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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01/07 21:47 2009/01/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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