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즈와 객주

지지난 토요일, 드디어 이사를 했다. 가만 보면 지난 집보다 크기가 많이 작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방이 하나 줄어서 큰 가구를 수납하기 어렵다는 점과, 혼자 사는 내게는 하등 쓸데없는, 거실이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 다용도실이 13kg 세탁기가 들어갈 정도로 크긴 하지만 안쪽으로 문이 열리므로 세탁기'밖에' 놓을 수 없다는 점이 이 집을 무한히 작아 보이게 한다. 지금 집 반도 안 되는 크기에 모든 짐을 이고 지고 살았던 적도 있으면서, 훗.

이사하던 주 화요일, 스물세 상자에 나누어 담은 책과 수업자료, 책꽂이 네 개가 빠져 나갔다. 그 책들은 내가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그분의 사무실 창고에 보관될 것이다. 사무실에서 소식만 들은(책을 싸고 실어 가는 일은 모두 애정해 마지않는 그분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나는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스무 살에 처음 서울로 왔을 때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은 작은 영한사전 한 권이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한 권씩 사 모은 <태백산맥>과 몇몇 새내기용 사회과학 책들을 합쳐도, 대학졸업 때까지 내가 보유하고 있던 책은 3단인가 4단 공간박스를 겨우 채울 만한 수준.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건 첫 직장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더 이상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책을 사 볼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게 되기도 했고, 막 인터넷서점이 태동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저기서 책을 사들였고, 사들인 족족 읽어 나갔다. 그 와중에 마주한 <여수의 사랑>, 그 작품을 읽으며 깜짝 놀랐던 건 익숙한 지명이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미하고 고된 노동,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퇴근길과 퇴근 후에 미친 듯이 책 읽는 여자 주인공. 그건 바로 나였다.

그 후로 밥벌이가 중단된 적은 있었어도 책을 사들이는 걸 중단한 적은 없었지 싶다. 술값과 책값만큼은 아끼지 않았던 시절은 근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 어느 순간부터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추월했다는 사실을 굳이 보탤 필요는 없겠다. 그건 책 사들이는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뻔한 결말이니까.

슬금슬금 책을 안 사고 덜 읽게 된 과정은 앞서 대충 읊은 바 있으니 생략하자. 책을 더 이상 사들이지 않아도, 신간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어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마저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되더라도 불안하지 않았던 건, 아직 읽지 못하고 묵혀둔, 책꽂이에서 잘 숙성되고 있는 책들 때문이었다. 어머, 저 책은 언제 샀던 거야? 깜짝 놀라며 장독 뚜껑 열어보듯 한 번씩 꺼내 보던 책들. 책꽂이를 놓고 하는 보물찾기는 나름 얼마나 흥미진진했던가.

그런데 나를 웃기고 울렸던 그 책이, 이제는 한 권도 없다니 기분이 이상할 만도 했다. 어떤 책을 가져가고 어떤 책을 남겨야 할지 몰라 전부를 들어내기로 결정한 건 정작 나였으면서, 책이라고는 없는 내 집이라니, 어째 상상이 되지도 않았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궁금해하거나 이상해하지 않았겠지만 혼자 적이 부끄럽기도 했다. 어머, 저 집엔 책이라고는 없어!

그날 밤,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텅~(은 거짓말이다. 이사 준비한답시고 온갖 짐을 흩뜨려 놔서 집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빈 책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눈에 띈 <셜록홈즈 전집>과 <객주> 한 질. 응? 이건 뭐?

책이 남아 있오요! 조금은 흥분해서 그분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책꽂이 구석에 놓여 있어 눈에 안 띄는 바람에 가까스로 귀양이 면제된 녀석들이라 했다. 그러면서 셜록홈즈를 연구하는 한 해를 보내라는 농을 건넨다. 하하. 홈즈는 진작에 완독했거든요! <객주>라면 몰라도. 그래도 좋아 좋아. 또 읽지 뭐.

다른 짐을 정리하면서 용케 책꽂이에서 빠져 나와 있던 녀석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육식의 종말> <동물농장> <사랑 받지 않을 권리>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운명> 등등. 어이구, 대견한 것들. 토닥토닥. 책에도 궁뎅이가 있다면, 진심으로 두드려 주고 싶었다. 어찌 그리 잘 숨었었니, 응?

이삿짐센터 짐꾼들의 무성의함과 불성실함, 무신경의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터진 밀가루 봉지를 다른 식품들과 함께 넣어두고 나 몰라라 가버린 건, 그래서 그 안을 온통 밀가루범벅으로 만들어버린 건 극히 작은 예다) 치를 떨며 정리해 나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작은 방에 둔 공간박스에서 녀석들과 눈을 마주칠 때면 실없이 웃게 된다. 그리고 미리 궁금하다. 내년에 스물세 상자의 책과 재회할 때쯤이면 나는 정말 셜록홈즈와 객주 전문가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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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3/22 14:00 2010/03/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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