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용하는 스파게티 가게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메뉴를 보고 주문하는 건 늘 내 몫. 처음 같이 저녁을 먹었을 때는 피자에서 샐러드까지 다 알아서 주문하길래 별 생각 없었는데 얼마 안 가 그렇게 주문하는 걸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메뉴판을 훑는 건 내 차지가 되었다. 머리에 에어컨 바람이 바로 쏘이는 자리라 겉옷을 벗어 머리에 두르고 긴 소매는 턱밑으로 맨다. 장옷 같다고 하하 웃더니 무슬림 여성 같다고 또 하하 웃는다. 지나가던 손님들도 혹 타국 여인인가 싶어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뭐 어떠랴. 두통보다 낫지.

오늘은 좋아하던 간장 소스 스파게티보다 크랩 스파게티를 더 좋아하는 눈치. 이제 좀 질렸나? 다음엔 간장 소스 빼고 다른 걸 시켜봐야겠다. 그렇지만 카프레제 샐러드는 여전히 잘 먹는다. 아유 이뻐라. 뭐냐. 이 엄마 같은 마음은;;;

홑겹 천으로 에어컨 바람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어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손님들도 다 나가 조용해진 김에 좀 더 있었으면 했지만 내가 머리 아프다니 같이 일어선다. 저녁값을 내겠다는 그를 굳이 말리지 않는다. 다음 번엔 이 집에 쌓은 마일리지로 스파게티 한 그릇은 먹을 수 있겠다.

바로 옆 커피 가게로 자리를 옮겨 변함없이 아메리카노 두 잔 진하게 머그에 주세요를 외치고, 스파게티가 좀 부족했던 김에 브라우니도 하나 추가한다. 아싸, 스탬프 다 찍혔으니 다음엔 공짜로 한 잔 마셔야지. 스탬프 다 찍고 공짜로 마시는 커피는 비싼 걸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만 둘 다 단 걸 좋아하지 않아 늘 아메리카노다. 그래 공짜로 마시면서도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날도 선선하겠다 아예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떤다. 보통 떠드는 쪽은 나다. 다사다난했던 한 주를 보냈던 지라 해줄 얘기가 많다. 평일 통화는 짧게 끝내면서 "이번 주에 만나면 자세히 얘기해 줄게요" 하는 통에 밀렸던 얘기가 한가득. 짹짹짹짹.

커피도 다 마시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라 산책하자 먼저 말을 꺼낸다. 근처 공원쯤을 생각했는데 한강공원으로 차를 돌린다. 손을 잡고 터덜터덜 하염없이 걷는다. 중간 중간 농담 따먹기도 하면서.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손 잡는 것도 팔짱 끼는 것도 무척 어색해하더니 이젠 먼저 손도 내밀어 준다.

걷다 보니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재즈 콘서트가 한창이다.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재즈를 즐기는 그를 몰래 훔쳐본다. 쫑알쫑알 하고픈 순간이 많았지만 혹여 음악 감상에 방해가 될까 반으로 줄인다. 그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손을 높이 들어 박수를 친다. 대충 박수 시늉만 내는 나랑은 천지차이. 음악가에게 이렇게 감사 표하는 버릇이 몸에 밴 듯하다. 무대에서 혹시라도 이이를 보면 참 기분 좋겠구나 싶다.

콘서트가 끝나고 무대정리는 어떻게 할까 둘 다 궁금해 하며 근처를 서성이다 쏘세지 쏘세지를 외친 내가 노점에서 한 꼬치 먹을 수 있게 해준다. 한 입 먹고 내미니 맛보아 준다. 손에 머스터드 소스랑 케첩이 묻어 끈적하지만 계속 내 손을 잡고 있다.

별 일 없이 지나간 일 주일에 단 한 번의 만남.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오래 된 연인의 데이트. 그러나 당신 손을 잡고 있는 이 순간이, 내게는 여전히 기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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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6/15 18:27 2010/06/1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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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orgettable 2010/06/16 11:34 # M/D Reply Permalink

    사실은 자주 옵니다요. ㅎㅎ 빠지지 않고 글 다 읽는걸요;;;;
    멋진 애인님이에요. 그리고 소소한 일상에도 기뻐하는 도님도 좋고요.

    1. etcetera 2010/06/16 13:10 # M/D Permalink

      영광입니다요;;; 그리고 음 뭐, 울 앤님이 좀 멋진 분이긴 하죠, 힛;

  2. 김꼬깜 2010/06/16 22:13 # M/D Reply Permalink

    따우. 왠지 찡하다..

    1. etcetera 2010/06/17 09:48 # M/D Permalink

      음, 이 댓글을 보니 왠지 좀 부끄러운데 ^^;

  3. 2010/06/17 13:24 # M/D Reply Permalink

    왠지 낯간지럽지만, 사랑을... 하는구나, 따옹-

    기적이라는 표현은 참, 정말 영화 속에서나 보던 ㅋ

    1. etcetera 2010/06/17 14:21 # M/D Permalink

      엄, 우리 폴도 언넝 연애해야 할 텐데 =3=3=3

  4. 바람 2010/06/17 14:03 # M/D Reply Permalink

    정말, 기적이라는 표현이 연인에 대한 감정이 다뿍 담긴다.

    1. etcetera 2010/06/17 14:22 # M/D Permalink

      "앤님쏭(song)"은 어딜 가나 인기라는 사실이 이 댓글들로 증명되었다능...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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