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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에서 잉카의 수도 쿠스코(Cuzco)까지는 14시간이 걸린다. 그 열네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산 넘고 또 산 넘고 또 산 넘고, 점점 높아지고 달리는 건 버스인데 내 숨도 차고, 창가에 둔 물병이 빵빵해졌다 쪼그라들기를 반복하고, 그럼에도 바깥 풍경은 혼자 보기 아깝게 멋있고.

쿠스코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저기가 쿠스코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 동네에 온 듯, 기와집도 있고 전체적으로 예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품위와 위엄이 느껴진다. 도시 전체에 후광이 걸린 것 같다.

쿠스코 가는 길
<쿠스코 가는 길>

마추픽추는 이맘때가 성수기라서 쿠스코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이름이 예쁘고, 여자들이 주로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마마 시모나. 마마 시모나 산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소는 나쁘지 않았다. 서둘러 짐을 풀고 볼리비아 영사관을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 찾기 어렵다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라 나 역시 엄청 헤맸다. 현지인도 모르는 길목에 있을 게 뭐람. 그 근처를 한 시간 이상 헤맨 끝에 겨우 찾았으나 으아악, 업무시간 종료! 할 수 없지. 마추픽추 다녀온 다음에 다시 가야 한다. (볼리비아 영사관 찾아가는 방법은 여기 클릭)

저녁에는 드디어 L님을 만나 저녁을 얻어 먹고, 잠을 청했다. 내일은 마추픽추 턱 밑까지 이동한다.

아침에 일어나 미니 버스(콜렉티보)를 타고 기차역이 있는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 도착했다. 이 기차가 마추픽추 턱 밑에 있는 작은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에 데려다 줄 것이다. 그런데 기차는, 기차는... 그 옛날 경춘선이 떠오를 정도로 시끄러웠다. 놀러 간다고 들뜬 마음에 관광열차, 거기에 머릿수가 합쳐치면 가공할 만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아아 이건 좋지 않은 징조야, 절레절레.

가끔 나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나는 왜, 성수기라고 쿠스코 숙소는 미리 예약해 놓고 정작 이틀이나 잘 예정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숙소는 알아볼 생각도 안 했던 걸까? 몇 군데 게스트하우스에 들렀지만 남아 있는 도미토리가 없다. 겨우 남아있는 70솔짜리 싱글룸도 하루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러다간 경찰서 가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 사정해야 할 판이다. 대체 같이 기차에서 내린 그 많은 여행객들은 다 어디서 짐을 푼 걸까. (사실 이건 새로운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궁금하다;) 다 포기하고 경찰서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골목에 있는 호스텔 간판이 보인다. 론리에도 나와 있는 호스텔 존(John). 1박에 60인가 70솔을 불렀는데 이틀 잘 거라고 하니까 100솔로 퉁쳐 주었다. 하루에 이만 원 돈이니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고, 이곳이 물가가 비싼 곳이라고는 해도 한국 모텔값에 비하면 싼 편인지라 그냥 감사히 들어가기로 했다. 쿠스코의 30솔 도미토리 따위는 잊어라! 며칠 (그래봤자 이틀) 도미토리에서 고생했으니 좀 쉬라는 계시로 이해하기로 했다. 시장에서 이것 저것 사다가 방에서 와구 와구 먹고 마실 테닷.

방 잡기 좀 전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오후가 되니 제법 온다. 페루에서 처음 맞는 비다. 그나저나 이 상태라면 내일 와이나픽추는 못 올라가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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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0 14:50 2014/01/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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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왜’냐고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왜냐는 물음이 용납되지 않아, 저는 여성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여성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어느 순간부터 저는 말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앎과 삶의 불일치를 점점 더 크게 느끼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루하게 살고 있으면서 ‘감히’ 여성주의자입네 해도 되는 걸까,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문을 틔웠던 여성주의로 인해 되레 말을 잃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제 입을 반쯤 틔운 건 하나의 글이었습니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여가부와 일베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라는 글이었죠. (이후 '공통점'을 추가해 새 글까지 썼네요. 법원판결도 여성가족부 탓이군요. 보시다시피 사법, 입법, 행정부를 쥐락펴락 하는 여성가족부입니다, 녜;)

공통점

1.남녀갈등을 조장한다.
ex)여가부:군가산점,성매매특례법 등
일베:김치X, 보X아치

2.둘다 似而非(사이비)다.
ex)일베는 보수가 아닌데 보수라 주장(실제로는 친일종북)하고
여가부는 페미니즘이 아닌데 페미니즘이라 우긴다.(실제로는 여성우월주의) (원래 페미니즘은 남성의 인권을 떨어뜨리고 여성인권을 올리는게 아니라,여성인권을 남성수준으로 신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미국,북유럽등의 페미니스트가 우리나라에 오면 욕을 할것이다.)

3.일반 사람들에게 욕 먹는다. 특히 여자에게 더 욕 먹는다.

4.둘다 선행보다 악행이 많다.
일베에서도 선행을 어느 정도로는 하지만,악행을 더 많이 저지른다(ex:수간).
역시 여가부에서도 성폭력예방, 호주제(이건 선행)이지만, 악행을 더 많이 저지른다(ex: 셧다운제, 아청법).

차이점

1. 여가부는 정부 산하지만, 일베는 국정원 산하 무료알바다.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편견과 오만에 가득 찬 이 글이 ‘유머’ 게시판에 올라가 있고, 수십 명이 그 논지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고,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그리하여 원래 이 글은 풍자와 비하에 관한 것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풍자에 대해 심오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때 풍자소설을 가장 사랑했던 제 생각에, 권력을 비트는 것은 풍자입니다. 그러나 약자를 비트는 것은 폭력입니다. 전자는, 약자들과 함께 보고 웃을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의 마음에는 안 들겠지만, 어차피 그들은 권력이 있으니까 그깟 풍자 따위, 인생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까 괜찮습니다. 좀 더 대범한 치라면 함께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요. 좀 더 꼰대 같은 이라면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보복할 수도 있겠고요. 그러나 약자를 비트는 건, 잔인한 행위입니다. 장애나 인종, 성정체성 등에 대한 비틀기가 ‘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비하이고 차별, 폭력이죠.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그들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거나 관철할 힘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사람에게는 한 가지 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권력자인 동시에 약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한 가지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저는 한국사회에서 그 오묘한 결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집단이 (특히 보수 쪽의) 여성 정치인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권력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기에 ‘OO년’이라는 막말을 듣거나, 누드 합성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현재 여성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풍자의 대상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될 것입니다. 현재의 여성가족부. 네, 저도 참 별로라고 생각하는데요. 다른 건 다 제쳐두고요, 이미 여성이 우월한데 더 더 우월하게 하려고 여성가족부를 존속시키고 있는 걸까요? 이미 여성이 우월한데 여성들만 그걸 모르고 있어서 놔두고 있는 걸까요?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여성우월 사회라고 할 만한 권력이란 게 대체 여성의 어디에 있는 건지요. 불혹의 나이에 집도 절도 직장도 없어서, 생존을 위해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하라는 충고나 받는 제게 있습니까? 아이는 어린이집과 보모에게 맡기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주말에는 밀린 살림과 아이 보기로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가는 게 눈에 보이는, 제 언니에게 있습니까? 살림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까, 상대적으로 살림할 시간을 보장해 주는, 그렇기에 '최고의 신붓감’ 소리를 듣는 제 교사 사촌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박근혜에게 있습니까? 그것이 박근혜가 ‘여성’이라서 획득한 것입니까? 주위 어떤 사례, 어떤 통계에서도 여성우월 사회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는데 말이죠. (징집이나 군 가산점제 얘기하고 싶은 분들은 이 글 읽고 다시 오세요. 여성징집을 제일 반대하는 부처가 어디인지도 좀 파악하시고.)

이쯤에서 저는 또 궁금해집니다. 다른 행정부처 다 놔두고 왜 하필, ‘여성가족부 괴담’만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는 걸까요? 노동자를 위한 정부기관이라 하는, 그러나 정작 사용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고용노동부가 회식비를 얼마를 썼니 마니에 대한 루머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보건사회복지부와 일베의 공통점 따윈 상상해 본 적도 없으시겠지요. 바로 그 사실이, 여성이 여전한 사회적 약자임을 증명하는 거 아닐까요. (심지어 현재의 여성가족부는 ‘가족청소년부’라는 이름이 더 적합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여성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입니다. 물론 그 지위에 변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소수집단과 비교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요.

저 ‘유머’의 당사자가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결국 저 ‘유머’를 만든 이의 여성에 대한 관점은 ‘일베’ 사용자들의 여성혐오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욕설의 수위에만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보기 어렵군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말은 ‘내가 일베란 말이냐! 민영화나 먹어랏!’으로 수렴될 테죠.

...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굳었던 입이 쉽게 열릴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다어제, 소위 ‘김치녀 대자보’를 접했습니다. 사실 그리 ‘세련된’ 혹은 ‘친절한’ 글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유의 글이 먹히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라는 메시지를 구구절절 집어넣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나 세련되지 않았기에 더 진정성 있어 보이는 그 대자보를 보고, 미안했습니다. 20년 전 우리는 ‘여성의 현실이 이래. 우리는 평등한 사회를 원해’라고만 했으면 됐는데, 한바탕 페미니즘의 유행이 쓸고 간 이 사회의 여성들은 이제 여성차별에 더해 여성혐오와도 싸워야 하니까요. 선배 여성(주의자)으로서 이런 사회를 물려주어, 정말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제가 고작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개념녀도, 김치녀도, 그 어떤 기준에도 맞추려 하지 말고, 당신의 삶을 사세요”인 것도 미안합니다. 좀 더 그럴싸하고 멋진 말이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런데 오늘, “대자보는 이런거 쓰라고 있는게 아니”라며, 또 다른 ‘김치녀 대자보’를 지칭하는 글을 접했습니다. 역시 '유머' 게시판에 있는 해당 글에는 이 문구에 빨간 네모가 쳐져 있더군요. (어이쿠, 그새 '민영화' 많이 먹고 사라졌네요.)

김치녀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건 이 각박한 세상입니다
평범한 여성이 이 사회에서 안녕하려면 김치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많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성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하기에 성형을 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런 남자를 만나려면 자신의 생활 수준보다 높은 소비를 해야 하기에 명품 백을 들고 스타벅스에 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 둘씩 김치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군요. 대자보는 그런 거 쓰라고 있는 게 아니군요.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대자보는 어떤 데 쓰라고 있는 것인가요? 알려 주세요. 아, 그런데 그 전에 누가 당신에게, 저 여성의 입을 막을 권리, 가르칠 권리를 주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사실 개념녀가 될 수도, 김치녀가 될 수도 없는 젊은 여성들의 고민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을 지나온 저는 눈물이 나더군요. 저희 세대 역시 주류에서 배척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떤 주장 앞에는 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을 붙여야 했으니까요. 더 더 오래 전부터, 여성은 성녀이자 마녀여야 했으니까요. 이름만 다를 뿐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와 혐오는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구나 싶어 몹시 서글펐습니다.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이 되지 않는 것'뿐인데 그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얘기죠. 자기부정의 끝은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물론 선배 여성으로서 안타까운 점은 분명 있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려는 것도 나쁘지만, 모든 원인을 사회에만 전가하는 것도 건강한 사고방식은 아니니까요. 평범한 여성이 되지 않기를 선택하고, 조금 덜 안녕하기를 선택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릴 겁니다. 너무 두려워 마세요. “평범한 여성”으로, “이 사회에서 안녕”하길 택하지 않고서야 비로소 행복해진, 제 얘기입니다.

다시 돌아와, 누가 글쓴이에게 저 여성을 비웃을 권리, 가르칠 권리를 주었을까요? 저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아마 저 여성도 그럴 텐데. 네네, ‘무지몽매한’ 여성을 가르치는 건 예로부터 천부남권(天賦男權)이었죠. 여성은 늘 남성의 소유물이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 존재이고,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어야 하는 열등한 존재니까요. 어디 암탉 따위가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준엄히 꾸짖어’ 바른 길로 인도해야겠죠.

... 설득에 지치고 게으른 저는 그저,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글쓴이님, 그리고 오늘도 다른 여성을 가르치느라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실 남성 여러분, 그런 사명감 따위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무거운 짐일랑 내려놓으시고, 공감을 할 수 없다면 그저 존중해 주세요. 죽을 수도, 미칠 수도 없는 그들의 고민을 존중마저 하기 어렵다면 그저, 무시하고 당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왜 이것을 하지 않아?’라고 남을 다그치지 마시고, 가르치려 하지도 마시고, 당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당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잘 살 테니까요. 그렇게 놔둬서야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냐고요? 그런 우국충정은 다른 ‘거대한’ 주제에 쏟으셔도, 사회는 충분히 잘 돌아갑니다. 걱정 마세요.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두 개나 가져와서 썼으니 응당 그 커뮤니티에 올리는 것이 좋았겠으나, 커뮤니티 활동은 당최 적성에 안 맞는지라 제 공간에 올린 것이니 너무 불쾌해 하진 마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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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7 14:57 2014/01/1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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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일어나서 체크아웃. 늦게 잠든 젊은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나는 얼른 나스카라인을 해치우고(?) 쿠스코로 이동해야 한다.

1층 사무실에 갔더니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아저씨 직원이 앉아 있다. 저 간다고 했더니 내 숙박 카드를 보며 어쩌구 저쩌구. 숙박비 냈다는 소리인 것 같아 어제 현금으로 냈다고 하는데도 계속 중얼중얼 하며 8시에 직원이 오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 한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라고? 왜? 여기 무슨 호텔임? 나갈 때 물건 검사하고 그런 거임? 아니면 내가 돈을 안 냈다고 되어 있는 거? 어쨌든 나는 8시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바쁘다고! 10여분 동안 서로 한 얘기만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고, 상대방도 적잖은 흥분에 빠졌을 무렵, 나는 기적적으로 구글번역을 생각해 냈다. 한국어-영어 번역은 이상할 때가 더 많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인 영어와 스페인어 간의 기계번역은 훨씬 이해할 만할 것이다.

아이패드에 창을 띄우고 영작 시작. 저 어제 돈 냈어요. 알겠단다. 그럼 제가 왜 여덟 시까지 기다려야 하죠? 노! 하더니 가라는 손짓을 한다. 아우 정말...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포옹하고 마침내 호스텔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 궁금해.

나스카까지는 싸디 싼 소유즈(Soyuz) 버스를 탔다. 이쪽 동네만 운행하는 버스회사로, 호스텔도 겸업하고 있다. 두세 시간을 가는데 5,000원 정도니 엄청 싼 표다. 대신 서비스도 허술해서 고속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 같다. 짐 표도 제대로 관리 안 해줘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도 이동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감수할 만하다.

나스카라인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 거기 라인 같은 게 있는지 모르고 뚫어버린 아메리카 대륙 관통 고속도로 가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두세 개의 라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죽 둘러보는 것. 당연히 경비행기 쪽이 좀 더 인기 있고 비싸다. 이왕 보는 거 경비행기를 타기로 진작 마음먹었는데, 나스카라인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경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스카 터미널에 내려 쿠스코 가는 표를 먼저 끊으려는데 헉, 두세 군데 들렀음에도 오늘밤 표가 없단다. 일단 표를 확보해 놔야 뭘 해도 마음이 놓이기에 다른 버스 회사로 이동하려는 찰나, 삐끼에게 붙잡혔다. 이카에서부터 예약하고 온 호주 언니 둘을 픽업하러 온 삐끼였다. 버스 표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이 언니들도 구경하고 쿠스코로 갈 거라고, 표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막 꼬드긴다. 호주 언니들도 뒤에서 끄덕끄덕 하고. 가격도 90달러던가? 아무튼 싸게 부르기에 에라 모르겠다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인간 완전 사기꾼. 일단 호주 언니 둘과 나를 떼어놓고 상담할 때부터 이상했다. 소곤소곤하는 대화 사이로 내용이 살짝씩 들리는데, 니네가 예약한 건 90불짜리 상품이지만 사실 요 상품이 더 좋은 건데, 이건 비싸지만 쟤(나를 일컬음)를 데려왔으니까 좀 깎아줄게 어쩌구 저쩌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삐끼와 독대. “자 봐봐, 니가 가겠다고 한 비행기는 무려 20인승이야. 그게 90달러지. (친절하게 사진까지 보여준다) 이거 잘못 타면 가운데 끼여서 나스카라인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못 봐. 대신에 이거(옆 사진) 봐봐. 6인승 경비행기인데 훨씬 좋아.” “그래서 그건 얼마인데?” “145달러.” (웃기고 있어 정말) “그럼 난 그냥 90달러짜리로 할게.” (삐끼 당황) “아니 아니, 진짜 안 보인다니까.” “할 수 없지. 그리고 내 친구들한테 들은 가격은 이게 아닌걸.” “좋아, 그럼 특별히 너만 깎아주지.” 하면서 흥정 시작. 145가 120인지 130인지 115인지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무조건 90을 부르며 앉아 있었다. 마지막엔 “야! 나는 그냥 얻어 걸린 거잖앗!” 하고 옜다 봐줬다 하는 심정으로 계산기에 100을 찍었더니 결국 항복.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 언니야들한테 받은 가격도 100.) 싸게는 아니어도 그냥 저냥한 가격이니 만족하려 했으나 수가 너무 빤히 보인 데다, 그렇게 사기 친 돈으로 샀을 것이 분명한 최신 투싼(응, 현대의 그 투싼)을 타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그래도 그 사기꾼, 오후에 온 유럽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기를 쳤는데, 아무 의심 없이 145달러를 지불한 독일 아저씨한테 호주 언니야들이 “우리는 100달러 냈는데?” 하고 천진하게 얘기하는 통에 사기꾼 초난감해지고, 독일 사람은 따지고, 사기꾼은 호주 언니들한테 그 얘길 왜 하냐고 성질 내고... 하는 통에 기분이 아주 약간 좋아졌다. 어쨌거나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호스텔과 겸업하는 곳이었는데 이름도 론리에 나오는 호스텔과 헷갈리게 지어놨던... 아 까먹었다. 내 한국 가면 반드시 경종을 울리리라! 했건만;

나스카는 라인보다 비행기 타서 본 풍경이 훨씬 좋았다. 굉장히 독특한 지질이라 그렇게 오랫동안 라인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정작 라인은 너무 높은 데서 봐서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뭔가 그냥 장난감이나 낙서 같았달까. 그 스케일 감상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망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건 자연 다큐멘터리이고; 내게 이날의 투어는 그저 ‘경비행기 체험’이었다는.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돌아온 호스텔에는 사기꾼이 있었고, 볼일(=돈 받기)이 끝났으니 터미널에 다시 데려다 줄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이었던 다섯 명 중 네 명은 함께 비행기를 타면서 친해졌는지 자기들끼리 아르마스 광장에 밥 먹으러 갔고, 혼자 다른 비행기에 탄 데다 사교성은 요만큼도 없는 나만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막막하다. 저 사기꾼, 아침만 해도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일단 짐을 두고 터미널까지 걸어가 겨우 겨우 밤 11시 59분에 출발하는 최고급 버스 표 한 장, 마지막 남은 딱 한 장을 구했다. 우리 돈으로 8만 원 돈 하는 표를 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으아아악, 아주 돈을 뿌리려고 작정한 여행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왜, 왜! 어제 와카치나에서 표를 안 샀던 거냐!

그 사기꾼의 집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짐을 챙겨 터미널로 돌아와 이제는 익숙해진 버스 기다리기를 시작했다. 까짓, 6시간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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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6 19:56 2014/01/1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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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페루
* 지역: 와카치나(Huacachina)
* 숙소이름: Banana's Adventure Lodge
* 위치: 이카에서 택시 타고 '바나나스 어드벤처' 가자고 하면 데려다 줌. 어딘지 몰라도 마을 어귀에서 기사가 동네 주민에게 물어봐서 데려다 주니 상관 없었음. 마을이 작아 오아시스 한 바퀴 돌다 보면 그 주위에 웬만한 숙소는 다 있음
* 방 종류: 6인 도미
* 가격: 75솔. 1일 숙박+버기투어+티셔츠 가격. 첫날 숙박은 이렇게 세트로만 판매함. 10솔에 별매하는 티셔츠를 안 받고 65솔로 깎아주면 안 되냐고 사정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힘. 그러나 다음 날 체크아웃할 때 다른 게스트들의 카드를 봤더니 나보다 적게 지불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봐서 여럿이 와서 흥정하면 좀 깎아주는 것도 같음. 공식적으로는 미리 예약하고 오면 10% 할인해 준다 함.
* 아침포함 여부: 불포함
* 부엌사용: 아마도 X. 부엌시설처럼 보이는 걸 찾을 수 없었음. 이 지역 모두 비슷할 텐데, 이 지역 게스트하우스는 거의 다 퍼브를 겸하고 있어서 사 먹어야 할 것임.
* 와이파이: 가능 (2층 방에서도 가능했음)
* 장점
  - 깨끗하고 밝음
  - 화장실이 방에 딸려 있음
  - 따뜻한 물 잘 나옴
* 단점
  - 생각보다 비싸고, 세트판매 방식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음
  - 게스트에 비해 콘센트가 적어서 충전 눈치보기가 치열함
* 기타
  - 동네 돌아다니며 보니 이 동네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음. 고로 다시 찾으라면 무조건 더 싼 데로 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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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14 2014/01/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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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리마 공항. 늦은 시각인데도 공항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돈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몇 달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없는 가게가 없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잠! 좌석이 개방되어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으려니, 종업원이 근처 테이블에 다가가 메뉴판을 내민다. 주문하지 않는 자여 앉지도 말라. 다행히(?) 나는 눈에 띄지 않았던지 내게 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 짐을 이고 지고 잘 만한 공간이 있는지 탐사에 나섰다.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미관을 크게 해치면 안 되므로 노숙공간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마침 맞춤한 통로 발견. 이미 몇몇 이들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다. 나도 졸지에 공항 거지가 되어 통로에서 쪽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조심 조심 방어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배낭에 살짝 기대고, 그 다음엔 옆으로 누웠다가, 한두 시간 만에 드디어 집에서처럼 누워 자기 시작. 이제 페루에 막 도착한 것 같은 삼삼오오 무리들은 잘 생각은 않고 맥주며 카드를 가져와 논다. 어휴, 체력도 좋다.

자다 깨다, 추위에 몸부림 치다 마침내 일어난 때는 4시쯤. 이 시각에 사용 가능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렷다. iPeru에 다시 한 번 들렀으나 역시나 별 신통한 얘길 듣진 못했다. (제발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좀!) 그래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낫겠지. 밖으로 나가 막 손님을 내려주고 떠나려는 일반 택시를 하나 잡았다. Cruz del Sur 터미널을 외치니 50솔을 부른다. 아우, 트루히요에서 공항 갈 때도 그러더니 이 동네는 뭐 물어보기만 하면 다 50이래. 그 가격 아닌 거 다 알거든요. 못 알아들은 척 손을 폈다 구부리면서 손으로 표시해 달라는 시늉을 했더니 그걸 10으로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바로 25솔에 데려다 주겠단다. 지난 번 탔던 그린택시의 55솔에 비하면 감지덕지라 더 따지지 않고 고고.

덕분에 터미널에 무사 도착해서 직원이 출근하길 기다렸다. 다행히 여섯 시 반 이카(Ica)행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나의 리마는 여기까지. 하지만 수도와 잘 맞았던 적이 없는지라 그닥 아쉽지는 않다. 수도와 나의 악연(?)은 아마도 이스탄불(엄밀히 얘기하며 이스탄불은 수도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도나 마찬가지니까; 너무 갖다 붙였나?)이 그 시작인 것 같은데, 도착한 첫날 삐끼와 걷기에 너무 치인 나머지 하루 이틀 머물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날 밤에 다음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구경은 한 달 뒤 다시 돌아왔을 때 하기로. 그 때쯤이면 터키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여행 막바지, 마침 50년 만에 내린 폭설로 고속버스 휴게소에 만 하루 넘게 갇히는 사고 발생. 터키 정부에서 주는 구호물자도 받아 먹고, 내내 앉아 있던 통에 다시 없을 굵기의 종아리도 가져 보고, 9일 동안 머리 안 감기 기록도 세워 보고,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결국 귀국 전날 밤 늦게야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바람에 구경이고 뭐고 이스탄불은 빠빠이.

흠, 그러고 보니 리마라는 지명을 처음 들은 건 어릴 적 읽은 금성사 소년소녀세계명작에서였다. 티티카카 호수도 나오고, 라마라는 동물도 나오고, 리마라는 이름도 모두 거기서 처음 들었다. 젊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고, 말이 안 통하는 ‘신비로운’ 원주민 여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그린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고 성질 낼 게 분명한 작품이지만, 어린 마음에 남은 건 그 신비로운 분위기와 이국적인 이름들이었다. 마침내 도착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때가 더 나았다. 그러니 어쩌면 더 ‘자세히’ 탐험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리마 안녕.

무사히 차를 타고 언제나 나를 굶주림에서 구원해 주는 버스식량을 흡입했다. 여행정보에 따르면 7시간 정도 걸린다던데, 불과 5시간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모르고 못 내릴 뻔; 사람들이 작은 도시 이카에 가는 이유는 대개 그 인근에 있는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오아시스 마을 때문이다. 가는 방법이 택시뿐이라 터미널에 ‘공식’ 택시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그 셈에 넘어가지 않고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와카치나는 물가가 비싸다기에 슈퍼에서 물이라도 사 가고 싶었다. 웬 블로그에는 근처에 마트가 있다고 하던데, 나는 결국 못 찾았다. 길을 걷는 주민들에게 ‘슈퍼마켓?’이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무시하고 지나간다. 내가 방문한 곳을 통틀어 최고로 불친절하고 불쾌한 곳이 이카였던 듯. 서비스 노동자가 보여줌직한 친절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나, 말 거는데 대꾸도 안 하는 건 너무하잖아. 심지어 길거리에서 나를 향해 중국 사람을 흉내내며 조롱하는 아저씨들까지 만났다. 결국 슈퍼 찾기는 포기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서 점심 겸 토스트 한쪽을 먹었다. 론리에서는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지만 역시나 가격에 비해;;; 싸다는 건 어디까지나 론리 편집진 그들 기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췌. 후다닥 해치우고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흥정한 뒤 와카치나로 갔다. 미리 생각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짐을 풀고 오아시스 구경 겸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남쪽으로 오니 확실히 관광객, 특히 유럽 미국 애들이 많이 보인다.

오후엔 버기투어. 와카치나에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은 버기투어와 숙박을 세트로 판매하는데, 개조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누비는 건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차가 롤러코스터인 척도 하고, 샌딩보드도 스릴 있고. 그러나 역시 내 성정에는 투어보다는 사막이 더 매력적이다. 신비한 물결무늬와 사람 잡는 발빠짐.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종일토록 사막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모래만은. 흑. 결국 포토시(볼리비아의 광산도시)에서 쓰려고 마련해 온 마스크를 여기서 개시했다. 함께 차를 탄 일행(유럽과 미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무리들)은 마스크 쓴 나를 보고 히히덕거렸지만. 얘들아, 내 기관지는 소중하단다.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내가 묵은 방에는 프랑스 남자애 셋과 이탈리아 남자애 하나, 영국 여자애 하나가 더 있었다. 역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백인들이라 금세 친해져 어울려 술 마시고 놀고, 싸운다. (이 동네 호스텔은 주로 레스토-바를 겸업하고 있어 게스트들은 밤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며 노닥인다.) 다행히 서로 낄 생각도, 초대할 생각도 없다. 귀마개랑 수면안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얘들아, 굿나잇. 그런데 조금만 조용히 해 주면 고맙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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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01 2014/01/1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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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차코 해안에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로 갈대배(totora)이다. 이 지역 사람들(아마도, 남자들)은 아주 아주 옛날부터 갈대를 엮어 1인용 고기잡이 배를 만든다. 론리에 따르면 2,000년 전 모체(Moche) 도자기에도 이 배가 그려져 있다고. 하지만 이 배도 소모품이라 수명은 고작 몇 달이란다.

이렇게 생겼다. 보기가 좋아 페루 관광엽서에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조형물에서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완차코 해안의 갈대배

좀 더 가까이서 본 갈대배

약 2/3 지점에 홈이 하나 있는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니고, 뗏목이나 말처럼 이렇게, 배 위에 탄다. 홈은 아마도 잡은 고기를 놓는 곳이렸다. 석양이 질 무렵 떼를 지어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무리를 운 좋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 삶의 고단함과는 상관없이 정말 힘차고 멋있었다.

갈대배 타는 남자 조각

완차코에 온 사람들은 모두 열 지어 선 배 사진을 찍거나, 사진 찍으라고 세워둔 배를 배경으로 찍거나, 배를 타 보는 경험을 하며 논다. 그들 대신에 내가 한 것은 관찰. 배를 새로 만드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선(?!)은 하나 발견했다. 넌, 행복했니? 가만히 말을 걸어본다. 어쨌든 참 환경친화적인 물건이로고. 우리 선조들의 모든 도구가 그랬겠지만.

다 쓰고 버려진 갈대배

그러나 머잖아 쥔장은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망가진 배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으니...

꽁지에 스티로폼이 들어있는 갈대배

보이는가. 저 꽁무니에 들어간 흰 스티로폼 덩어리가. 중간의 안장에도 들어있다...!

안장에도 들어있는 스티로폼

저 배뿐 아니라 모든 배에 다 들어있다. 아마도 저 흰 덩어리가 마을에 소개된 어느 날, 누군가 선도적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배를 '개량'했을 것이다. 곧이어 모두들 따라했을 테고. 그건 옛날 방식이 아니니 사기 치지 말라고 할 생각도, 눈가리고 아웅 따위 하지 말라고 할 마음도 당연히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완차코의 갈대배’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저 스티로폼이 되어 버렸으니, 좀 억울(?)한 마음이 든다. 왜 나는 보라는 것만 보지 않고 다른 것도 보려고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버렸단 말인가. 그런데 이 얘길 왜 이렇게 올리기 귀찮은 사진까지 방출하면서 구구절절 쓰냐고? 뻔하지. 혼자 당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도 완차코, 하면 갈대배가 아니라 스티로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레드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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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3:38 2014/01/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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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을 "그리고는 기절", 이라고 끝맺었지만 사실 바로 기절하려던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몰라 근처 식당의 메뉴판을 찍어 놓고 방에 돌아와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 메뉴의 정체를 알아낸 뒤 맛난 밥을 먹고 돌아와 잔다, 가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몸으로는 도저히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한 시간만 자야지 하다 결국 그날도 저녁을 굶고 새벽까지 내리 자버렸다. 자고 일어났어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빈속에 진통제를 먹고 뒤척였다. 어쨌든 오늘은 리마로 돌아가는 날이다.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밤차를 타야지.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카페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도착한 날부터 눈에 띄었던 아담한 집이라 한 번 가보고 싶었다. 7천 원이면 주스와 커피 빵 스크램블까지 먹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바보 같이 계속 굶었을까. (비록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지만;)

완차코에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뒤적여 보니 이 마을에도 성당이 있다 한다. 16세기에 지어진, 페루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성당이라나. 카페를 나서며 주인에게 성당 위치를 물어보고 쉬엄쉬엄 걸었다. 아 그런데... 무슨 성당이 언덕 꼭대기에 있냐고! 이 무슨 절도 아닌데 108 계단이 있냐고! 햇빛은 이미 쨍쨍하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계단을 혼자 꾸역꾸역 걸어 올라갔다. 이 성당은 열두 시에 문을 닫고, 이미 열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나는 오늘 떠나니까, 헥헥. 그리고 마침내 다 올라가 성당 앞마당(?)에서 본 마을과 바다의 풍광은 이 모든 투덜거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가보길 잘했다.

오늘은 무조건 쉬고 최소한으로 걷기로 했으므로 해안가로 내려와 둑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구경,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서핑하는 사람 놀러 온 사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 갈대배를 손질하는 사람...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이 바다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 가슴이 찡해졌다가, 바다뿐 아니라 이 순간 자체가 다시 오는 일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역시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것도. 아마도 나는 오늘 이 몇 시간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마추픽추보다 더.

이제 슬슬 떠나볼까. 트루히요로 나가 버스표를 끊고 좀 둘러보다 차를 타면 맞춤하겠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헉, 숨을 토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선글라스 썼던 부분 빼고는 새까맣게 타버린 게 아닌가. 차라리 선글라스 같은 거 쓰지 말 걸, 선명한 경계 때문에 밤에도 선글라스 써야 할 판이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 내가 탔다는 걸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얼굴이 가렵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계는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한 달 이상 지나서야 사라졌다는 슬픈 얘기.)

그러나 잠시 뒤 얼굴 따위 문제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트루히요 시내로 나와 보니 리마행 버스는 전부 매진이다. 비싼 회사부터 싼 회사까지 대여섯 군데 되는 그 동네 버스터미널을 모두 돌았으나 모두 매진 매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보니 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이 사람들도 주말에는 놀러들 다니나 보다. 오늘 밤차를 타고 내일 새벽에 리마에 도착해서 이카(Ica)로 가서 하루 묵고, 그 다음 날 쿠스코로 떠나야 예정했던 날짜에 마추픽추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이 상태라면 내일 예정한 오아시스 버기카 투어에 나스카라인은 포기해야 할 판이다. 아악, 나는 왜 이런 일 따위 예상하지 못하고 쿠스코 숙소와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와 입장권을 미리 사버렸던가. 그놈의 바다가 뭐라고 완차코에서 하루를 더 묵어버렸던가. 하루를 더 잤으면 서두르기나 하던가. 얼굴만 시커매지고 말 걸 뭐하러 헤벌레 하고 유유자적하고 있었는지. 나한테 짜증이 뭉게뭉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나. 정신을 차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몇 가지 옵션을 떠올려 봤다. 트루히요에서 하루 잔다, 이카를 포기한다, 쿠스코에 하루 늦게 도착한다 등등.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오늘 리마로 가야 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근처 여행사에 들어가 흥정이고 뭐고 없이 달라는 돈 다 주면서 리마행 밤비행기표를 사버렸다. (그마저 표가 있네 없네 난리가 났었다는; 그래도 20만 원으로 막았으면 선방했다.) 에효, 아침만 하더라도 오늘은 별 일 없이 보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박사건이 줄줄이 터져주실 줄이야. 하긴, 이런 사건 하나 없으면 자유여행이 아니지.

그 상황이 정리된 건 일곱 시쯤. 해도 졌겠다, 몸도 힘들겠다, 기분도 별로겠다, 시내에 더 있을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와 자정이나 되어야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보딩 시간까지 세 시간도 더 남았지만 리마에서는 여섯 시간도 기다렸는데 뭐. 일지나 써야지. 새벽 1시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쩔 것이냐가 또 고민이겠지만 공항에서 시간 좀 때우다 터미널 가면 된다. 갔는데 리마에서 이카까지 가는 버스표 없으면? 흥, 또 비행기 타 버릴 테다! 그 때는 그 때대로 수가 있을 거다.

그러는 통에 저녁은 또 굶었고 (이젠 새롭지도 않다;) 열두 시에 비행기는 출발했고, 아홉 시간 걸려 왔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내린 곳은 첫 날 도착했던 바로 그 곳, 리마 공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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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23:20 2014/01/0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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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이날의 일지는 고작 다섯 줄이다.

10:30 예정인 투어 전에 성당 보려고 나감. 한목소리로 피사로를 알려 준 승객들, 광장까지 바래다 준 소이 엄마 무한감사.

아르마스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성당은 비신자에게는 오전에만 개방된다. 그래서 투어 전에 잠깐 둘러 보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 트루히요 행 봉고버스를 탔다. 아침으로는 호스텔 식당에서 탄 식빵 두 쪽과 버섯 오믈렛. 아 배고파. 어쨌거나 어제 시행착오를 겪은 덕에 아르마스 광장까지 가는 길은 자신이 붙었다. 그래도 안내원에게 광장 간다고 얘기는 해 둔 터. 마침내 광장 언저리에 이르자 승객들이 너도 나도 "여기야 여기, 내려!" 한다. 내가 탔던 버스 승객 모두 내 행선지를 알고 있고, 그 승객 모두가 내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려 주는 그런 경험은 늘 유쾌하다. 겪을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마침 같이 내린 아기 엄마도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가 보다. 버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인데, 광장은 이쪽 길이라며 알려준다. “저 이 길 알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란 말을 스페인어로 못 해서 함께 걸으며 서로 안 통하는 말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듣자마자 잊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행길에 잠깐 스친 인연, 다시 볼 일 없는 사람 이름은 기억해서 뭐 해? 하는 생각을 내가 미처 하기도 전에 뇌가 알아서 필터링 해 버린 거다. 듣고, 잊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 해서 1초나 될까. 내 마음은 언제 이렇게 건조해져 버린 걸까. 그래도 신속하게 반성했으니 조금은 덜 여문 걸까. 어쨌든 그 '반성' 덕에 아기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된 거다. 돌도 안 된 귀여운 아기의 이름은 ‘소이’였다. 까꿍 몇 번에 까르르 웃는다. (참 신기한 게, 한국 아가들은 나를 보면 일단 무서워하고 경계하는데, 여기 아가들은 일단 날 보면 웃어준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해서 소이 엄마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어디로 가세요? 그제야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저 뒤쪽을 가리킨다. 생판 모르는, 인생에 다시 볼 일 없을, 길이 서툰 여행자를 위해 추운 날 아기를 안고 한참을 동행해 준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왈칵. 정말 미안해요, 그런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서. 의미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네요.


리마성당처럼 화려한 마리아와 예수. 리마가 더 낫네.

성당에 들어갔다. 앞으로도 여행길에 무수히 보게 될 성당들. 규모도 크고 장식도 화려하지만 내게는 리마의 ‘은혜교회’가 더 끌린다. 대충 둘러보고, 오늘도 마음의 평안을 빌고,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서 조나단 또 마주침. 아 불편

생각보다 성당구경이 짧아져서 광장을 떠돌았다. 어제 조나단에게 설명 들었던 광장 조각상을 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헉, 조나단; 안녕;;;

어제 안녕 빠빠이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니 뻘쭘하다. 내가 수다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낯모르는 사람의 얘길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제는 설명 들으면서 막 이해하는 척 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와서 다시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데 조나단은 내가 엄청 반가운가 보다. 하긴 그런 성정이니 안내원을 하겠지. 하지만 미안, 당신은 참 착하고 친절하지만 난 여기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땡땡아, 언제 떠나니? 하길래 오늘, 찬찬투어 마치고,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후다닥 도망. 안녕 안녕.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다니거나 유적지를 보는 것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최고라고들 한다.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눴던 대화들, 마음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겐 그런 행위들이 별 의미 없고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뭐, 다시 볼 거야? 아니잖아. 그들을 통해 뭔가 참신한 얘기나 생각을 듣고 싶어? 사람들 사는 거,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더 어릴 때는 재미났던 일들이, 이젠 허허롭기만 한 걸 보니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인가. 흔히 여행은 젊을 때 가라는 얘기들을 한다. 난 이게 체력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인 걸 알고는 있지만, 어쨌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서로 서로 넘치는 열정을 나누는 것, 거기서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나를 보여주고 너를 읽는 것, 이건 몸이든 마음이든 젊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할머니 마음을 가진 내겐 이제 그 모든 것들이 귀찮고 버겁다. 아우, 비생산적이야. (아 그러고 보니 ‘한량’ 다음의 내 장래희망이 ‘멋진 할머니’인데 ‘멋진’은 몰라도 ‘할머니’는 벌써 이룬 건가.) 아아, 그래서 여행은 ‘젊을 때’ 가야 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달의신전 재밌지만 피곤.

데이투어 차를 타고 황야를 달리다 보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산이 하나 나온다. 옛날 사람들도 틀림없이 나처럼 느꼈을 거다. 그러니 그 주위에 신전을 두 개나 지었겠지.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느낌은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유적 하나하나 설명을 마친 후 질문 없냐고 묻는 가이드에게 모두들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날 내가 한 질문은 딱 한 개. “저 산 이름은 뭔가요?”였다. Cerro Blanco, 흰 산, 이라고 했다.

달의신전은 어느 정도 발굴되어 둘러볼 수 있었지만 태양의신전은 돈 없어서 아직까지 못 열어보고 있단다. 달의신전도 독일인가 프랑스의 어느 재단에서 발굴비를 대줘서 그나마 관광객을 받을 모양이나마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전 흙벽의 문양은 한국 도깨비 무늬랑 참 비슷하게 생겼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지구 중앙에 반대편과 통하는 길다란 터널이 한 개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한쪽에서 그 터널을 타고 와 다른 편에 정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 먹고 찬찬 투어. 아 진짜 나는 배낭족 아니고 휴양족이었던 것. 그래도 북쪽에 오길 잘한 듯.

데이투어는 원래부터 ‘데이’가 아니라 사실 오전 투어 + 오후 투어이다. 오전에는 모체(Moche) 유적지인 달의신전과 박물관 구경, 오후가 찬찬(Chan Chan) 투어다. 따라서 오전만 하거나 오후만 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니 팀과 함께 점심을 먹어도 되고 따로 먹어도 된다. 버스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드가 데려다 주는 식당에 가겠다고 한 모양이고, 나는 당연히(?) 혼자 해결하겠노라 하고 내렸다. 오전 투어를 함께 했던 멕시코 커플이 함께 내린다. 그들은 오후 투어는 안 한다며, 내게 점심을 같이 먹겠냐 묻는다. 가이드가 데려다 준다던 그 식당은 엄청(물론 배낭여행객 기준이겠지;) 비싼 데라며.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다니는데 이 친구들 좀체 메뉴를 선택하지 못한다. 수십 군데 식당의 메뉴와 가격을 보고 고민만 하다 지나치느라 나도 덩달아 몇 블록이나 걷게 되었다. 이보세요, 당신들은 체력이 되나 본데 저는 오전 투어만으로 이미 삭신이 쑤시거든요. 발목이랑 발바닥이랑 허리가 나갈 것 같아요! 하며 뒤에서 찌릿찌릿 레이저를 쏘아댄 기운이 느껴졌는지, “그런데 너 시간 되겠어? 한 시 반까지 가야 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 버렸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응, 나는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래, 넌 뭘 먹을 테냐?” “글쎄, 샌드위치나 먹을까 봐.” “그래, 샌드위치는 언제나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 거기 광장 가는 길에 싸고 괜찮은 집 있어.” 이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서로 각자의 길로. 그리고 나의 점심은, 슈퍼에서 만들어 파는 중국식 볶음면 한 컵. 반찬은 길바닥으로 내리쬔 햇빛. 이렇게 또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오후 투어는 방대한 찬찬 유적을 둘러보고 완차코의 석양을 보는 데서 끝나는 일정이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방대한’ 유적은, 모두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 아니고, 그냥 흙을 이겨 만든 건물과 벽, 궁전이다. 아니 대체 그 건물들이 몇 백 년 동안 어떻게 보존이 된 거지? 그러니까 그 무모해 보이는 짓을 한 사람들은 그 지역에 비 따위는 결코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그들의 낙관은 틀렸다. 20년 전쯤, 지구 온난화의 따뜻한 손길이 여기에도 뻗쳐 마침내 비를 내려 주었으니, 그때 상당량의 찬찬 유적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뭐,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대의 도래를 예상치 못한 게 선조들 잘못은 아니다.

이 같은 불상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흙담 위에는 참으로 허술해 뵈는 슬레이트 지붕이 쳐져 있다. 여행사진을 본 사람들이 모두 “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물었던 게 바로 그 지붕 사진이었는데,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왜 찍었는지 모를 그 사진에는 찬찬의 과거와 페루의 현재, 지구의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정정. 아무래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게 찜찜해서 찾아보니, '점점' 더 훼손되고 있는 건 맞지만 엘니뇨는 이미 그들이 살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아직도 조금만 걸었다 하면 발목과 허리가 금세 아프다. 사실 오후 투어를 시작할 때쯤 나는 이미 고관절에서 소리를 내며 발을 끌고 있었다.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여기서 또 한 번. 도저히 더는 못 움직이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건 네 시쯤. 그러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차는 완차코에 도착했다. 석양사진 찍고 모이라는 가이드에게 내 숙소는 여기니 나는 이만~ 하고 돌아섰다. 5~10분이면 걸을 거리를 근 한 시간이나 걸려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덕에 완차코의 석양을 만끽. 왜들 그리로 사진 찍으러 모이는지 알겠더라는. 그리고는 다시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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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12:20 2014/01/0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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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에서 완차코"

우힛, 드디어 여행 관련 검색어가 등장. 아 저 이런 거 좋아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정보 막 퍼 주는 거. 다 알려주는 거.

리마에서 완차코 가는 방법. 저는 완차코가 첫 일정이어서 트루히요까지 가는 버스를 한국에서 예매했어요. 리네아(Linea)로 했는데요, 전에 썼다시피 리네아는 페루 북부를 운행하는 버스회사입니다. 페루를 여행하면 Cruz del Sur는 탈 기회가 많은데 리네아는 이때 아니면 타볼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또 트루히요 도착해서 리네아 정류장을 나오면 바로 완차코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말이죠.

버스 등급은 Cruz del Sur랑 비슷합니다. 고급인 거죠. 트루히요로 가는 리네아 버스는 여기서 예약할 수 있습니다. 출발지는 리마, 도착지는 트루히요로 하세요. 완차코 바로 가는 고속버스는 없습니다. 에스파냐어로 되어 있으니 눈치껏; 그리고 한국에서 하려면 망할 놈의 ActiveX 깔고 카드 결제해야 하니 IE로 진행하세요. 좌석지정까지 다 할 수 있으니 잘 모르겠으면 다른 탭에 구글번역 띄워 놓으시고요. 밤 버스 가격은 VIP가 우리 돈으로 33,000원 정도. 당시 환율로 30달러가 안 됐던 것 같네요. 결제까지 마치고 예약표 출력해서 리마 터미널에 가서 보여 드리면 티켓 주실 겁니다. 뭐, 저처럼 미리 준비해야 마음 놓이는 성격이 아니면 그냥 현장 가서 사셔도 되고요.

리마의 리네아 터미널은 공항에서 택시로 음... 20분 정도 걸렸던 거 같군요. 리네아 터미널에서 아르마스 광장까지는 걸어서 2, 30분? 걷는 길에 예술박물관이 있지만 그밖에 특별한 '볼 거리'는 없습니다. 터미널에 나고 들 때 걸어 다녀서 다른 교통편은 모르겠네요. 걷기 싫으시면 택시 타셔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 우리나라 터미널처럼 택시는 언제나 많습니다.

만약 저처럼 아침에 도착해서 밤에 바로 이동하실 예정이면, 리네아 터미널에서 짐도 맡아 줍니다. 저처럼 곤란을 겪지 않으시려면 의사소통은 잘 하셔야겠지만요, 어쨌든 버스 시간까지 무료로 맡아 주어요.

트루히요까지는 아홉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군요.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일곱 시 반인가 그랬거든요. 터미널에서 나오면 바로 앞이 도로예요. 건너세요. 그러면 한국 정류장처럼 벤치도 있는 정류장이 하나 있어요. 그냥 딱 보면, 아 저기가 정류장이구나 하실 겁니다. 거기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껍데기를 걸친 완차코행 버스를 기다렸다 타시면 됩니다. 3, 40분 정도 걸리고 안내원과 기사님에게 완차코 간다고 하면 대충 알아서 내려 주실 거예요. 비용은 1.5솔. 한국 마을버스랑 비슷한 가격이니 엄청 싼 거죠.

뭐, 여기까지 찾아오실 정도면 이 정도는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트루히요보다는 완차코에 숙소를 잡으시는 게 더 좋을 겁니다. 트루히요는 시끄럽고, 가격 대비 방이 좋지 않습니다. 완차코도 어차피 관광으로 먹고 사는 곳이라 아주 저렴하진 않지만 트루히요보다는 싸고, 자동차 경적 대신 파도소리 들리고, 원하시면 파도타기를 배우거나 즐길 수도 있어요. 찾아보면 저렴한 도미토리도 있고, 강습과 세트로 파는 곳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어디가 가장 좋더냐고 누군가 물었는데 잠깐 고민하다 완차코, 라고 답했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습니다. 뉘신지 모르지만, 잘 다녀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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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3:08 2014/01/0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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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편집해 넣기 귀찮음. 나중에 추가하던가 할 예정;)

빅벤을 나오니 아까랑 다르게 생긴 봉고차 버스들이 지나간다. 안내원에게 "쁠라싸 데 아르마스(Plaza de Armas)"를 외치니 타라 한다. 황야를 지나 시내로 접어들고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린다. 시내 초입부터 긴장하며 광장 같은 게 보이는지 살폈으나 아직인 것 같다. 안내원도 아무 말 없고. 그러다 보니 안내원이 돈을 걷는다. (보통은 내릴 때 요금을 내지만 회차지점이 가까워 오거나 손님이 적어 한가할 때는 중간에 걷기도 한다.) 내게도 손을 내미는 안내원에게 "아까 냈잖아요" 했더니 잠깐 생각하다 흠칫 놀란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치며 "피사로!" 한다. 엥? 피사로가 뭔데요? 차 안이 술렁술렁하며 스페인어가 몇 마디 오가더니 누군가 내게 어딜 가냐 묻는다. (나 왜 이런 말 다 이해하는 거임?) 아르마스 광장요. 그게 피사로란다. 알고 보니 아르마스 광장은 피사로(Pizaro)가(街)에 있었다는. 그리고 버스는 광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는. 그래서 광장 같은 건 눈에 안 띄었던 거라는. 안내원은 차를 세우고 나를 내리더니 마침 맞은편에 서 있던 똑같이 생긴 버스를 불러주었다. 얘를 피사로로 데려다 줘. 덕분에 겨우 광장에 도착. (참고로 이 경우 돈을 받을까 안 받을까 궁금했지만, 얄짤 없이 1솔 내라고 해서 냈다.)

아르마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을 구경하고, 광장 끝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부족했던 한 끼를 해결하기로 했다. 들어가 메뉴판을 보다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데 놀랐다. 체감상 페루의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물가는 비슷하다니. 이 사람들도 살기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 그런데 치킨버거 맛이 왜 이래. 치킨에서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한 냄새가;;; '형언'할 수 없어서 진짜 표현을 못 하겠다. 그래도 세비체보다는 나으니 꿋꿋이 먹었다.

특이했던 건 케첩과 마요네즈를 먹는 방식. 카운터에서 1회용 케첩과 마요네즈를 지급하는 한국과 달리 매장 중간에 거대한 케첩과 마요네즈 대가 비치되어 있고, 햄버거와 함께 주는 빈 용기에 원하는 만큼 펌프질을 해 담는 식이었다. 커피전문점에 있는 시럽 비치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가절감과 쓰레기배출 감소라는 측면에서 어떤 방식이 더 나은 걸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내 머리로는 계산 불가라 1초만에 포기;

찬찬 데이투어를 예약하고 광장 주변에 있다는 옛날 집들을 둘러본다. 트루히요 관광지도를 보면 유독 Casa(집, house, '까사블랑까'의 그 '까사') 어쩌고 하는 건물들이 많은데, 그 안에 뭐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옛날에 지은 예쁜 (스페인식) 집 구경이다. 내게는 집 자체보다는, 그 건물들이 아직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어떤 집은 은행이고(그래서 들어가는 절차가 까다롭다), 어떤 집은 소셜클럽 전용건물(그래서 방문가능 시간과 층이 정해져 있다)... 없애버리거나, 아무도 거주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거나 하지 않고 시대와, 사람과 함께 흘러가도록 두는 건물.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Casa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구나.

카사 한 곳을 찾느라 길을 헤매다 관광 안내원 조나단을 만났다. 언뜻 보면 경찰관 같은 제복을 입고(이 동네 사람들 참 제복 좋아하는 듯) 명찰을 목에 걸고(tourist 어쩌구 쓰여 있음) 대로변에 서 있다가 나 같은 어리바리 관광객이 오면 안내해 준다. 공짜다. 처음엔 혹 이상한 사람인가, 안내원을 가장한 삐끼인가 긴장했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인가 보다. 그 보답으로 나중에 시청 방명록에 내 인적사항과 안내원 이름 정도 적어주고 오면 된다. 그에게 시청 청사와 아르마스 광장 안내를 받았는데,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그려. 어쨌든 덕분에 심심치 않은 오후를 보냈다.

원래는 내일 데이투어를 마치고 바로 리마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이 작은 동네가 참 마음에 들어 하루 더 묵을까 어쩔까 계속 고민하다 결국 완차코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지금 다시 선택하래도 리마보다는 완차코에 있을 테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데 옆으로 봉고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앗, 모자 쓴 안내원! 아까 트루히요 나갈 때 탔던 버스다. 나 무사히 아르마스 광장 갔다가 잘 돌아왔어! 하는 마음으로 손을 막 흔들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던 안내원, 잠시 뒤 내가 기억 났는지 함박웃음을 짓는다. 웃는 모습이 예쁜 청년이었구나.

시차 때문인지 저녁 굶고 침대에 엎어진 건 여섯 시 조금 넘어. 덕분에 기상시간은 새벽 두 시.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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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2:40 2014/01/0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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