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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일어나서 체크아웃. 늦게 잠든 젊은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나는 얼른 나스카라인을 해치우고(?) 쿠스코로 이동해야 한다.

1층 사무실에 갔더니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아저씨 직원이 앉아 있다. 저 간다고 했더니 내 숙박 카드를 보며 어쩌구 저쩌구. 숙박비 냈다는 소리인 것 같아 어제 현금으로 냈다고 하는데도 계속 중얼중얼 하며 8시에 직원이 오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 한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라고? 왜? 여기 무슨 호텔임? 나갈 때 물건 검사하고 그런 거임? 아니면 내가 돈을 안 냈다고 되어 있는 거? 어쨌든 나는 8시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바쁘다고! 10여분 동안 서로 한 얘기만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고, 상대방도 적잖은 흥분에 빠졌을 무렵, 나는 기적적으로 구글번역을 생각해 냈다. 한국어-영어 번역은 이상할 때가 더 많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인 영어와 스페인어 간의 기계번역은 훨씬 이해할 만할 것이다.

아이패드에 창을 띄우고 영작 시작. 저 어제 돈 냈어요. 알겠단다. 그럼 제가 왜 여덟 시까지 기다려야 하죠? 노! 하더니 가라는 손짓을 한다. 아우 정말...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포옹하고 마침내 호스텔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 궁금해.

나스카까지는 싸디 싼 소유즈(Soyuz) 버스를 탔다. 이쪽 동네만 운행하는 버스회사로, 호스텔도 겸업하고 있다. 두세 시간을 가는데 5,000원 정도니 엄청 싼 표다. 대신 서비스도 허술해서 고속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 같다. 짐 표도 제대로 관리 안 해줘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도 이동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감수할 만하다.

나스카라인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 거기 라인 같은 게 있는지 모르고 뚫어버린 아메리카 대륙 관통 고속도로 가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두세 개의 라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죽 둘러보는 것. 당연히 경비행기 쪽이 좀 더 인기 있고 비싸다. 이왕 보는 거 경비행기를 타기로 진작 마음먹었는데, 나스카라인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경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스카 터미널에 내려 쿠스코 가는 표를 먼저 끊으려는데 헉, 두세 군데 들렀음에도 오늘밤 표가 없단다. 일단 표를 확보해 놔야 뭘 해도 마음이 놓이기에 다른 버스 회사로 이동하려는 찰나, 삐끼에게 붙잡혔다. 이카에서부터 예약하고 온 호주 언니 둘을 픽업하러 온 삐끼였다. 버스 표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이 언니들도 구경하고 쿠스코로 갈 거라고, 표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막 꼬드긴다. 호주 언니들도 뒤에서 끄덕끄덕 하고. 가격도 90달러던가? 아무튼 싸게 부르기에 에라 모르겠다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인간 완전 사기꾼. 일단 호주 언니 둘과 나를 떼어놓고 상담할 때부터 이상했다. 소곤소곤하는 대화 사이로 내용이 살짝씩 들리는데, 니네가 예약한 건 90불짜리 상품이지만 사실 요 상품이 더 좋은 건데, 이건 비싸지만 쟤(나를 일컬음)를 데려왔으니까 좀 깎아줄게 어쩌구 저쩌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삐끼와 독대. “자 봐봐, 니가 가겠다고 한 비행기는 무려 20인승이야. 그게 90달러지. (친절하게 사진까지 보여준다) 이거 잘못 타면 가운데 끼여서 나스카라인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못 봐. 대신에 이거(옆 사진) 봐봐. 6인승 경비행기인데 훨씬 좋아.” “그래서 그건 얼마인데?” “145달러.” (웃기고 있어 정말) “그럼 난 그냥 90달러짜리로 할게.” (삐끼 당황) “아니 아니, 진짜 안 보인다니까.” “할 수 없지. 그리고 내 친구들한테 들은 가격은 이게 아닌걸.” “좋아, 그럼 특별히 너만 깎아주지.” 하면서 흥정 시작. 145가 120인지 130인지 115인지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무조건 90을 부르며 앉아 있었다. 마지막엔 “야! 나는 그냥 얻어 걸린 거잖앗!” 하고 옜다 봐줬다 하는 심정으로 계산기에 100을 찍었더니 결국 항복.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 언니야들한테 받은 가격도 100.) 싸게는 아니어도 그냥 저냥한 가격이니 만족하려 했으나 수가 너무 빤히 보인 데다, 그렇게 사기 친 돈으로 샀을 것이 분명한 최신 투싼(응, 현대의 그 투싼)을 타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그래도 그 사기꾼, 오후에 온 유럽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기를 쳤는데, 아무 의심 없이 145달러를 지불한 독일 아저씨한테 호주 언니야들이 “우리는 100달러 냈는데?” 하고 천진하게 얘기하는 통에 사기꾼 초난감해지고, 독일 사람은 따지고, 사기꾼은 호주 언니들한테 그 얘길 왜 하냐고 성질 내고... 하는 통에 기분이 아주 약간 좋아졌다. 어쨌거나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호스텔과 겸업하는 곳이었는데 이름도 론리에 나오는 호스텔과 헷갈리게 지어놨던... 아 까먹었다. 내 한국 가면 반드시 경종을 울리리라! 했건만;

나스카는 라인보다 비행기 타서 본 풍경이 훨씬 좋았다. 굉장히 독특한 지질이라 그렇게 오랫동안 라인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정작 라인은 너무 높은 데서 봐서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뭔가 그냥 장난감이나 낙서 같았달까. 그 스케일 감상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망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건 자연 다큐멘터리이고; 내게 이날의 투어는 그저 ‘경비행기 체험’이었다는.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돌아온 호스텔에는 사기꾼이 있었고, 볼일(=돈 받기)이 끝났으니 터미널에 다시 데려다 줄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이었던 다섯 명 중 네 명은 함께 비행기를 타면서 친해졌는지 자기들끼리 아르마스 광장에 밥 먹으러 갔고, 혼자 다른 비행기에 탄 데다 사교성은 요만큼도 없는 나만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막막하다. 저 사기꾼, 아침만 해도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일단 짐을 두고 터미널까지 걸어가 겨우 겨우 밤 11시 59분에 출발하는 최고급 버스 표 한 장, 마지막 남은 딱 한 장을 구했다. 우리 돈으로 8만 원 돈 하는 표를 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으아아악, 아주 돈을 뿌리려고 작정한 여행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왜, 왜! 어제 와카치나에서 표를 안 샀던 거냐!

그 사기꾼의 집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짐을 챙겨 터미널로 돌아와 이제는 익숙해진 버스 기다리기를 시작했다. 까짓, 6시간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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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6 19:56 2014/01/1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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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페루
* 지역: 와카치나(Huacachina)
* 숙소이름: Banana's Adventure Lodge
* 위치: 이카에서 택시 타고 '바나나스 어드벤처' 가자고 하면 데려다 줌. 어딘지 몰라도 마을 어귀에서 기사가 동네 주민에게 물어봐서 데려다 주니 상관 없었음. 마을이 작아 오아시스 한 바퀴 돌다 보면 그 주위에 웬만한 숙소는 다 있음
* 방 종류: 6인 도미
* 가격: 75솔. 1일 숙박+버기투어+티셔츠 가격. 첫날 숙박은 이렇게 세트로만 판매함. 10솔에 별매하는 티셔츠를 안 받고 65솔로 깎아주면 안 되냐고 사정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힘. 그러나 다음 날 체크아웃할 때 다른 게스트들의 카드를 봤더니 나보다 적게 지불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봐서 여럿이 와서 흥정하면 좀 깎아주는 것도 같음. 공식적으로는 미리 예약하고 오면 10% 할인해 준다 함.
* 아침포함 여부: 불포함
* 부엌사용: 아마도 X. 부엌시설처럼 보이는 걸 찾을 수 없었음. 이 지역 모두 비슷할 텐데, 이 지역 게스트하우스는 거의 다 퍼브를 겸하고 있어서 사 먹어야 할 것임.
* 와이파이: 가능 (2층 방에서도 가능했음)
* 장점
  - 깨끗하고 밝음
  - 화장실이 방에 딸려 있음
  - 따뜻한 물 잘 나옴
* 단점
  - 생각보다 비싸고, 세트판매 방식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음
  - 게스트에 비해 콘센트가 적어서 충전 눈치보기가 치열함
* 기타
  - 동네 돌아다니며 보니 이 동네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음. 고로 다시 찾으라면 무조건 더 싼 데로 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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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14 2014/01/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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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리마 공항. 늦은 시각인데도 공항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돈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몇 달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없는 가게가 없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잠! 좌석이 개방되어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으려니, 종업원이 근처 테이블에 다가가 메뉴판을 내민다. 주문하지 않는 자여 앉지도 말라. 다행히(?) 나는 눈에 띄지 않았던지 내게 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 짐을 이고 지고 잘 만한 공간이 있는지 탐사에 나섰다.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미관을 크게 해치면 안 되므로 노숙공간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마침 맞춤한 통로 발견. 이미 몇몇 이들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다. 나도 졸지에 공항 거지가 되어 통로에서 쪽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조심 조심 방어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배낭에 살짝 기대고, 그 다음엔 옆으로 누웠다가, 한두 시간 만에 드디어 집에서처럼 누워 자기 시작. 이제 페루에 막 도착한 것 같은 삼삼오오 무리들은 잘 생각은 않고 맥주며 카드를 가져와 논다. 어휴, 체력도 좋다.

자다 깨다, 추위에 몸부림 치다 마침내 일어난 때는 4시쯤. 이 시각에 사용 가능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렷다. iPeru에 다시 한 번 들렀으나 역시나 별 신통한 얘길 듣진 못했다. (제발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좀!) 그래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낫겠지. 밖으로 나가 막 손님을 내려주고 떠나려는 일반 택시를 하나 잡았다. Cruz del Sur 터미널을 외치니 50솔을 부른다. 아우, 트루히요에서 공항 갈 때도 그러더니 이 동네는 뭐 물어보기만 하면 다 50이래. 그 가격 아닌 거 다 알거든요. 못 알아들은 척 손을 폈다 구부리면서 손으로 표시해 달라는 시늉을 했더니 그걸 10으로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바로 25솔에 데려다 주겠단다. 지난 번 탔던 그린택시의 55솔에 비하면 감지덕지라 더 따지지 않고 고고.

덕분에 터미널에 무사 도착해서 직원이 출근하길 기다렸다. 다행히 여섯 시 반 이카(Ica)행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나의 리마는 여기까지. 하지만 수도와 잘 맞았던 적이 없는지라 그닥 아쉽지는 않다. 수도와 나의 악연(?)은 아마도 이스탄불(엄밀히 얘기하며 이스탄불은 수도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도나 마찬가지니까; 너무 갖다 붙였나?)이 그 시작인 것 같은데, 도착한 첫날 삐끼와 걷기에 너무 치인 나머지 하루 이틀 머물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날 밤에 다음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구경은 한 달 뒤 다시 돌아왔을 때 하기로. 그 때쯤이면 터키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여행 막바지, 마침 50년 만에 내린 폭설로 고속버스 휴게소에 만 하루 넘게 갇히는 사고 발생. 터키 정부에서 주는 구호물자도 받아 먹고, 내내 앉아 있던 통에 다시 없을 굵기의 종아리도 가져 보고, 9일 동안 머리 안 감기 기록도 세워 보고,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결국 귀국 전날 밤 늦게야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바람에 구경이고 뭐고 이스탄불은 빠빠이.

흠, 그러고 보니 리마라는 지명을 처음 들은 건 어릴 적 읽은 금성사 소년소녀세계명작에서였다. 티티카카 호수도 나오고, 라마라는 동물도 나오고, 리마라는 이름도 모두 거기서 처음 들었다. 젊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고, 말이 안 통하는 ‘신비로운’ 원주민 여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그린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고 성질 낼 게 분명한 작품이지만, 어린 마음에 남은 건 그 신비로운 분위기와 이국적인 이름들이었다. 마침내 도착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때가 더 나았다. 그러니 어쩌면 더 ‘자세히’ 탐험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리마 안녕.

무사히 차를 타고 언제나 나를 굶주림에서 구원해 주는 버스식량을 흡입했다. 여행정보에 따르면 7시간 정도 걸린다던데, 불과 5시간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모르고 못 내릴 뻔; 사람들이 작은 도시 이카에 가는 이유는 대개 그 인근에 있는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오아시스 마을 때문이다. 가는 방법이 택시뿐이라 터미널에 ‘공식’ 택시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그 셈에 넘어가지 않고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와카치나는 물가가 비싸다기에 슈퍼에서 물이라도 사 가고 싶었다. 웬 블로그에는 근처에 마트가 있다고 하던데, 나는 결국 못 찾았다. 길을 걷는 주민들에게 ‘슈퍼마켓?’이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무시하고 지나간다. 내가 방문한 곳을 통틀어 최고로 불친절하고 불쾌한 곳이 이카였던 듯. 서비스 노동자가 보여줌직한 친절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나, 말 거는데 대꾸도 안 하는 건 너무하잖아. 심지어 길거리에서 나를 향해 중국 사람을 흉내내며 조롱하는 아저씨들까지 만났다. 결국 슈퍼 찾기는 포기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서 점심 겸 토스트 한쪽을 먹었다. 론리에서는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지만 역시나 가격에 비해;;; 싸다는 건 어디까지나 론리 편집진 그들 기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췌. 후다닥 해치우고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흥정한 뒤 와카치나로 갔다. 미리 생각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짐을 풀고 오아시스 구경 겸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남쪽으로 오니 확실히 관광객, 특히 유럽 미국 애들이 많이 보인다.

오후엔 버기투어. 와카치나에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은 버기투어와 숙박을 세트로 판매하는데, 개조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누비는 건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차가 롤러코스터인 척도 하고, 샌딩보드도 스릴 있고. 그러나 역시 내 성정에는 투어보다는 사막이 더 매력적이다. 신비한 물결무늬와 사람 잡는 발빠짐.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종일토록 사막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모래만은. 흑. 결국 포토시(볼리비아의 광산도시)에서 쓰려고 마련해 온 마스크를 여기서 개시했다. 함께 차를 탄 일행(유럽과 미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무리들)은 마스크 쓴 나를 보고 히히덕거렸지만. 얘들아, 내 기관지는 소중하단다.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내가 묵은 방에는 프랑스 남자애 셋과 이탈리아 남자애 하나, 영국 여자애 하나가 더 있었다. 역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백인들이라 금세 친해져 어울려 술 마시고 놀고, 싸운다. (이 동네 호스텔은 주로 레스토-바를 겸업하고 있어 게스트들은 밤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며 노닥인다.) 다행히 서로 낄 생각도, 초대할 생각도 없다. 귀마개랑 수면안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얘들아, 굿나잇. 그런데 조금만 조용히 해 주면 고맙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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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01 2014/01/1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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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차코 해안에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로 갈대배(totora)이다. 이 지역 사람들(아마도, 남자들)은 아주 아주 옛날부터 갈대를 엮어 1인용 고기잡이 배를 만든다. 론리에 따르면 2,000년 전 모체(Moche) 도자기에도 이 배가 그려져 있다고. 하지만 이 배도 소모품이라 수명은 고작 몇 달이란다.

이렇게 생겼다. 보기가 좋아 페루 관광엽서에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조형물에서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완차코 해안의 갈대배

좀 더 가까이서 본 갈대배

약 2/3 지점에 홈이 하나 있는데 그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니고, 뗏목이나 말처럼 이렇게, 배 위에 탄다. 홈은 아마도 잡은 고기를 놓는 곳이렸다. 석양이 질 무렵 떼를 지어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무리를 운 좋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 삶의 고단함과는 상관없이 정말 힘차고 멋있었다.

갈대배 타는 남자 조각

완차코에 온 사람들은 모두 열 지어 선 배 사진을 찍거나, 사진 찍으라고 세워둔 배를 배경으로 찍거나, 배를 타 보는 경험을 하며 논다. 그들 대신에 내가 한 것은 관찰. 배를 새로 만드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선(?!)은 하나 발견했다. 넌, 행복했니? 가만히 말을 걸어본다. 어쨌든 참 환경친화적인 물건이로고. 우리 선조들의 모든 도구가 그랬겠지만.

다 쓰고 버려진 갈대배

그러나 머잖아 쥔장은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망가진 배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으니...

꽁지에 스티로폼이 들어있는 갈대배

보이는가. 저 꽁무니에 들어간 흰 스티로폼 덩어리가. 중간의 안장에도 들어있다...!

안장에도 들어있는 스티로폼

저 배뿐 아니라 모든 배에 다 들어있다. 아마도 저 흰 덩어리가 마을에 소개된 어느 날, 누군가 선도적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배를 '개량'했을 것이다. 곧이어 모두들 따라했을 테고. 그건 옛날 방식이 아니니 사기 치지 말라고 할 생각도, 눈가리고 아웅 따위 하지 말라고 할 마음도 당연히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완차코의 갈대배’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저 스티로폼이 되어 버렸으니, 좀 억울(?)한 마음이 든다. 왜 나는 보라는 것만 보지 않고 다른 것도 보려고 하는 인간으로 태어나 버렸단 말인가. 그런데 이 얘길 왜 이렇게 올리기 귀찮은 사진까지 방출하면서 구구절절 쓰냐고? 뻔하지. 혼자 당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당신도 완차코, 하면 갈대배가 아니라 스티로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레드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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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1 13:38 2014/01/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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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을 "그리고는 기절", 이라고 끝맺었지만 사실 바로 기절하려던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몰라 근처 식당의 메뉴판을 찍어 놓고 방에 돌아와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 메뉴의 정체를 알아낸 뒤 맛난 밥을 먹고 돌아와 잔다, 가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몸으로는 도저히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한 시간만 자야지 하다 결국 그날도 저녁을 굶고 새벽까지 내리 자버렸다. 자고 일어났어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빈속에 진통제를 먹고 뒤척였다. 어쨌든 오늘은 리마로 돌아가는 날이다.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밤차를 타야지.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카페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도착한 날부터 눈에 띄었던 아담한 집이라 한 번 가보고 싶었다. 7천 원이면 주스와 커피 빵 스크램블까지 먹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바보 같이 계속 굶었을까. (비록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지만;)

완차코에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뒤적여 보니 이 마을에도 성당이 있다 한다. 16세기에 지어진, 페루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성당이라나. 카페를 나서며 주인에게 성당 위치를 물어보고 쉬엄쉬엄 걸었다. 아 그런데... 무슨 성당이 언덕 꼭대기에 있냐고! 이 무슨 절도 아닌데 108 계단이 있냐고! 햇빛은 이미 쨍쨍하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계단을 혼자 꾸역꾸역 걸어 올라갔다. 이 성당은 열두 시에 문을 닫고, 이미 열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나는 오늘 떠나니까, 헥헥. 그리고 마침내 다 올라가 성당 앞마당(?)에서 본 마을과 바다의 풍광은 이 모든 투덜거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가보길 잘했다.

오늘은 무조건 쉬고 최소한으로 걷기로 했으므로 해안가로 내려와 둑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구경,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서핑하는 사람 놀러 온 사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 갈대배를 손질하는 사람...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이 바다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 가슴이 찡해졌다가, 바다뿐 아니라 이 순간 자체가 다시 오는 일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역시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것도. 아마도 나는 오늘 이 몇 시간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마추픽추보다 더.

이제 슬슬 떠나볼까. 트루히요로 나가 버스표를 끊고 좀 둘러보다 차를 타면 맞춤하겠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헉, 숨을 토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선글라스 썼던 부분 빼고는 새까맣게 타버린 게 아닌가. 차라리 선글라스 같은 거 쓰지 말 걸, 선명한 경계 때문에 밤에도 선글라스 써야 할 판이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 내가 탔다는 걸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얼굴이 가렵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계는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한 달 이상 지나서야 사라졌다는 슬픈 얘기.)

그러나 잠시 뒤 얼굴 따위 문제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트루히요 시내로 나와 보니 리마행 버스는 전부 매진이다. 비싼 회사부터 싼 회사까지 대여섯 군데 되는 그 동네 버스터미널을 모두 돌았으나 모두 매진 매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보니 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이 사람들도 주말에는 놀러들 다니나 보다. 오늘 밤차를 타고 내일 새벽에 리마에 도착해서 이카(Ica)로 가서 하루 묵고, 그 다음 날 쿠스코로 떠나야 예정했던 날짜에 마추픽추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이 상태라면 내일 예정한 오아시스 버기카 투어에 나스카라인은 포기해야 할 판이다. 아악, 나는 왜 이런 일 따위 예상하지 못하고 쿠스코 숙소와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와 입장권을 미리 사버렸던가. 그놈의 바다가 뭐라고 완차코에서 하루를 더 묵어버렸던가. 하루를 더 잤으면 서두르기나 하던가. 얼굴만 시커매지고 말 걸 뭐하러 헤벌레 하고 유유자적하고 있었는지. 나한테 짜증이 뭉게뭉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나. 정신을 차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몇 가지 옵션을 떠올려 봤다. 트루히요에서 하루 잔다, 이카를 포기한다, 쿠스코에 하루 늦게 도착한다 등등.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오늘 리마로 가야 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근처 여행사에 들어가 흥정이고 뭐고 없이 달라는 돈 다 주면서 리마행 밤비행기표를 사버렸다. (그마저 표가 있네 없네 난리가 났었다는; 그래도 20만 원으로 막았으면 선방했다.) 에효, 아침만 하더라도 오늘은 별 일 없이 보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박사건이 줄줄이 터져주실 줄이야. 하긴, 이런 사건 하나 없으면 자유여행이 아니지.

그 상황이 정리된 건 일곱 시쯤. 해도 졌겠다, 몸도 힘들겠다, 기분도 별로겠다, 시내에 더 있을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와 자정이나 되어야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보딩 시간까지 세 시간도 더 남았지만 리마에서는 여섯 시간도 기다렸는데 뭐. 일지나 써야지. 새벽 1시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쩔 것이냐가 또 고민이겠지만 공항에서 시간 좀 때우다 터미널 가면 된다. 갔는데 리마에서 이카까지 가는 버스표 없으면? 흥, 또 비행기 타 버릴 테다! 그 때는 그 때대로 수가 있을 거다.

그러는 통에 저녁은 또 굶었고 (이젠 새롭지도 않다;) 열두 시에 비행기는 출발했고, 아홉 시간 걸려 왔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내린 곳은 첫 날 도착했던 바로 그 곳, 리마 공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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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23:20 2014/01/0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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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이날의 일지는 고작 다섯 줄이다.

10:30 예정인 투어 전에 성당 보려고 나감. 한목소리로 피사로를 알려 준 승객들, 광장까지 바래다 준 소이 엄마 무한감사.

아르마스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성당은 비신자에게는 오전에만 개방된다. 그래서 투어 전에 잠깐 둘러 보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 트루히요 행 봉고버스를 탔다. 아침으로는 호스텔 식당에서 탄 식빵 두 쪽과 버섯 오믈렛. 아 배고파. 어쨌거나 어제 시행착오를 겪은 덕에 아르마스 광장까지 가는 길은 자신이 붙었다. 그래도 안내원에게 광장 간다고 얘기는 해 둔 터. 마침내 광장 언저리에 이르자 승객들이 너도 나도 "여기야 여기, 내려!" 한다. 내가 탔던 버스 승객 모두 내 행선지를 알고 있고, 그 승객 모두가 내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려 주는 그런 경험은 늘 유쾌하다. 겪을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마침 같이 내린 아기 엄마도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가 보다. 버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인데, 광장은 이쪽 길이라며 알려준다. “저 이 길 알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란 말을 스페인어로 못 해서 함께 걸으며 서로 안 통하는 말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듣자마자 잊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행길에 잠깐 스친 인연, 다시 볼 일 없는 사람 이름은 기억해서 뭐 해? 하는 생각을 내가 미처 하기도 전에 뇌가 알아서 필터링 해 버린 거다. 듣고, 잊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 해서 1초나 될까. 내 마음은 언제 이렇게 건조해져 버린 걸까. 그래도 신속하게 반성했으니 조금은 덜 여문 걸까. 어쨌든 그 '반성' 덕에 아기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된 거다. 돌도 안 된 귀여운 아기의 이름은 ‘소이’였다. 까꿍 몇 번에 까르르 웃는다. (참 신기한 게, 한국 아가들은 나를 보면 일단 무서워하고 경계하는데, 여기 아가들은 일단 날 보면 웃어준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해서 소이 엄마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어디로 가세요? 그제야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저 뒤쪽을 가리킨다. 생판 모르는, 인생에 다시 볼 일 없을, 길이 서툰 여행자를 위해 추운 날 아기를 안고 한참을 동행해 준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왈칵. 정말 미안해요, 그런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서. 의미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네요.


리마성당처럼 화려한 마리아와 예수. 리마가 더 낫네.

성당에 들어갔다. 앞으로도 여행길에 무수히 보게 될 성당들. 규모도 크고 장식도 화려하지만 내게는 리마의 ‘은혜교회’가 더 끌린다. 대충 둘러보고, 오늘도 마음의 평안을 빌고,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서 조나단 또 마주침. 아 불편

생각보다 성당구경이 짧아져서 광장을 떠돌았다. 어제 조나단에게 설명 들었던 광장 조각상을 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헉, 조나단; 안녕;;;

어제 안녕 빠빠이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니 뻘쭘하다. 내가 수다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낯모르는 사람의 얘길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제는 설명 들으면서 막 이해하는 척 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와서 다시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데 조나단은 내가 엄청 반가운가 보다. 하긴 그런 성정이니 안내원을 하겠지. 하지만 미안, 당신은 참 착하고 친절하지만 난 여기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땡땡아, 언제 떠나니? 하길래 오늘, 찬찬투어 마치고,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후다닥 도망. 안녕 안녕.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다니거나 유적지를 보는 것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최고라고들 한다.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눴던 대화들, 마음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겐 그런 행위들이 별 의미 없고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뭐, 다시 볼 거야? 아니잖아. 그들을 통해 뭔가 참신한 얘기나 생각을 듣고 싶어? 사람들 사는 거,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더 어릴 때는 재미났던 일들이, 이젠 허허롭기만 한 걸 보니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인가. 흔히 여행은 젊을 때 가라는 얘기들을 한다. 난 이게 체력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인 걸 알고는 있지만, 어쨌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서로 서로 넘치는 열정을 나누는 것, 거기서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나를 보여주고 너를 읽는 것, 이건 몸이든 마음이든 젊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할머니 마음을 가진 내겐 이제 그 모든 것들이 귀찮고 버겁다. 아우, 비생산적이야. (아 그러고 보니 ‘한량’ 다음의 내 장래희망이 ‘멋진 할머니’인데 ‘멋진’은 몰라도 ‘할머니’는 벌써 이룬 건가.) 아아, 그래서 여행은 ‘젊을 때’ 가야 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달의신전 재밌지만 피곤.

데이투어 차를 타고 황야를 달리다 보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산이 하나 나온다. 옛날 사람들도 틀림없이 나처럼 느꼈을 거다. 그러니 그 주위에 신전을 두 개나 지었겠지.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느낌은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유적 하나하나 설명을 마친 후 질문 없냐고 묻는 가이드에게 모두들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날 내가 한 질문은 딱 한 개. “저 산 이름은 뭔가요?”였다. Cerro Blanco, 흰 산, 이라고 했다.

달의신전은 어느 정도 발굴되어 둘러볼 수 있었지만 태양의신전은 돈 없어서 아직까지 못 열어보고 있단다. 달의신전도 독일인가 프랑스의 어느 재단에서 발굴비를 대줘서 그나마 관광객을 받을 모양이나마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전 흙벽의 문양은 한국 도깨비 무늬랑 참 비슷하게 생겼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지구 중앙에 반대편과 통하는 길다란 터널이 한 개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한쪽에서 그 터널을 타고 와 다른 편에 정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 먹고 찬찬 투어. 아 진짜 나는 배낭족 아니고 휴양족이었던 것. 그래도 북쪽에 오길 잘한 듯.

데이투어는 원래부터 ‘데이’가 아니라 사실 오전 투어 + 오후 투어이다. 오전에는 모체(Moche) 유적지인 달의신전과 박물관 구경, 오후가 찬찬(Chan Chan) 투어다. 따라서 오전만 하거나 오후만 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니 팀과 함께 점심을 먹어도 되고 따로 먹어도 된다. 버스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드가 데려다 주는 식당에 가겠다고 한 모양이고, 나는 당연히(?) 혼자 해결하겠노라 하고 내렸다. 오전 투어를 함께 했던 멕시코 커플이 함께 내린다. 그들은 오후 투어는 안 한다며, 내게 점심을 같이 먹겠냐 묻는다. 가이드가 데려다 준다던 그 식당은 엄청(물론 배낭여행객 기준이겠지;) 비싼 데라며.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다니는데 이 친구들 좀체 메뉴를 선택하지 못한다. 수십 군데 식당의 메뉴와 가격을 보고 고민만 하다 지나치느라 나도 덩달아 몇 블록이나 걷게 되었다. 이보세요, 당신들은 체력이 되나 본데 저는 오전 투어만으로 이미 삭신이 쑤시거든요. 발목이랑 발바닥이랑 허리가 나갈 것 같아요! 하며 뒤에서 찌릿찌릿 레이저를 쏘아댄 기운이 느껴졌는지, “그런데 너 시간 되겠어? 한 시 반까지 가야 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 버렸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응, 나는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래, 넌 뭘 먹을 테냐?” “글쎄, 샌드위치나 먹을까 봐.” “그래, 샌드위치는 언제나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 거기 광장 가는 길에 싸고 괜찮은 집 있어.” 이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서로 각자의 길로. 그리고 나의 점심은, 슈퍼에서 만들어 파는 중국식 볶음면 한 컵. 반찬은 길바닥으로 내리쬔 햇빛. 이렇게 또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오후 투어는 방대한 찬찬 유적을 둘러보고 완차코의 석양을 보는 데서 끝나는 일정이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방대한’ 유적은, 모두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 아니고, 그냥 흙을 이겨 만든 건물과 벽, 궁전이다. 아니 대체 그 건물들이 몇 백 년 동안 어떻게 보존이 된 거지? 그러니까 그 무모해 보이는 짓을 한 사람들은 그 지역에 비 따위는 결코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그들의 낙관은 틀렸다. 20년 전쯤, 지구 온난화의 따뜻한 손길이 여기에도 뻗쳐 마침내 비를 내려 주었으니, 그때 상당량의 찬찬 유적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뭐,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대의 도래를 예상치 못한 게 선조들 잘못은 아니다.

이 같은 불상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흙담 위에는 참으로 허술해 뵈는 슬레이트 지붕이 쳐져 있다. 여행사진을 본 사람들이 모두 “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물었던 게 바로 그 지붕 사진이었는데,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왜 찍었는지 모를 그 사진에는 찬찬의 과거와 페루의 현재, 지구의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정정. 아무래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게 찜찜해서 찾아보니, '점점' 더 훼손되고 있는 건 맞지만 엘니뇨는 이미 그들이 살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아직도 조금만 걸었다 하면 발목과 허리가 금세 아프다. 사실 오후 투어를 시작할 때쯤 나는 이미 고관절에서 소리를 내며 발을 끌고 있었다.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여기서 또 한 번. 도저히 더는 못 움직이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건 네 시쯤. 그러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차는 완차코에 도착했다. 석양사진 찍고 모이라는 가이드에게 내 숙소는 여기니 나는 이만~ 하고 돌아섰다. 5~10분이면 걸을 거리를 근 한 시간이나 걸려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덕에 완차코의 석양을 만끽. 왜들 그리로 사진 찍으러 모이는지 알겠더라는. 그리고는 다시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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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12:20 2014/01/0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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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편집해 넣기 귀찮음. 나중에 추가하던가 할 예정;)

빅벤을 나오니 아까랑 다르게 생긴 봉고차 버스들이 지나간다. 안내원에게 "쁠라싸 데 아르마스(Plaza de Armas)"를 외치니 타라 한다. 황야를 지나 시내로 접어들고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린다. 시내 초입부터 긴장하며 광장 같은 게 보이는지 살폈으나 아직인 것 같다. 안내원도 아무 말 없고. 그러다 보니 안내원이 돈을 걷는다. (보통은 내릴 때 요금을 내지만 회차지점이 가까워 오거나 손님이 적어 한가할 때는 중간에 걷기도 한다.) 내게도 손을 내미는 안내원에게 "아까 냈잖아요" 했더니 잠깐 생각하다 흠칫 놀란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치며 "피사로!" 한다. 엥? 피사로가 뭔데요? 차 안이 술렁술렁하며 스페인어가 몇 마디 오가더니 누군가 내게 어딜 가냐 묻는다. (나 왜 이런 말 다 이해하는 거임?) 아르마스 광장요. 그게 피사로란다. 알고 보니 아르마스 광장은 피사로(Pizaro)가(街)에 있었다는. 그리고 버스는 광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는. 그래서 광장 같은 건 눈에 안 띄었던 거라는. 안내원은 차를 세우고 나를 내리더니 마침 맞은편에 서 있던 똑같이 생긴 버스를 불러주었다. 얘를 피사로로 데려다 줘. 덕분에 겨우 광장에 도착. (참고로 이 경우 돈을 받을까 안 받을까 궁금했지만, 얄짤 없이 1솔 내라고 해서 냈다.)

아르마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을 구경하고, 광장 끝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부족했던 한 끼를 해결하기로 했다. 들어가 메뉴판을 보다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데 놀랐다. 체감상 페루의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물가는 비슷하다니. 이 사람들도 살기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 그런데 치킨버거 맛이 왜 이래. 치킨에서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한 냄새가;;; '형언'할 수 없어서 진짜 표현을 못 하겠다. 그래도 세비체보다는 나으니 꿋꿋이 먹었다.

특이했던 건 케첩과 마요네즈를 먹는 방식. 카운터에서 1회용 케첩과 마요네즈를 지급하는 한국과 달리 매장 중간에 거대한 케첩과 마요네즈 대가 비치되어 있고, 햄버거와 함께 주는 빈 용기에 원하는 만큼 펌프질을 해 담는 식이었다. 커피전문점에 있는 시럽 비치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가절감과 쓰레기배출 감소라는 측면에서 어떤 방식이 더 나은 걸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내 머리로는 계산 불가라 1초만에 포기;

찬찬 데이투어를 예약하고 광장 주변에 있다는 옛날 집들을 둘러본다. 트루히요 관광지도를 보면 유독 Casa(집, house, '까사블랑까'의 그 '까사') 어쩌고 하는 건물들이 많은데, 그 안에 뭐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옛날에 지은 예쁜 (스페인식) 집 구경이다. 내게는 집 자체보다는, 그 건물들이 아직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어떤 집은 은행이고(그래서 들어가는 절차가 까다롭다), 어떤 집은 소셜클럽 전용건물(그래서 방문가능 시간과 층이 정해져 있다)... 없애버리거나, 아무도 거주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거나 하지 않고 시대와, 사람과 함께 흘러가도록 두는 건물.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Casa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구나.

카사 한 곳을 찾느라 길을 헤매다 관광 안내원 조나단을 만났다. 언뜻 보면 경찰관 같은 제복을 입고(이 동네 사람들 참 제복 좋아하는 듯) 명찰을 목에 걸고(tourist 어쩌구 쓰여 있음) 대로변에 서 있다가 나 같은 어리바리 관광객이 오면 안내해 준다. 공짜다. 처음엔 혹 이상한 사람인가, 안내원을 가장한 삐끼인가 긴장했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인가 보다. 그 보답으로 나중에 시청 방명록에 내 인적사항과 안내원 이름 정도 적어주고 오면 된다. 그에게 시청 청사와 아르마스 광장 안내를 받았는데,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그려. 어쨌든 덕분에 심심치 않은 오후를 보냈다.

원래는 내일 데이투어를 마치고 바로 리마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이 작은 동네가 참 마음에 들어 하루 더 묵을까 어쩔까 계속 고민하다 결국 완차코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지금 다시 선택하래도 리마보다는 완차코에 있을 테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데 옆으로 봉고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앗, 모자 쓴 안내원! 아까 트루히요 나갈 때 탔던 버스다. 나 무사히 아르마스 광장 갔다가 잘 돌아왔어! 하는 마음으로 손을 막 흔들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던 안내원, 잠시 뒤 내가 기억 났는지 함박웃음을 짓는다. 웃는 모습이 예쁜 청년이었구나.

시차 때문인지 저녁 굶고 침대에 엎어진 건 여섯 시 조금 넘어. 덕분에 기상시간은 새벽 두 시.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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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2:40 2014/01/0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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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페루
* 지역: 완차코(Trujillo)
* 숙소이름: NAYLAMP
* 위치: 완차코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대로변에 있음
* 방 종류: 싱글
* 가격: 35솔
* 아침포함 여부: 불포함 (별도판매, 6솔~)
* 부엌사용: 미확인
* 와이파이: 가능 (1층 입구와 가까운 쪽 방이어서였는지 방에서도 됐음)
* 장점
  - 론리에 나옴. 대로변에 있어 찾기도 쉬움
  - 방안에 가만 있어도 파도소리 엄청 잘 들림
  - 수압 약간 낮으나 따뜻한 물 잘 나오는 편
* 단점
  - 1층은 방에 볕 안 듦. 2층 방값은 더 비쌈
* 기타
  - 이틀 묵으면서 6솔짜리 아침(버섯 오믈렛+토스트) 한 번 사먹음. 오믈렛은 짜고 토스트는 탔지만 시장이 반찬.

트루히요의 숙소는 대체로 가격에 비해 질이 떨어지고 도심이라 시끄럽다는 평이라 대개 완차코에 숙소를 잡는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완차코는 서핑해안이라 서핑교습을 해 주는 게스트하우스도 좀 있습니다. 관광지라 물가는 대체로 비싼 편이지만 더 싼 (도미토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있습니다. 제가 묵었던 데는 도미토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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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13:10 2013/09/1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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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차코(Huanchaco) 찾아 삼만리

동이 틀까 말까 한 아침 일곱 시 반. 트루히요에 도착했다. 웬 블로거의 여행기를 보니 아침에 도착해서 바로 완차코(Huanchaco) 해안 구경을 하고 찬찬(Chan Chan) 일일투어를 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일정에 따르기로 한다. 숙소는 완차코에 잡아야지.

터미널 맞은편에, 한국 거랑 비슷하게 생긴 버스정류장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Linea 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Linea 터미널>

한국의 마을버스 내지는 봉고차 크기의 버스들이 연달아 지나가고, 안내원(나 어릴 때는 대부분 '안내양'이었는데 여기는 대개 젊은 '안내군'들이다)들이 제각기 목적지를 외친다. (물론 못 알아들었다. 한국 마트나 시장에서 호객하는 소리도 잘 못 알아듣는 판에;) 그 많은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완차꼬?" 했지만 다들 안 간단다. 한 20분 그러고 있자 과연 여기가 버스정류장이 맞는지, 완차코 가는 버스가 여기 서기는 하는지, 아니 대체 완차코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른 아침,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지라 물어볼 데도 없고, 바쁜 버스 안내원들을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바쁘다'는 의미는 이렇다. 봉고차 버스의 안내원은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문을 열고 내린다. 물론 여전히 달리고 있는 차에서. 열심히 모객을 한 다음 출발하는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승객에게 빨리 빨리, 를 외치며 타고 내리는 걸 돕는다. 순전히 차를 더 일찍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는 앞문이고 뒷문이고 문을 닫지 않는다. 승객으로 만원이 되었을 때조차.)

버스만 믿고 온 터라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벤치에 앉아 정신을 좀 수습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길 5분? 웬 중년여성이 정류장으로 온다. 짐을 보아하니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모양이다. 손짓 발짓 섞어 완차코 가는 버스가 여기 서냐 하니 그렇단다. 아이고 감사 감사. 그런데 얼마예요? 하면서 손으로 돈 모양을 그렸더니 이 아주머니 손사래를 친다. 응? 버스비 얼마냐는 거였는데 돈 좀 달라는 소리로 알아들으셨나 보다. 다시 한 번 물었더니 이번엔 통했다. 운 씬꾸엔따(1.5솔). 한국 돈으로 700원쯤 되려나?

그러고 있으려니 빨갛고 노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버스가 한 대가 온다. 드디어 완차코 가는 버스. 이 버스가 그 버스라고 알려주신 아주머니도 함께 탔다. 나중에 보니 버스에 대문짝만 하게 Huanchaco라 쓰여 있다. (론리에도 버스안내가 되어 있더라. 췌.)

완차코 가는 버스
<완차코행 버스>

삼사십 분 열심히 달리다 보니 바다가 보인다. 좀 아까의 아주머니가 내리면서 "난 내린단다. 넌 좀 더 가야해." 해 주신다. 고맙습니다. 그때부터 긴장하고 밖을 바라봤지만 완차코가 어디인지는 오리무중. 버스가 설 때마다 여기서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내리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류장에서 기사와 안내원이 이구동성으로 여기니까 내리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왕, 고마워요. 버스가 떠나는데 기사와 안내원 모두 손을 흔든다. 무뚝뚝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마주 인사하며 활짝 웃어 주었다.

그리고 완차코.
내려서 본 풍광은 이러했다.

완차코 해변
<완차코 해안>

완차코 해변은 현지인들도 많이 놀러오는 곳이라 일과시간에는 사람이 없을 때가 없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가면 태평양과 독대할 수 있다. 이런 곳인 줄은 몰랐는데, 여기 참, 좋다. 그런데 사진으로 봐선 여느 바다랑 다를 게 없네;

해변을 쭉 걸어 올라가 숙소를 잡았다. 론리에 소개된 NAYLAMP다. 1인실에서 샤워도 하고 속옷도 빨았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포스트도 남겼다. 허기지고 체력도 달려 일일투어는 내일로 미루고 일단 밥을 먹고, 트루히요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세비체(Ceviche)와 잉카콜라

빅벤(Big Ben)이라는 식당은 세비체(Ceviche)로 유명하다고, 론리님께서 말씀하셨다. 세비체는 익히지 않은 생선살을 라임즙에 담뿍 절인 것을 기본으로, 다른 것을 위에 얹거나 섞거나 하는 페루 음식이다. 그런데 나는 회를 못 먹는다. 날것의 느물느물한 감촉을 견디지 못해서다. 그리고 신 것도 못 먹는다. 남들이 별로 안 시다고 하는 과일도 못 먹을 정도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먹을 수 있을지 적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페루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인데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는가. 단백질(생선살)은 산(酸)과 만나면 응고되니까, 감촉이 일반 회랑 좀 다를 수도 있다는 데 희망을 가졌다.

가격대는 좀 되지만, 이왕 먹어볼 거면 제대로 된 데서 제대로 된 메뉴를 맛봐야 한다는 생각에 빅벤으로. (참고로 빅벤에서는 점심식사만 가능함. 열한 시 반에 열고 다섯 시 반에 닫음)

빅벤에서 바라본 완차코 해변
<빅벤에서 바라본 완차코 해변>

마실 것은 잉카콜라. 페루인들이 코카콜라보다 더 많이 마시는 음료라고 하는데, 코카콜라사에 인수되었다나. 익숙한 불량식품의 맛이다. 합성착향료와 색소가 듬뿍 들어 있다.

잉카콜라와 볶은 옥수수
<잉카콜라와 볶은 옥수수>

그리고 세비체는 역시, 나를 위한 음식은 아니었다. 생선살은 겉이 아주 약간 응고되었지만 특유의 살성은 여전했고, 그 신맛은 내 이까지 녹여버릴 듯, 좀 있으니 잇몸까지 아렸다. 하루 넘게 굶다시피 했고, 그 가격을 생각하자면 어떻게든 다 먹어치웠어야 했으나 결국 1/3도 못 먹고 내가 졌소를 읊조리고 도망 나왔다. 남은 접시를 보고 좌절할 주방장이나 웨이터에게 당신들 잘못이 아니에요, 제 입맛이 문제예요,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스페인어가 안 되니 도망 칠 수밖에. 30분 만에 2만 원을 날렸지만, 계산할 때 기념으로 준 열쇠고리 가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굶어 쓰러지진 않을 테니 트루히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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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12:55 2013/09/1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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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강 미스터리

아르마스 광장 뒤쪽으로 좀 걸어가니 청계천 같은 곳이 나온다. 리마강이다. 사이즈는 한강에 한참 못 미치고, 청계천보다는 좀 더 넓은 것 같다. 사람들이 다리에 서서 한참씩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자세히 보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리마강의 다리
<리마강의 다리>

그래 나도 강 구경 좀 하자 싶어 다가가니 웬걸, 이런 광경이 나를 맞는다.


리마강 공사현장
<리마강 공사현장>

안내문을 읽을 수 없어 대충 짐작하건대, 원래는 강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변모 중인 듯하다.

리마강 개발사업 안내판
<리마강 개발사업 안내판>

그런데 왜, 더 이상 강도 아닌 공사판을 강물처럼 하염없이들 바라보는지는 모르겠다. 할 일이 없다기엔, 근처에 공원도 있고 노점도 있고. 공사 관련자들이라기엔 한마디 간섭도 없고.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분들이라기엔 그 수가 제법 되고. 강물이 흐르던, 옛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걸까? 다가올 삐까뻔쩍한 도로들을 그려보는 걸까?


경비대 교체식과 스타벅스

(옛)강변을 따라 벤치와 작은 광장, 노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한 바퀴 돌고 대통령궁으로 돌아왔다. 열두 시가 안 됐는데 벌써 군악대 연주를 시작했다. 울타리 바깥엔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고, 군인들은 열심히 교통정리(?) 중이다. 트럼펫 끝에 악보를 끼우고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래서인지 뭔가 엄숙한 분위기이긴 한데 동시에 어설프다. 울타리 앞에서 몇 곡 연주하고 물러서길래 끝인 줄 알았더니 그건 그저 호객행위(?)였을 뿐. 광장 가장자리로 가더니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메인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는지 군악대는 더 이상 악보를 보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음악이라 악보는 필요 없는지도. 광장 양 옆으로 열 맞춰 경비대가 등장한다. 음악 때문인가, 뭔가 좀 애잔하다. 치켜드는 발 높이가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것도, 발 내려놓는 타이밍이 조금씩 다른 것도, 앳된 얼굴들도, 다. 포스트를 쓰다 말고 찾아보니,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인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식민지시대 농민혁명가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를 기리는 곡이란다. 내친 김에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pasar에는 넘다, 지나가다, 이동하다, 이런 뜻 외에도 멈추다, 사라지다, 살아가다, 지내다, 죽다, 이런 뜻도 있다. 그럼 "El condor pasa"는 콘도르가 지나가네, 가 될 수도, 콘도르칸키가 죽는구나, 가 될 수도 있겠구나. 알고 나니 더 애잔하네.

경비대 교체식
<경비대 교체식 - 군악대 연주와 구경꾼들>

그러나 교체식을 보면서 현장에서 깨달은 건 따로 있었으니, 역시 난 걷기 위한 몸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 아이고 허리 발목 발바닥이야. 얼마나 걸었다고 발목이 끊어질 듯 아프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이후 루트따위는 잊기로 하고, 유니온거리를 지나올 때 보아 둔 스타벅스로 향한다.

다국적기업, 특히 음식을 다루는 다국적기업의 몹쓸 좋은 점 하나는, 해외에서 만났을 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거다. 세계 어딜 가도 똑같은 간판과 인테리어, 대동소이한 메뉴, 비슷한 가격. 나 여기 어딘지 알아. 뭘 먹어야 할지도 알고 있고,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건 없지.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고. 그저 일상처럼 하면 돼. 긴장이 풀린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참, 페루 스타벅스에는 ‘아이스’ 메뉴가 없다!) 새끼캥거루(아이패드)를 뱃속에서 꺼내 지도를 살핀다. 터미널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고, 더 걷기엔 체력이 달린다. 그러니 가는 길에 있는 예술박물관에 들렀다 터미널로 돌아가기로 한다.


파사, 뽀르떼의 진실

론리에는 이 즈음 페루의 평균기온이 나와 있었다. 18도였나. 그럼 봄가을 날씨쯤 되겠군, 반팔과 얇은 겉옷 몇 벌이면 되겠지 했던 게 패인이었다. ‘평균’은 최댓값과 최솟값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평균기온만 가지고는 새벽에는 2, 3도까지 내려가고 한낮에는 20도를 훌쩍 넘는 이 동네 일교차를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도착 첫 날부터 벌벌 떨게 된 쥔장, 유니온거리 옷집에 들어가 스웨터 한 벌을 사기로 한다.

앞에 지퍼가 달린 아크릴 스웨터의 가격은 16,000원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었더니 뭐라 뭐라 한다. 그 와중에 '코멘트'라는 말을 건지고 사인하라는 건가? 코멘트가 없다고? 무슨 말? 한참 궁리를 했으나 알 길이 없다. 아멕스라 안 되나(페루는 확실히 비자의 나라다) 싶어 비자카드를 내밀었는데도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이 언니 또박또박 말하길, 파사, 뽀르떼. 왓 이즈 파사 뽀르떼? 파사는 무슨 전치사인가 보지? for 정도? 근데 뽀르떼는 뭐야? 둘 다 답답하긴 마찬가지. 이 상태로 몇 분이 지나고 보다 못한 옆 직원이 거든다. 저기;;; 죄송하지만 거드셔도 못 알아듣거든요;;; 그때 옆 직원이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본인의 ID카드다.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그제야 Oh, you need my passport! 하고 여권을 꺼내 주었다. 그러니까 처음 들었다고 생각한 '코멘트'는 '도큐멘트'였던 거고, 카드 사용자의 신분확인이 필요했던 거고, 파사 뽀르떼(pasaporte)는 패스포트(passport)였던 거지. 첫날부터 완전 식겁. 그래도 이렇게 호되게 겪은 덕에 여행 내내 이민국이나 은행에서 파사포르테 보여 달라는 요구에 넹넹! 할 수 있었다.

한 겹을 더 입었어도 여전히 춥지만 어쨌든 예술박물관으로 간다. 리마 예술박물관의 줄임말은 '말리(MALI: Museo de Arte de Lima)'다. 사방에 'MALI'가 쓰여 있어서 처음엔 무슨 화가 이름인 줄 알았다. 줄임말이라는 걸 깨닫고 또 혼자 으쓱 으쓱. 말리에는 사보갈 특별전이 한창이었는데, 굉장히 유명한 화가인가 보았다. 평소에는 입장권을 판매하는데 페루 독립(7월 28일)기념주간 행사 덕분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사보갈은 몰랐던 분인 데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라 특별히 여기 보탤 말은 없지만 관람객만은 인상적이었다. 딱히 잘들 차려입은 것도 아니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구성도 다양한데 모두 가이드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각자 개별적으로 관람하는 게 아니라 몇 명씩 모아서 설명해 주는 것과, 각 전시실에는 정해진 인원만 입장하게 하는 것도. 역시 스페인어를 공부했었어야 해. 그런데 분명 2층 건물인 것 같은데 2층에 올라가는 길을 못 찾겠다. 대충 찾아보다 결국 포기.


밤차 타고 트루히요로

터미널에 돌아오니 고작 오후 네 시다. 가는 길에 밥집이 있으면 늦은 점심을 먹을까 했는데 영 끌리는 데가 없다. 끌리는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개시'하기 어려워서다. 나는 이상하게 낯선 곳에 가면 쉽게 먹을 걸 먹지 못한다. 입맛이 보수적이어서이기도 하고, 긴장해서이기도 하고, 낯가림이 심해서이기도 하다. 여기선 스페인어를 못 읽은 탓도 크다. 덕분에 들어가 볼까? 하는 집이 두어 군데 있었음에도 메뉴판만 몇 번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터미널 2층에 간단한 스낵을 파는 것 같은데 딱히 올라가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배고프겠다, 춥겠다, 그 때부터 불쌍한 터미널 동양 거지 코스프레가 시작되었다. 담요 하나 뒤집어 쓰고 졸다가 오가는 사람 구경하다, 아이 추워 하다 (왜 문은 안 닫냐고!) 보니 마침내, 드디어, 버스 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 저녁을 다 굶었네. 아침에 비행기에서 이게 오늘의 유일한 식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거지놀이 하며 바라본 터미널 풍경
<거지놀이 하며 바라본 터미널 풍경>

버스는 2층 맨 앞좌석이다. 앞이 통유리고 발 뻗기도 좋아 인기 많은 좌석이다. 으, 그런데 어디선지 화장실 냄새가 난다. (알고 보니 그 언저리 1층이 화장실. 흑.) 출발한지 오래지 않아 자신을 샌드위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는 빵 한 조각과, 디저트로 의심되는 빵 한두 조각, 홍차가 배급되었다. (비싼 고속버스는 이렇게 ‘식사’도 준다) 빵맛이 무슨 상관.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와이파이도 된다. (접속이 안 될 때도 있다. 나는 안 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내 시장기를 해결해 주셨는데 와이파이쯤이야.

목적지인 트루히요까지는 버스로 아홉 시간이 걸린다. 대여섯 시간 자고 일어나도 휴식 따윈 모른다는 듯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다. (이런 장거리 버스에는 기사가 두 명 탑승하고, 교대로 운전한다.) 풍광은 좋구나. 이제 해가 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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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17:01 2013/09/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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