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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과 후

30년 전,

아버지는 한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집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스름이면 엄마랑 아줌마들은 사택을 도는 트럭에 밥과 국을 들통으로 실어 날랐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엄마는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집에서 마음 졸이며 우리를 돌보았던 엄마는, 밥과 국을 해 날랐던 엄마는,
기억되지 않는다.  

아랫지방에서 내가 해맑게 트럭을 쫓아다니고 있을 때
나보다 세상을 좀 더 산 어떤 여자들은 왜 투쟁 전과 투쟁 후의 차이가 없는지 고민했다.
니넨 투쟁하는데 왜 우린 여전히 답답한 거지?
왜 여전히 ‘중요한’ 일들은 니네가 하고 우리는 밥이나 나르라는 거지?
왜 그에 대해 말하려 하면 그건 부차적인 거니까 ’대의’를 위해 가만히 있으라 하는 거지?
그래서 여자들은 결심했다. 가만히 있지 않기로.
우리가 직접 우리의 얘기를 하기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여성단체들이 1987년에 생겨난 이유이다.


30년 후,

여전히 ‘대의’를 위해 그 입 다물라고 말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만 보고 있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떤 여자들은
네가 가리키는 그것은 달도 아니고 손가락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누구든 달이든 손가락이든 그 무엇이든에 대해 얘기할 자유가 있다고 말하거나,
달도 손가락도 내게는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다.

혹은 나처럼,
‘혐오’가 ‘표현의 자유’라면, ‘혐오할 자유’가 성립된다는 얘기인데,
대체 누구에게 어떤 ‘존재’를 혐오할 자유가 있다는 건가. 
라고 써 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이제
"딸들아 일어나라"라는 노래를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대신
"딸들아 일어나라! 밥해라!"로 개사해 부르면서 낄낄대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세상은 아주 더디지만,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
30년 후에는 또 어떤 모습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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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20:41 2017/01/3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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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며칠 전, 클렌징 티슈를 사 오라는 명이 하달되었다.

“알쩜! 인터넷으로 주문해 드릴게.”
“인터넷으로 하지 말고 그냥 가게에서 사 와.”
“왜. 인터넷으로 하면 더 싸고 편한데.”
“이런 대목에 인터넷으로 그런 거 시키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사 오지 마.”

알 수 없는 사람 1
초극강의 가족이기주의자인 저분은 가끔 저런 언사로 나를 놀래킨다.
어딘가에 썼던 얘기인 것 같은데 아무튼, 내가 아주 아주 꼬꼬마였을 때 완행 시외버스 타고 시골에 가던 길이었다. 추석이었나 설이었나, 아무튼.
좌석번호 같은 건 따로 없고 앉은 사람 선 사람이 마구 뒤엉켜 있다가 무조건 자리가 나면 앉는 사람이 장땡인 그런 옛날 버스. 네 시간쯤 가야 했을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 복잡한 와중에 누군가 내렸고 나는 재빨리 자리를 맡고 그녀를 불렀다. “엄마! 여기!”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엄마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내 옆에 서 있던 아기 업은 아줌마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아줌마, 여기 앉아요.
아마 엄마는, 나나 오빠가 아가였을 때 우리를 업고 시외버스를 탔던 그 때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자리 같은 건 양보해 주지 않았겠지.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환갑이 넘은 연세에도 내 배낭조차 못 들게 할 정도로 자식 새끼 끔찍하게 여기는 그 성정에 비추어 보면 대체 어디에 저런 마음이 숨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나도 그때 완전 어렸었다니깐?!

알 수 없는 사람 2
그 댁 담당 택배기사님은 더 바쁘더라도 외진 집에 택배 하나 더 배달하고 수수료 받는 걸 선호할까, 아니면 어차피 대목이니 하나쯤 덜 배달하고 1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는 걸 선호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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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19:41 2017/01/3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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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소회

첫 번째 직장은, 소규모 사기업의 전형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야근하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열심히 욕하면서 다녔지만 아직도 석사과정 학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돈을 모을 수 있게 해 준 데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다.

두 번째 직장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뜻이 맞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NGO라고 부르는 곳.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은, 부당한 일이 벌어졌을 때 거리로 나가 그 부당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것이 이 일의 가장 좋은 점이라고 말했다. 나는 몇 년이 지나서야 그의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통찰력 있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세 번째 직장은… 이 블로그 어딘가에도 있을 텐데, 이소라의 “curse”를 주문처럼 외고 다녔던 곳이다. 여기까지만.

네 번째 직장은 첫 번째 직장이었다. 세 번째 직장에서 학을 뗀 나는 다시는 니네랑 안 놀아! 하는 심정으로, 마침 와 달라고 손짓하던 첫 번째 직장에 다시 들어갔다. 내 가치관 따위는 토끼 간처럼 숨겨두고, 다시 열심히 돈만 벌면 되었다. 나의 역량은 여전했고 나는 예전처럼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으나 결국 사장의 “장애자”라는 말을 들어 넘기지 못해 회사를 박차고 나왔으니, 내 간은 집에 얌전히 붙어 있는 걸론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섯 번째 직장은, 네 번째 직장을 잃고 몇 달 논 뒤 어렵게 잡은 직장이었으므로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다녔다. 아침마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1년 단위 비정규직이라는 것도, 네 번째 직장 월급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수입이라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대상은 내게 적대적이었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은 한없이 우호적이었다. 이 시기가 내 평생의 직장생활 중 가장 평온한 시기로 기억될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평온한 시간은 팔할이, 나의 직속상사 덕분이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내 생에 그런 상사와 일하는 호사는 오지 않을 것이다.

여섯 번째, 새로 얻은 직장에서 맡은 업무는, 아주 적대적인 환경에서, 나의 입장을 설득하고, 의지를 관철해야 하는 일이다. 사방이 ‘적’이다. 아직 일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출근 2주 만에 벌써 관둘지 말지를 저울질하고 있다. 아무도 떠민 사람 없는데 혼자서 뛰쳐나와 놓고는.

 ...일이 많을 건 겁나지 않은데, 일이 재미 없을까 봐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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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20:50 2016/12/2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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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이야기
5월 17일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잔인하게 피살당했다. 범인은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해서’라는 이유를 남겼으나 경찰에 따르면 그것은 정신질환에 따른 피해망상의 결과라고 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를 굳이 많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 얘기는 여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캐나다 퀘벡 주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공과대학이다. 1989년 12월 6일 오후 마크 르팽이라는 남학생이 총기를 들고 수업 중인 교실에 들어와 위협한다. 그는 남학생은 모두 내보내고 여학생들만 구석으로 몰아넣은 후 차례로 쏘아 죽였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한 여학생의 협상시도도 소용없었다. 곧이어 그는 식당과 다른 강의실로 장소를 옮겨 총기를 난사했고, 그날 그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모두 열네 명, 모두 여성이었다. 그녀들이 살해당한 까닭은 그들이 공대에 다니는 여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감히’ 남자들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죄’.

그는 평소 페미니스트를 죽이고 싶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후 ‘개인적 고통’을 토로한 메모가 발견되었으나 이 사건은 결국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되었고(그렇게 되기까지 페미니스트들의 많은 노력이 있었고), 사건이 일어난 12월 6일은 여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되어 해마다 기념식이 열리고, 기념식에서는 여성폭력 현황이 발표되고, 총리는 성명을 낸다. 괜히 ‘선진국’이 아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한편 “여성과 광기”로 유명한 필리스 체슬러가 “죽이고 싶은 여자가 되라(원제: Letters to a Young Feminist)”라는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는데, 여기서 ‘죽이고 싶은 여자’가 바로 폴리테크닉 대학의 희생자를 가리킨다. 우리 모두에겐 그가 죽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여자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그녀는 역설한다. (읽은지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위에 링크한 기사에 따르면 안드레아 드워킨이 한 말이라고 한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체슬러가 드워킨을 인용한 것인지도.) 그 책을 읽은 후로 나 자신에게 가끔 묻는다. 나는 그가 죽이고 싶어 했던 그런 여자가 되어 가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책 이야기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아주 훌륭한 책이 있다. 일본 정신장애인 공동체를 소개한 책인데, 개인적으로는 내 성격이 극단적으로 이상해서 이것이 정신장애인 걸까 고민했을 때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라는 큰 위안을 주었던 책이다. 그 책을 찬찬히 읽다 보면 정신장애에 대한 많은 편견을 깰 수 있다. 정신장애인들의 범죄율이 몹시 낮다는 사실, 그들 대부분은 폭력성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무엇보다 그들이나 비장애인이나 그저 주어진 삶을 치열히 사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사실... 지금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들에게 필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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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08:00 2016/05/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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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통성명도 하고 얘기도 나눴던 땡땡이는 개강 첫날 못 알아볼 만큼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하고 왔다. 그래서 예의 차리느라 한마디 했다. "어머, 너 땡땡이니? 못 알아보겠다, 얘."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은 무(無)였다. 눈을 약간 치뜬 걸 반응이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꽤 오랫동안 나는 그 아이가 나 같은 못생긴 시골뜨기가 말을 건 게 불쾌했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스무 살 나의 세상에는 대체 만났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그의 그런 뜨악한 반응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단언컨대 그 작은 사건은 내가 대학에서 삐뚤어지게 된 아주 사소한 계기가 되었다. 아 물론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그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좀 심한 경우도 있었다. 밀레니엄을 전후해 '아이러브스쿨'이 흥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본인의 성향을 미처 깨닫지 못한 쥔장(그러니까, 본인의 성향을 아는 지금은 카카오톡도 안 한다는 정도로만 얘기해둔다)은 한 친구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그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왔다가 6학년인가 중학교 1학년인가에 갑자기 다시 서울로 전학을 가버린 친구로서, 몇 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제법 잘 붙어 다녔던 남자애였다. 아무튼, 흔치 않은 이름이라(젠장, 지금도 기억 나네) 그를 아이러브스쿨에서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냉큼 쪽지를 보냈다. 안녕, 나야. 잘 지냈니? 그리고 며칠 후 도착한 회신에는 미안하지만 누군지... 그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본인이 기억하는 건 땡땡(나 아니다)이랑 땡땡(또 나 아니다)이...지만 어쨌든 이걸 계기로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나 하는 헛소리가 적혀 있었다. 아 네, 그러시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가장 최근에는 이전 글에 적은 선배 때문에 연락한 사람이었는데, 아 또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선배의 초중고대 동기이자 20년 동안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사람으로 당연히 대학 이후 모임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으며, 심지어 그의 동생 결혼식에도 참석한 사이(물론 동생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오셔서이지만)다. 그런데 세상에 메일을 보냈더니 뭐라? 누군지 잘 모르겠다더니 아, 땡땡형 동생인가? 한다. 아 예, 땡땡형 동생 맞습니다, 맞고요.

이건 대체 내 기억력이 너무 좋은 게 문제인가, 그들이 모자라는 게 문제...라기엔 다들 제도권 교육 열심히 받고 밤낮으로 공부해서 빵빵한 학벌들이라는... 아 수업시간에 배운 거 외우느라 다른 게 머리에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인가. 그렇담 내 머리엔 왜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을 제외한 온갖 것들이 들어차 있는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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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3 13:35 2016/03/2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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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초등학교 졸업 전부터 나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어느 학교에나 특출나게 공부도 잘하면서 온갖 학생활동도 잘하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니까. 그에게는 그만큼이나 예쁘고 공부 잘하는 여동생까지 있어서 그들 남매는 모두 학교에서 유명했고, 나 역시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그가 나를 알게 된 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이다. 다른 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고등학교 동문 모임(속칭 쪼인트 동문회)에서 나는 비로소 그와 인사를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를 만나는 건 늘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사람을 ‘즐거움’으로 기억하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나 그는 그 명석함에 어울리지 않게 성격까지 좋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만나본 그 학교 출신 중 거의 유일하게,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혹시 여기까지 읽고 똑똑함을 대학에 따라 나눈다고 오해할 분을 위한 첨언: 그의 학교는 관악구에 있는 국립대였다.) 게다가 그는 좋지 않은 이야기도 긍정적으로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만나 얘기하고 노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군대에 간 그는 종종 편지도 보내왔다. 한창 박홍 목사의 선동이 유행할 때라, 학과 이름 때문에 주사파로 오인 받은 이야기, 포에 손가락을 다친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기억하는 한 유일하게, 내게 군대 면회라는 걸 경험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구러 우리는 각자 졸업을 했고 취업도 했다. 그의 명함을 받아 챙긴 기억이 있으니 그래도 서른 즈음까지는 연락을 했었나 보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고,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며 나는 아는 사람도 없는 그 결혼식에 혼자 씩씩하게 다녀왔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는 딱히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려 애쓰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각자의 삶을 살았고, 당연한 수순으로 연락은 끊기게 되었다. 한두 번 생각이 날 때면 잘 살겠거니, 잘 살아주겠거니 했을 뿐.

지난 주 한 모임에 갔다가 나는 우연히 그와 같은 회사를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이 회사가 맞던가? 그는 여전히 잘 사나? 싶어 그의 회사명과 이름을 구글에 입력해 보았고, 검색 결과는... 이미 몇 년 지나버린 그의 부고를 전하고 있었다. 어렵게 수소문해 들은 바, 사고라 했다.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그의 시간은, 내가 그의 부재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그곳에 멈춰 있고, 나는 이미 그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몇 년째 살고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를 만나 가슴이 떨려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알아야 했던 일을 당시에 알지 못했던 데 대한 안타까움일까. 남편에 이어 아들마저 먼저 보내게 돼 버린 그의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감정이입일까. 곰곰 생각하다 사실 그를 기억하면서 따라오는 키워드는 즐거움이 아니라 짠함, 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 했는데. 그러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오래 오래 사는 것과 반드시 같지는 않으므로. 그의 생은 비록 짧았으나 충만하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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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16:34 2016/03/0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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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아주 오랫동안 간직(?)해온, 남모르는 통증이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심대한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 다른 이유로 병원에 갔다가 생각나면 의사에게 물어보는 식이었다. 혹 여기가 아픈 게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각기 다른 그들은 나의 통증을 의심했다. 아프긴 뭐가 아파. 그럴 리가. 엄살 부리지 마세요.

고통은 오롯이 나만의 것. 공유되지 않는다.
나눌 수 없으므로 그들은 나의 고통을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므로 믿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만난 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프다고? 이렇게 거즈로만 살짝 눌렀는데도?
그러나 그나마 그는 '안 아픈데 제가 왜 아프다고 하겠습니까'라는 나의 반문에 처음으로 귀를 기울여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나의 통증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가 알려준 병명으로 검색을 해 보니 오오, 많지는 않지만 나의 증세와 일치하는 글들이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인은 불명, 따라서 치료법도 불명.

그러나 이름을 갖게 되자 비로소 나의 고통은 실재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나을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 아직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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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8 14:14 2016/01/0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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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다른 모든 건 이해해도 아래 두 종류의 사람과는 절대 사귈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름이 촌스러운 사람

'촌스럽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긴 할 텐데, 어쨌든 나는 매일 매일 부를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마음에 들 수가 있겠냐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촌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된 게 본인의 탓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아 미안. 난 안 되겠다. 그렇다고 딱히 선호하는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고, 들었을 때 마음에 드는 이름과 그렇지 않은 이름이 직관적으로 나뉜다. 솔직히 '그분'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음... 새삼스레 그분의 어머님께 감사를. (그런데 매일 매일 부르는 이름이 땡땡씨가 아니라 '앤님'이라는 건 함정;)


기본적인 맞춤법이 안 되는 사람

알고 있다. 많은 여자들이 이거 안 되는 사람과 헤어질까 말까 고민한다는 걸. '모든 게 숲으로 돌아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과의 연애라니, 이름이 촌스러운 사람과의 연애보다 끔찍하다. 아직도 나로서는 왜 틀리는지 알 수 없는 돼요-되요 같은 걸 틀리는 사람과 진지한 얘기를 나눈다는 건, 내 생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나는 '꽤나'...를 '꾀나'라 쓰고, '젓가락'을 '젖가락'이라고, '일컫다'를 '일컽다'로 타이핑하는 사람과, 심지어 그 모든 것을 거슬려하지 않으면서, 10년이 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러고보면 어쩌면 그분의 이름이 칠복이나 태평이, 군포라고 했어도(해당 이름을 가지신 분들께는 죄송; 저랑 안 사귀시니 용서해 주세요) 상관없다 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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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16:43 2015/11/0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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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면접과 피면접을 경험했지만, 자고로 입사면접이라는 것은 쌍방간의 소통이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보통은 사측에서 이 사람이 우리 회사에 맞을지 어떨지 보는 자리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피면접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정말 다닐 만한 곳인가 아닌가, 면접을 통해 판단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본 면접은 참으로 실망스러웠는데, 나중에 까먹고 똑같은 짓을 또 당하겠다고 할지 몰라 스스로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첫째, 그게 뭐 그렇게 비밀이라고 면접위원이 몇 명인지도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자. 면접위원으로 보이는 00명 외에 앞에 앉아서 서류를 보다가도 문을 열어준다거나 진행자와 소통한다거나 하는 저 사람은 면접관인가 아닌가? 면접관인 것 같긴 한데 한 마디도 안 하는 저 사람은 면접관인가 아닌가?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어떤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 몇 명에게 평가 받았는지 모른다. 그 사람들이 회사 내부 사람이었는지 관계자인지 어쩐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이 문제의식이 턱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책상 앞에 명패를 놓고 있는 면접관을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그러나 면접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조직이 안 그래도 약자일 수밖에 없는 지원자에게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 내지 예의라 생각한다. 내가 면접관의 위치에 있을 때 나는 늘 지원자에게 저는 누구이고 옆의 이 사람은 누구입니다, 당신이 만약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저와는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고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등의 정보를 주었다. 왜 나만 소개하게 하고 당신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 왜 떨어뜨렸냐고 연락할까 봐 무서워서? 사적으로 연락해서 청탁할까 봐? 그게 걱정이라면 최소한 '면접위원'이라고 한다거나 조직 내·외의 대략적인 직책을 쓴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안 찾는 거겠지. 이쪽에서는 학교에서 경력, 성격까지, 모든 패를 갖고 있으면서 상대에게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글쎄, 면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을 빼고 생각해보자. 일방에서만 상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그런 사이에 '대화'가 가능한가? 보통 그런 상황에서 서로 오가는 말들은 '취조'라 부르는 것 같던데.

둘째, 아아 자기소개로 시작해서 경력소개로 끝날 줄이야. 들어가자마자 자기소개 해 보라는 말에서부터 당황해버린 건, 면접의 '루틴'을 무시한 내 잘못. 인정. 하지만 지원자가 낸 서류는 좀 읽고들 오셔야죠. 이거야 모든 조직 모든 면접관의 공통점인 것 같긴 하다만, 왜 서류에 있는 거 또 물어보세요. 시간 안 아까우세요? 하다못해 자기소개를 읽고 '더' 궁금했던 걸 물어보던가, 직무수행계획서를 구체화해 보라고 하던가. 00를 했었네요? 어땠어요? 라던가. 최소한 이 자리에서 서류 처음 봤다는 거 티 내는 질문은 삼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셋째, 이게 가장 의심스럽고 불쾌한 부분인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체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들었다. 우선, 나로서는 이미 정체를 알고 있던 '경쟁자'가 '객관적으로' 나보다 더 적임자로 보였을 거란 데는 동의.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그럼 더 적합해 보이는 사람만 데리고 면접을 보시지 대체 나는 왜 불렀을까 하는 거다. 현장 경력이 없는 게 걱정이라고? 그거 이미 서류에 다 있는 내용이잖아. 그럼 그때 떨어뜨리지 뭐 하러 불러서까지 물어보나. 그 자리에서 "아 예, 그러고 보니 저는 정말 현장 경력이 없어서 안 되겠군요. 안녕히 계십쇼." 이러고 나갈 줄 알고? 대놓고 '너 이런 경력 없잖아? 이런 업무 해본 적 없잖아? 어떡할 거야?' 하는 질문들의 연속이다 보니 이미 서류에서 반 이상 결정이 난 상태이고 난 그저 들러리 선 느낌이 들었다. 서류와 면접이 세트라서 어쩔 수 없이 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떨어뜨릴 기회는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 어차피 채용하지도 않을 사람, 꼬박 이틀이라는 물리적 시간과, 준비와 기다림에 들어간 계산할 수 없는 다른 시간과 열정을 쏟게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 비록 니가 불리하다만 할 수만 있다면 그걸 면접에서 뒤집어 엎어보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겠지. 아 예,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자기소개 같은 진부한 질문들 앞에서 말이죠. 광고기획사 신입 지원자들처럼 퍼포먼스라도 준비할 걸 그랬나요.

그들 내부에서야 물론 정당한 절차와 방식을 거쳐 적절한 방식으로 채용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감사 같은 데서 지적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차와 형식 등등에 얽매인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람을 살피는 일 따위는 잊은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 회사에 대한 기대가 과했다는 거. 대놓고 학력, 학벌, 나이차별 안 한다는 사실에 내가 너무 흥분했었다. 이것도 나의 잘못. 인정. 그러나 이제 알았으니, 나도 사양. 그리고 '정신승리'라 비웃을지 몰라도, 나 같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아쉬워해야 할 주체가 나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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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6 11:24 2015/06/2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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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의 모친상에 갔다가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주장했던 다른 녀석의 근황을 들었다. 업계의 거물이 되어 있단 말에 기분이 묘했다. 20년쯤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녀석은 말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전문 자격증을 따서 부모님이 계시는 작은 도시에 사무실을 내고 주말이면 농삿일을 거들며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해서 그 녀석을 간혹 떠올릴 때 함께 나타나는 이미지는 나락을 볕에 내어 말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곳에서 그리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업계의 거물이라니.

그 소식을 듣고 행복하니? 묻고 싶었다. 행복하지 않다고 한들 내가 뭐 해줄 것도 아니면서 아니 물을 길도 없으면서 이건 무슨 선입견인지, 어째 소원을 이루지 못한 그는 행복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글쎄, 어쩌면 그건 바쁘고 돈 많고 '성공'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아니다 좀 더 솔직히, 행복하지 않길 바라는, 선입견 때문일 수도.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20년쯤 전의 나는 마흔 무렵의 내가 이렇게 살고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는 데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그렇지만 나는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데에도. 어쩌면 그도 아마 그럴 것이다. 20년 전에는 짐작도 못했던 삶을 살고 있지만 행복할 것이다. 서로를 위해 그렇게 믿자.

연이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가 나를 좋아했단 걸 그 당시에 알았다면, 그리고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그와 사귀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는 지금쯤 업계의 거물의 '사모님'이 되어 있었을까? 아아 이번 건 좀 더 쉽다. 지금껏 살면서 주류와 함께 흘러가거나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사람에게 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사회적으로 매우 알아주는 머리와 알아주는 학벌을 갖고 있었지만 그뿐. 그러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겠지만, 이제 와 성공한 그 거물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나의 선택은 언제나 내 편에 서서 영감을 주는 '그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인 것이다. 나는 이편이 더 행복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가 어쩔 수 없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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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6 15:47 2015/05/0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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