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Next »

우연찮게 굴러들어온 아르바이트는, 내가 자신 있어 하는 입력작업이었다. 수첩을 보고 이름과 주소, 우편번호, 전화번호를 엑셀에 입력하는 일로, 건당 몇 십 원을 받기로 했던 것 같다.

땡땡고등학교(땡땡은 익명성 때문이 아니라 학교 이름이 진짜 생각 안 나서다; 전북 땡땡지역-이건 기억 나지만 안 쓰는 거다-이었는데;) 동문수첩은 현 거주지인가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되어 있었고, 각 장(章, chapter)의 맨 앞에는 해당 지역 대표자가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맨 앞에 나온 사람은 당연히 그 뒤를 따르는 리스트에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중복을 어찌한담. 그렇다고 그들을 일일이 외워 건너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몇 번은 일일이 찾아 고쳤지만 중복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쭉쭉 입력했다. Ctrl+드래그로 복사를, Alt+엔터로 줄 바꿈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때, 알바 중개인인 지인에게 배웠다. 그래도 프로그램 사용이 익숙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치고 또 다시 치고. 그때도 그랬지만, 요즘도 가끔 생각한다. 근데 그건 대체 어디다 쓰려는 거였을까. 아무튼,

마침내 입력이 완성되어 결과물을 전해주러 모처로 찾아갔다. 애석하게도 그 지역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몹시 허름한 건물에서 한 여성이 나와 디스켓을 받아갔던 기억이 난다. 일 계속해 줄 수 있냐는 말에 감사한 마음으로 끄덕끄덕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여성은 생각보다 신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주겠다던 오만여 원의 아르바이트료는 입금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독촉전화하길 수 차례. 제법 화를 내고서야 아르바이트료는 겨우 입금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더 이상의 의뢰는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10여 년 전에 이미 엑셀을 다루기 시작했구나(현재 프로그램 사용능력과는 별개다) 하는 생각이 스치며 잠시잠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러다 불현듯, 스치듯 얻은 깨달음. …… 10여 년 전 나는, 남의 개인정보를 입력해 팔아먹는 집단에 일조했었구나. ……

땡땡고등학교 동문들께 삼가 죄송하다는 말씀 아뢴다. 꾸벅.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09/01/08 15:05 2009/01/08 15:05
, , ,
Response
No Trackback , 5 Comments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7

장경섭에게 바퀴벌레가 있었다면 내겐 '다리마니 벌레(이건 내가 부르는 이름이고, 정식 이름은 '집그리마'라고 한다)'가 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나타나는 이 벌레를, 처음에는 소스라치면서 약으로 잡았다가, 혐오스런 모습(그것도 누구의 눈으로 본 '혐오'란 말인가!) 말고는 별다른 해도 없다기에 웬만하면, 그러니까 내 영역을 많이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보아 넘기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다리마니 벌레란:
세○코 게시판에 가서 찾아보니(질문이 재미없어서인지, 답변이 예전만큼 재미있지는 않은 듯하다), 원래 한국에는 없던 벌레로, 전후 미국에서 들여온 짐에 숨어 들어온 것들이 이렇게 번창한 것 같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물품을 공수해 올 만한 집이면 당연히 좀 있이 사는 집이었을 테고, '돈벌레'라는 별칭은 그렇게 붙은 게 아닌가 싶다고. 백과사전을 뒤져보면,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따뜻하고 음식찌꺼기(혹은 잔 벌레들)가 있는 집구석으로 모여든다는데, 우리 집에는 사시사철 상주한다.

아무튼, 요 녀석들이 겨울 들어 안 보인다 싶었다. 벌레마저 못 사는 환경이 되었단 말인가 자책(응?)하던 무렵, 침대 옆쪽 벽과 바닥장판 사이로 벌어진 틈에서 나는 그 녀석의 무수한 다리 끝을 보아버렸다. 벌레 한 마리 숨어들기 딱 좋은 공간이 거기 있었는데, 녀석은 거기서 겨울을 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너도 살아야지. 거기서나마 겨울을 나렴. 그렇게 우리의 공식적인 동거가 시작되었다.

외로워서 '그'와의 동거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내게 외로움은 익숙하고 편한 것이다. 다만 나는 점점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벌레마저 아낄 만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단지 나와 생김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를 뿐, 내게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집 계약서에 내 도장 찍었으니 너희 집은 아니라고 얘기할 권리가 내게 있을까 하는 의문. 살면 살수록 사는 게 조금은 편해질 줄 알았는데 왜 살면 살수록 어렵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지.

다리마니 벌레는 보통 내가 없을 때 집안을 누비다가 문을 열고 불을 켜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가는데, 이 녀석은 내 눈을 거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그 자리에 딱 그만큼만 다리를 내놓고 있는 녀석이 뭘 먹고 사는지, 밖으로, 그러니까 내 방으로 나오기는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CCTV도 없으니 궁금함은 궁금함으로 놔둘밖에. 그저 나는 밤마다 슬쩍 한 번 쳐다보고 오늘도 안녕? 뭘 좀 먹긴 했니? 바나나껍질 안 치우고 놔뒀는데 먹은 거야? 아니면 방바닥에 떨어진 살비듬으로 한 끼 때웠니? 혼자서 웅얼웅얼.

여기서 다시 잠깐, 그 녀석이 우렁각시라는 설에 대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집안이 조금씩 더 지저분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다른 종류의 우렁각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라.

그런데 오늘,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 불을 켜니 아니 이런, 그 녀석이 다른 쪽 벽을 타고 있는 게 아닌가. 다리가 좀 더 늘어진 모습을 보고 장판 사이 거주자가 아닌 걸 알았어야 했는데, 다른 녀석이 있을 리 없다는 막연한 고집(은 역시 위험하다-), 멀리서 입으로 후후 불어도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대담함(그건 다리마니 벌레의 천성이 아니라구!), 심지어 벽을 툭툭 쳐도 끄떡 않는 배짱은 결국 오랜만에 레○드를 손에 들게 하였다. 계약을 어긴 건 너라구. 내가 있을 땐 장판에서 안 나오기로 했잖아. 취익~ 췩~

다리마니 벌레든 바퀴벌레든, 벌레를 죽일 때는 레○드를 익사할 정도로 흠뻑 뿌린다. 바퀴벌레는 얼른 죽여 없애고 싶어서. 다리마니 벌레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단축시켜 주기 위해서. 물론 죽는 모습을 직면할 수는 없으니 실눈은 필수.

벽지를 흠뻑 적신 레○드를 맞고 땅에 떨어진 녀석을 보고서야 혹시 장판 거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장판 사이를 힐끗 보니 아뿔싸. 변함없이 아주 조금 드러나 있는 다리들. …… 우리는 여기까지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 동료를 죽였다고 밤에 나를 물어버릴지도 몰라. 혹시 좀 전에 그 녀석이랑 응응해서 알이라도 깐 거 아냐? 그럼 집은 다리마니 벌레들의 천국? 으아악.

취익~ 췩~
그냥 거기서 생을 마감했으면 좋으련만, 장판 사이에 뿌리니 참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 얼른 가렴. 취익~

안녕.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09/01/07 21:47 2009/01/07 21:47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6

시간의 가치

구랍(난 이 말이 왠지 있어 보이더라~) 31일이었다. 한해 마지막 날이라 평소 다니던 시간에 학원(20:00~21:40)을 가면 돌아오는 길을 보장할 수 없을 것 같아 이른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다. 낮 열두 시 수업이 있었던 기억이 나서 확인차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 선생님 수업 몇 시에 있나요?"
"원래 몇 시 타임이신데요?"
"여덟 시요."
"네 시, 여섯 시에 수업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열두 시 수업은 없구나 싶어 집에서 뒹굴뒹굴 하다가 네 시에 학원에 가보니 어라? 그 시간엔 수업이 없다는 거다. 강의실 가다 마주친, 전에 수업 들었던 선생님이 그러기에 로비로 내려와 시간표와 강의실을 아무리 뒤져봐도 땡땡땡 선생님의 강의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땡땡땡한 경우가 있나. 격분하여 월말이라 강의접수로 바쁜 안내 데스크로 쫓아갔다.
열두 시에 오려고 했는데 수업 없다고 해서 네 시에 왔는데 네 시에 수업이 없다니, 이런 땡땡땡한 일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전화 받은 직원 불러 와라. 직원 못 찾겠으면 매니저 불러와라. 억울해서 그냥은 못 간다. 옥신각신하고 있으려니까 옆자리 직원이 다가온다. 좀 더 높은 급인 모양. 여차저차, 두 번 엿먹인 거나 마찬가지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직원, 얼굴이 빨개져서 이해하겠다, 그럼 자기네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냐 한다.

막힌 건 거기서부터였다. 책임자에게 내 울분을 토해낼 생각은 했지만 그걸로 뭔가를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럴 땐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직원을 데려와라,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겠다 해서 잠시 뒤 만나게 된 직원은 죄송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다른 달 시간표와 착각했었노라며.

이제 두 얼굴이 내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묻고 있었다. 머릿속을 지나는 생각들. 어차피 여섯 시 수업까지 이 근처에 있어야 하니까 커피나 한 잔 사라고 해? 아니지, 이건 1회분 강의를 못 듣는 셈이니까 1/10 환불을 요구해? 아니 그렇다고 아예 수업을 못 듣게 된 건 아닌데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 그렇지만 애먼 내 시간과 하루 스케줄이 엉망진창 돼버린 걸. 이건 한 달 수강료 무료로도 보상할 수 없는 거 아냐? 내 월급을 시급으로 쪼개서 놓쳐버린 100분(혹은 200분) 동안 일했더라면 벌 수 있었을 돈을 물어내라고 해? 나 월급 얼마 안 되잖아? 등등등.

결국 나는 직원의 눈을 마주치며, 주의를 주겠다는 말을 믿을 수 없어 직접 얼굴 보고 확인하겠다는 마음에 보고자 했던 것이라며, 앞으로 그런 실수 없길 바란다는 말을 또박또박 일러두었다. 봉변에서 벗어나게 된 두 직원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내 고민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가치는 얼마일까. 시간은 어떻게 돈으로 환산되는 것일까. 돈, 으로밖에 환산이 안 되는 걸까. 시간, 으로도 보상이 가능하다면 나는 그 허우대 멀쩡한 직원에게 데이트라도 신청했었어야 하는 걸까. 참 어려운 문제다. 쩝.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09/01/05 23:11 2009/01/05 23:11
,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5

요이~ 땅!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etcetera

2008/12/26 19:07 2008/12/26 19:07
Response
No Trackback , 46 Comments
RSS :
http://etceteras.pe.kr/rss/response/1

«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Next »

블로그 이미지

투덜투덜

- etcetera

Archives

Authors

  1. etcetera

Calendar

«   2018/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1143656
Today:
491
Yesterday:
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