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은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장 금기시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에도, 답할 수 없는 것들에도 아이들은 무차별적으로 왜냐고 묻는다. 그러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는다. 어쩌면 '왜'라는 질문을 덜하게 되는 과정이, 속칭 '어른이 되는'인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들과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여전히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왜'냐고 묻는다는 것. 그런 점에서 어쩌면 나는 여전히 아이인지도. 그리고 더 이상 '성장'할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죽는 그날까지 '아이'일 것이다. 그런 '아이'의 눈으로 보아 더욱 즐거웠던 책, <제이넵의 비밀편지>.

<생사불명 야샤르>가 어른 버전 네신표 소설이었다면, <제이넵의 비밀편지>는 아이 버전 네신표 소설이다. 제이넵과 아흐멧, 가상의 두 아이가 주고받는 편지에는, 어릴 때 내가 궁금해 했던, 그러니까 납득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1등만 했어'라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아빠, '애국'하기 위해 저개발 지역으로 가 봉사하라는 연설을 할 때는 언제고 자신의 아들이 그 '오지'로 발령났다며 화내는 저명 언론인, 자신의 아이는 모두 대단한 천재라며 자랑을 일삼는 부모, 늘 사장 욕을 하면서도 사장 아들과의 혼사를 성사시키려는 노동자, 학예회에서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쓴 어른들의 연극을 강요하는 선생님...

아이를 가장한 어른의 시선으로 쓴 작품이라는 이유로 이것이 아이들의 '진짜'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은 버리자. 여기 나오는 어른들과, 어릴 적 그 어른들을 보며 내가 느꼈던 부조리함은 이 아이들이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한편으로 재미있는 건, 그러니까 이 책을 더욱 세련되게 만드는 건, 이 아이들은 절대 어른들을 직접적으로 비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자신에게 벌어진 에피소드를 진지하게 주고받을 뿐이다. 그 안에서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는 건 어른들이고).

하지만 이 책이 무조건 시니컬하고 또 무조건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어른'이기에 느끼는 것일 텐데, 이제 나는 어른이 '완벽한 사람'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책에 등장하는 어른들에게 연민 비슷한 감정도 가지게 된다. 이건 내가 어릴 때는 몰랐을 감정. 실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른들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겠지.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 작가의 이 책을 일독한 후 결국 내게 남은 기운은 '따뜻함'이다(하긴, 나는 모든 풍자문학의 기저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사람이긴 하다).

그러니 감히 권하건대, 아이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어른들에게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이 책을, 어른인 당신도, 아이인 당신도, 부디 한 번씩 읽어보시기 바란다. 초판이 출간된 지 4,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읽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웬만하면 작가의 말과 옮긴이의 글도 빼먹지 말고!

* 덧붙임 *
퀴즈. 아래 인용문에서 역주(譯註)를 표시하시오.

"메틴, 낭비하지 말랬지? 한 방울 두 방울 모여 호수가 되는거야 우리나라 속담 ‘티끌 모아 태산’에 해당되는 터키의 속담. 매일 이렇게 한 장만 낭비해도 1년이면 공책 몇 권을 낭비하게 되는 줄 아니? 아깝지도 않니?"

종이 버전은 이렇지 않을 것 같은데, 이북으로 읽을 때는 처음 한두 개, 끝의 한두 개 빼고는('제대로' 처리된 역주는 본문보다 더 작은 크기에 갈색으로 표시되었다) 모두 본문과 동일한 색깔과 크기로 처리된 이 역주가 책 읽기에 몰입하는 데 몹시 방해된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사실 역주 개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건 아니니까), 나처럼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독자에게는 충분히 거슬리는 수준. 그러니 '사서' 읽으려는 분들은 이를 감안하시라. 이북 시장,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아직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겠지만.

<제이넵의 비밀편지>
아지즈 네신 지음 / 이난아 옮김 / 푸른숲 펴냄 /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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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7 10:05 2011/03/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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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즈 네신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생사불명 야샤르>가 나왔을 때였다. 야샤르는 참 좋아서 잘 안 쓰는 독후감까지 썼었는데, 그 후 이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는 싶었지만 마땅찮던 차 별 기대 없이 펼쳐본 책이 바로 이 <개가 남긴 한마디>이다. 별 기대 없이 오프라인 서점에서 읽다가 아쉬움에 쩝쩝 덮어두고 나왔던 이 책을 어느 고마운 분께서 사주셨고, 덕분에 감사히 일독한 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창고에 모셔둔 참.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이 거의 없는 요즘이지만, 이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어젯밤 둘러본 땡땡성당 전자책도서관과 아이패드 때문이다. 입사담당자에게 어필하는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이니, 네이티브처럼 영어 말하는 법이니 하는 실용서가 신간의 절대다수인 여느 도서관과 달리 이 도서관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았는지 제법 많은 '푸른숲'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었다. 아직 전자책 도서관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점이라 보유권수가 1권뿐이라도 대부분 대출이 가능한 상황. 얏호 하며 리스트를 살피다 다시금 내 눈에 띈 게 바로 이 책이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당장 대출. 당장 이독.

풍자소설에 열광하는 내게 이 책은 적당한 재미와 적당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처음 읽었을 땐 대체 이게 어떤 상황을 비꼰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이야기들도 한 번 더 읽으면서 분명해졌고, 출판사가 왜 이 책의 독자를 하필(?) '청소년'으로 상정했는지도 헤아리게 되었다.

나는 바담풍이라 해도 너는 바람풍이라 하라는 부모(유독 '인간'의 부모만 그러하다!)의 이야기, 국세청으로 환생한 도둑고양이 이야기, 뇌물 받는 관리들의 이야기(세어보진 않았지만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주제는 왕과 관리를 비롯한 공공기관, 그리고 아이 키우는 부모가 아닌가 싶다)에 깔깔대다 보면 조금은 가슴이 뻐근해지는데, 그건 아마 우리들 중 누구도 작가가 비판하는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 아니 심지어 당신도 나도 때로는 이 체제유지의 공모자이기 때문일 테지.

뭐 어쨌든, 산책하는 마음으로 스윽 읽기 좋은 책.

아참, 내용 말고 형식, 그러니까 이북에 대해서라면, 며칠 전 혹평한 책보다는 훨씬 낫다. 띄어쓰기가 간혹 이상하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종이책에 수록되었던 그림까지 함께 넣어 읽는 재미를 높였다. 그림은 무조건 새 페이지에서 시작하도록 되어 있어서 가끔 문단 중간 글이 끊기고 아래쪽이 텅텅 비어서 깜짝 놀라게는 되지만, 이건 만드는 쪽에서 페이지를 일일이 지정할 수 없는 epub 포맷 자체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그 외 불규칙한 행간은 앱(북땡땡)의 오류인 듯하고. 역시 모든 이북이 내 참을성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가 남긴 한마디>
아지즈 네신 지음 / 이난아 옮김 / 이종균 그림 / 푸른숲 펴냄 /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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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5 23:14 2011/02/2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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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가 생겼고,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으로 이북(전자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글 책은 아직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결제수단이 한정되어 있어 많이 사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종이 대신 모니터를 보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인터땡땡 이북 카테고리에서 드디어 휴대폰 소액결제가 가능해졌을 때, 젠장,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구나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번 책 <대학로 좀비 습격 사건>은 내가 인터땡땡에서 돈 내고 '구입'한 세 번째 이북이다. 가격도 무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보다 비싼 5,000원!

뉴에이지 문학선이라는 생경한 소개글(편집장님, 책 소개글 참 좋더군요. 작품보다 오히려 책 소개가 더 훌륭해 보였다는 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지만요)도, 서점에서 먼저 보았다면 아마도 구입할 일 없었을 소재도, '블랙 코미디'를 의도했다고 하나 나와의 교감에는 실패한 책의 내용도, 다 이해할 수 있다. 나 이외의 누군가는 그 내용에 몹시 흡족해 했을 테고, 그것으로 책의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일 테니까. 그건 다만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정작 나를 분노케 한 것은 바로 책의 만듦새였다. 이북의 '만듦새'라니, 오오, 나도 내가 저런 단어 조합을 만들어 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으나 분명 내가 몇 개월 만에 텍스트 앱까지 다운 받아가며 블로그에 글을 올리게 한 건 분명 이 책의 만듦새다.

각 장(챕터)제목을 본문과 한치의 구분도 없이, 심지어는 띄어쓰기도 없이 본문 위에 대충 얹어놓은 모양새는, 무료로 다운 받아 읽은 <인형의 집을 나와서>보다 못했다. 그뿐이랴. 분명 하나인, 따라서 '한 줄'로 처리되어야 할 문장이 갑자기 줄바꿈 되면서 새로운 문단으로 시작하는지, 왜 그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시로 일어나서 글 읽기를 방해하는지. 혹시 '좀비'라는 '무서운' 소재를 가지고 쓴 무서운 소설에 너무 몰입하지 말라는 편집진의 배려인 걸까?

아마추어라도 보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운 교정교열은 또 어땠던가. 띄어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띄어쓰기에 자신없어 하는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거푸 나오는 '만신창이' 아닌 '망신창이'는 내가 어찌나 다 '망신'스럽던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책의 종이책은 어떤 모습일지. 이북 버전처럼 '망신창이'일까? 아님 그쪽은 그나마 '책'이라 불려도 좋을 만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부디 후자였으면 좋으련만. 안 그럼 그 때문에 잘려나간 나무들이 너무 불쌍해서 오늘밤 잠을 못 이룰 것 같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론, 역시나 이쪽 동네도 대형 출판사들의 발빠른 대응과 비교적 깔끔한 편집(epub가 깔끔해 봤자긴 하지만. 하긴 그래서 이 책에 더 화가 나는 거긴 하지만.)에는 못 당해내겠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박완서님의 책들은 벌써 이북으로 속속 제작되었고, 유명작가들의 책을 내는 유명 출판사는 이제 종이책 신간과 거의 동시에 이북도 발매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래도 부족한 편집일손과 자금력으로 그들과 똑같은 수준의 책을 만든다는 건, 군소출판사(이 책을 낸 곳이 군소 출판사인지는 모르겠다만. 다만 지금은 일반적인 추측 경로를 따를 뿐.)로서는 가랑이 찢어지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럴 때는 엉거주춤 가랑이 벌리고 있느니 잠깐 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이런 듣보잡 블로거한테 혹평이나 듣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장기적인 안목으로 천천히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그러나(대체 왜 자꾸 '그러나'로 문단을 시작하는 것이냐! 블로깅 안 하는 동안 접속사는 '그러나' 말고는 다 잊어버란 것이더냐!)어쩌면 이 책을 이북으로 구입한 게 더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산 맞춤법 가관인, 유명 출판사에서 낸 유명 번역가의 유명한 소설은 그래도 '책'이라고, 버리지도 못하고 다시 읽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책꽂이에 밀어넣어 두었는데 이 책은 그냥 '삭제'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물경 오천 원이면 밥이 한 낀데 쩝, 하는 탄식과 더불어.

그나저나 이북도 미리보기나 샘플 내려받기 좀 얼른 갖춰 주십쇼 쫌. 사고 싶은 책 있어도 번역 편집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구입 안 하고 있는 책이 한둘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문득 엄습하는 두려움. 혹시 내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수많은 이북 대부분이 이보다 못한 모양새인 것은 아닐까?...

<대학로 좀비 습격사건>
구현 지음 / 휴먼앤북스 펴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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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2 22:56 2011/02/2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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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이었다.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제법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평소 다니지 않던 길이라 거기 늘 계셨는지 아니면 그날만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눈에 띄었다. 드디어 만났다, 빅판(빅이슈 판매사원)!

일부러 후원은 못하더라도, 일부러 찾아가 사지는 못하더라도, 또 일부러 같이 팔아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마주치기까지 했는데 그냥 가진 못하겠더라.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괜히 혼자 반가운 척 하면서 "한 권 주세요" 했다. 왠지 뿌듯한 마음. 그냥 돈을 "준다"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대가로 "지불한다"고 생각하니 돈을 건네는 나도, 그걸 받는 빅판님도, 손들이 부끄럽지 않다.

(잠깐! <빅이슈>는 뭐고 '빅판'은 뭐냐고요? <빅이슈코리아> 블로그에 가 보시라~)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게 '읽기'보다 '기부'에 가까운 행위였던지라 막상 잡지를 펼쳐 볼 생각은 하지 않았더랬다. 이름도 좀 그래. '소셜 엔터테인먼트 매거진'이라니, 인터넷 연예기사 보고 말지 뭐, 이런 마음? 그런데 아침 출근길에 말똥말똥하게 떠진 눈이 '문제'였던 거라. 마침 가방에 들어 있길래 표지부터 훑어나간다. 값 3,000원이라는 문구 아래 "3,000원 가운데 1,600원이 홈리스에게 갑니다"고 쓰여 있다. 그날 내가 건넨 돈 중 3,200원(동행 것까지 두 권 샀다)이 빅판님에게 가고, 그 중 1,600원은 이분의 저금으로 쓰였겠구나야(빅판 수칙 열 번째가 "하루 수익의 50%는 저축합니다"더라. 이번 호 <빅이슈> 34쪽에 나와 있다). 내가 '후원'한 금액의 쓰임새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으니 더 좋다(잡지를 보면 판매실적까지 확인할 수 있다).

각설하고, 표지까지 합쳐 36쪽짜리 잡지 한 권이 이렇게나 알찰 수가 있나 싶다. 여보세요들, 아무리 사회적 기업에 선정되었다지만 본전은 뽑으시는가요들?

해외에서 시작한 잡지라 그런지 해외 <빅이슈>를 번역한 기사도 있고, 공짜로 <빅이슈> 표지모델을 몇 번이나 했다는 졸리 얘기도 있고, 국내 편집진이 기획하고 쓴 꼭지들도 있다. 그 내용이 특집(이번 호 특집은 "세계 5개 도시의 유행 통신"이다. 그 다섯 개가 뭐냐고? 사서 봅셔!), 스포츠, 영화, 음악, 카운슬링, 영어회화, 음식, 빅판 이야기, 그리고 땡땡이 좋아하는 스도쿠까지 망라할 정도니 내용은 굳이 말해 무엇하랴(사기 전에 내용이 정 궁금하면 저 위 <빅이슈코리아> 블로그에 가 보시라. 거기서도 이번 호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잡지'답게 술술 읽히는 건 물론. 고재열, 허지웅 등 나름 유명한 분들의 "재능기부"도 눈에 띄었다. 아유, "재능기부자"라고 쓰인 잡지를 받아보는 필자의 기분은 얼마나 좋을까. 지 이름 석 자 대도 아는 이 없을 쥔장의 시샘이다.

선입견을 완전히 깬 편집도 놀라웠다. 사실 '홈리스' 잡지라고 하면 사진 해상도도 엄청 떨어지고 본문은 오탈자투성이일 것 같고 그렇잖나. 물론 비싸게 파는 패션잡지 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기대 이상의 편집과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오탈자(여기서 '거의'라고 한 것은 내가 교정교열을 보기 위해 이 잡지를 꼼꼼히 읽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오타'는 하나도 없지만 '전혀 없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다), 참 마음에 든다. 청년 일자리 마련에도 기여한다더니, 이 청년들 일 참 잘하네.

뎅강, 또 각설하고, 당신이 누구건, 독자가 누구건, 이 잡지에 실린 기사 중 최소한 한 꼭지는 마음에 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든 그 한 꼭지는 최소 3,000원의 값어치를 해줄 것이다. 그러니 길을 가다 저 멀리 빅판님이 눈에 띄거들랑 망설이지 말고 한 권 사 읽으시라. 아이 참, 아니면 내가 3,000원 물어준다, 까짓!

<빅이슈코리아> No.2 (2010년 8월호)
거리의천사들 안기성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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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20:28 2010/08/1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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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책좀사서볼까하는데좋은책좀추천해주세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나 요새 보는 책은 뜨개질책뿐;;;"
"ㅋㅋ 뜨개질도책보고하나요"
"그럼 도안 보고 하쥐 ㅎㅎ"

아 난 왜 요즘 책도 안 읽고 뜨개질만 할까. 보는 책이라곤 왜 뜨개도안 책뿐일까. 불쌍한 리뷰 카테고리... 이렇게 자책하다 생각이 미쳤다. 뜨개질 책 리뷰 올리면 안 돼? 원래 인터넷서점 블로그 접고 나온 데는 별점 같은 거 매길 필요 없이 내 맘대로 내가 쓰고 싶은 책이든 논문이든 쪽글이든에 관해 아무 제약 없이 리뷰 쓰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잖아? 왜 안 돼? 그래서 쓰기로 했다. 뜨개질 책 리뷰!

"두고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인테리어 소품 DIY"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각종 인테리어 소품 도안으로 꽉 차 있다. 컵 홀더부터 바구니, 쟁반, 밸런스 커튼, 테이블 매트, 슬리퍼까지 제목만 보면 홀딱 넘어가게 생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뜨개질 책 몇 권 사서 살펴보고 내린 결론에 따르면, 원래 뜨개질 책이라는 게 도안을 알리고 책을 팔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저자가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파는 '실'을 판매하는 목적이 더 크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뜨개질 책도 펼쳐 보면 사람들이 많이 쓰는 실보다는 ㅇㅇ사니 xx사니 하는, 딱 그 가게에서만 파는 특정 실 이름을 재료로 해서 작품을 만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책에 나오는 이미지에 반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독특한 실을 찾게 되고, 저자(와 그 가게)는 당연히 책도 팔도 실도 팔고 일석이조의 이문을 남길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 책의 '그 실'은 바로 주트사다. 40여 개의 도안 중 30개 정도는 모두 주트사로 떠야 하는 소품이니 말 다했지.

주트(Jute)는 '황마'라는 뜻으로 여러 종류의 마 중 가장 질이 떨어져 자루나 마끈 등으로 사용되는 저급 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 모토히로 사에서(이렇게 말하니 뭐 좀 잘 아는 회사 같다만 사실 주트사 검색해 보다가 알았다) 황마(30%)와 아크릴(70%)을 섞어 만든 게 바로 주트사다. 이렇게 뜨개용 실로 탈피하면서 주트사 가격도 덩달아 치솟는다. 지은이가 운영하는 뜨개 사이트에서 확인한 바 주트사 가격은 25g에 무려 3,500원!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감이 안 온다면 청송에서 나오는 면콘사(무색) 한 콘(1kg 이상)이 12,500원이고 겨울철 쓰는 모사 100g짜리가 보통 5,000원 안팎(물론 비싸려면 한정 없이 비싸진다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물론 단가는 실 종류에 따라 다른 게 맞다. 가격을 단순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엄청 바가지를 씌워 파는 건 아닌 것 같은 게, 일본 본사 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25g 소매가가 4,000원 정도니까 워낙 이렇게 허걱스러운 실이려니, 가공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려니, 할 수밖에.

그러나 덕분에 이 책에 등장하는 '심플섬머러그' 한 장을 뜨려면 실값만 16만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고(완제품 사진이 있고 옆에 가격이 있길래 처음엔 완제품 가격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DIY 패키지;;;), 작은 바구니 하나 뜨는 것도 1~2만 원은 들여야 할 참이다. "두고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금전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뭐, 주트사가 부담스럽다면 좀 더 싼 실을 가지고 책에 나오는 도안을 응용해 볼 수는 있겠다(실제 청송 사이트 같은 데 들어가보면 여기 나오는 도안을 응용해서 짠 카페트 등을 볼 수 있다). 한데 이런 경우(사실 이건 주트사를 가지고 뜰 때도 마찬가지이긴 하다만) 안타깝게도 도안 자체가 별로 친절하지 않다는 문제에 부딪힌다. 다른 뜨개질 책이 빼뜨기해야 할 부분 등을 일일이 짚어주는 반면 이 책은 다 생략 생략 생략. 자세한 설계도라기보다는 스케치보다 좀 더 자세한 수준에 가깝다. 그렇다고 '도안' 축에 낄 수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고, 뜨개질 중수 내지 고수라면(내가 '중수' 정도 되는데 몇 개 빼고는 이해 가능했음) 도안만 보고 무리 없이 떠내려갈 수 있다. 그러나 뜨개초보인 데다 주위에 자문할 사람도 없다면 구입을 재고해보기 바란다.

오류로 보이는 부분도 몇 있다. 별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요새 내가 뜨고 있는 "꽃모양 밸런스 커튼(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그 커튼)"은 모눈뜨기로 대칭이 되게 떠야 하는데 중앙선을 중심으로 왼쪽이랑 오른쪽 색칠된 부분이 다른 부분이 있다. 코바늘 대바늘 기초 뜨기 알려주는 부분에서도 가로로 실을 빼 뜨는 방법을 표시한 기호 아래 3코 모아뜨기가 설명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도 오류로 보인다(다 사진 찍어 올리고도 싶다만;;; 저작권이랑 귀차니즘 때문에;;; 혹시 관계자가 보고 '증거'를 요구한다면 그 때 찍어 올리도록 하겠다). 역시 전체적인 흐름을 해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이 '오류'임을 알아챌 수 없는 수준의 뜨개꾼이라면 진행이 좀 어렵긴 하겠다.

그렇지만 도안을 자신만의 작품에 응용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라면 참고 삼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책이다. '이런 것도 뜨개로?' 하고 놀랄 정도로 제법 깜찍하고 기발한 소품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니까. 뜨개질 책이 대개 그렇듯 앞쪽의 시원시원한 이미지 컷들도 볼 만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주트사, 예쁘긴 예쁘네그려. 츄릅~

<송영예의 스타일 손뜨개>
송영예 지음 / 동아일보사 펴냄 /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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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15:17 2010/06/1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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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번역이 엉망이어서도 아니고,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오탈자 때문도 아니고, 행간이 너무 빡빡해서도 아니고,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도 아니다. 그냥,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심장을 한 번씩 들었다 놓는 것처럼 무겁기 때문이다.

일 없고 돈 없고 부양해야 할 아이만 있는 남미의 한부모 여성의 선택은 미국행이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그럼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책이 탐구하는 건 바로 그 남겨진 아이들이다. 엄마 찾아 삼만 리를 떠난 아이들. 그러나 이 책에서 다루는 엔리케의 여정은 결코 (제대로 본 적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엄마 찾아 삼만리>처럼 가슴 따뜻하고 감동적이진 않다.

어릴 때 헤어져 어렴풋한 촉감과 몇 장의 사진, 간혹 걸리는 전화 목소리 정도로만 엄마를 기억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우리 환상 속의 완전무결한 엄마이기도 하고 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이기도 하다. 엄마가 보내주는 돈으로 이곳에서 다른 집보다는 약간, 아주 약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정서적으로 몹시 피폐하다. 책에서 세밀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이건 딱히 '엄마'가 키우지 않아서(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해? 뷁!)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하나 뿐이던 주 양육자가 아예 없어져버리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 다른 일가친척에게, 그것도 모자라 번번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려가며 맡겨지는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이건 잠깐 다른 얘긴데, 어찌 보면 엄마들에게도 이 아이들은 '드림'인지도 모른다.

"많은 엄마들이 아주 잠깐 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6년에서 8년까지 계속 헤어져야 해요." 이주민 문제를 전공한, 로스앤젤레스 지역연합학교 사회복지사인 아날루이사 에스피노자가 말했다. 어떤 엄마들은 밀입국 알선자에게서 자기 아이가 아닌 아이를 건네받는 경우도 있다. 처음 보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잃지만, 엄마들은 금세 받아들이고 자기 자식처럼 키운다. (189쪽)

"금세 받아들이고 자기 자식처럼 키"우는 사람들을 정말 만나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걸 보니 공부랑 영 등진 건 아닌가?)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를 마치고 변변한 직업을 갖길 바라는 '엄마'의 소망과 달리 이들은 대개 본드와 마약에 손을 대고, '막장'까지 치닫다 결국 아무 희망도 없는 고향을 떠나 '엄마'를 찾아가게 된다. 미국에 가서, 엄마를 찾으면, 다 잘될 거야.

책의 상당 부분은 이들이 '엄마'를 찾아 가는 여정에 대한 묘사이다. 어디서 어떻게 기차를 몰래 타고, 어디서 강도를 만나고, 어디서 치료를 받고, 어디서 다시 잡혀 송환되었다가 다시 시도를 했는지. 그 와중에 누구는 강간을 당하고 누구는 다리를 잃고, 누구는 돈을 잃고, 또 누구는 목숨을 잃는다. 함께 여행하는 아이들도 믿을 수 없고 지역 폭력배들도 믿을 수 없고 경찰도, 이민국 사람들도 믿을 수 없는 여행길. '여행'이라고 할 수도 없는, 눈물겨운  여정.

그래도 그들이 이 지독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이민국 직원에게 발각되어 돌려보내진 뒤에도 두 번 세 번, 일고여덟 번, 성공할 때까지 시도할 수 있는 건, '엄마'에 대한 그리움(혹은 환상), 희망 없는 고국,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예수 성심상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엔리케는 밑열이식 화물차 위에 혼자 있게 되었다. 밤이 검은 망토로 사방을 감쌌고, 기차는 작은 마을을 지나며 구슬픈 기적 소리를 냈다. 그때 우연히 옆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수십 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작은 꾸러미를 들고 철길을 따라 집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두려웠다. 이 사람들이 돌을, 아니 바위를 던질 것 같았다. 그들은 기차 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엔리케도 한 여자와 아이가 그의 밑열이식 화물차를 따라 달리는 것을 보았다.
  "이봐요!" 그들이 소리치며 던져준 것은 롤 크래커였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엔리케는 몸을 쭉 뻗어 잡으려고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 크래커가 몇 센티미터 옆으로 날아가, 기차에 맞고 땅에 풀썩 떨어졌다. 철길 양 옆에 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차량 지붕에 있는 불법이주민들에게 꾸러미를 던지고 있었다. 기차가 빨리 달려서 빗맞지 않도록 잘 겨냥해 그들에게 던져 본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엔리케가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여자와 소년이었다. 그들은 파란색 비닐봉지를 던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팔에 뚝 떨어졌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는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쏜살같이 지나간 그 사람들이, 엔리케의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엔리케는 봉지를 열었다. 롤 빵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엔리케는 그들의 친절함에 한동안 넋이 나갔다. (138~139쪽)

롤 빵 여섯 개에 넋이 나간 아이를 보며, 나는 아이의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한동안 넋이 나갔다. 어떻게,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두들겨 맞고 며칠은 좋이 굶은 아이에게, 상대에게 들리지도 않을, 고맙다는 인사를 할 힘이, 심성이 남아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나를 울리는 건 언제나 다큐. 고맙습니다, 라니.

그리고 잘 찾아보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인간이란,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이런 사람들.

이주민을 돕던 마을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의 총을 잘못 맞아 죽은 것 같았다. 이들은 막대기와 돌멩이를 쥐고 시청을 둘러쌌다고 한다. 그리고 뭘 요구했을까?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물론 그것도 포함되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 것은 그 전날 체포된 이주민들의 석방이었다. 이 가난한 마을사람들은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이 단지 '재수 없이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사건' 이상이 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의 도움으로 멕시코-미국 국경에 도착해 어렵사리 돈을 모아 어렵사리 엄마한테 전화를 하면 엄마는 어렵사리 돈을 모아 '코요테(불법 밀입국 알선자)'에게 보내준다. 코요테는 아이와 몰래 강을 건너 육로로 엄마가 있는 지역에 데려다 준다. 드디어 모자상봉.

<엄마 찾아 삼만 리>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엔리케(<엄마 찾아 삼만 리>의 주인공 아이와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일까? 책 내용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의 삶은 그 후로도 계속된다. 반가움도 잠시, 엄마는 고국에서 그려왔던 '그 엄마'가 아니요, 아이 역시 미국에서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 아이'가 아님을 서로 깨닫게 된다. 왜 필요할 때 사랑을 주지 않았냐, 왜 곁에 없었냐며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한 아이와, 누구 때문에 이 타국에서 필요한 돈과 장난감을 보내주려고 열심히 일했는데 적반하장이냐며 억울해 하는 엄마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엄마'가 있는 '미국'이 결코 지상낙원이 아님을 깨달은 아이는 다시금 술과 마약에 손을 대고, 고국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삶은 망가져간다.

그쯤 가다 보면, 어떤 아이들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정착하고 사랑하는 이와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렇고 그렇게 살다 그렇고 그런 삶을 마감할 것이다.

... 아이와 함께 있을 수는 있지만 고국에는 굶어죽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그 같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엄마/아빠 혼자 미국으로 떠나지만 남겨진 아이들은 학비와 장난감이 채워줄 수 없는 상실감에 괴로워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남미의 가난한 이들에게 계속 주어지고 있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에필로그에 가서야 지은이와 전문가는 단순하지만 어렵고, 그러나 그 외에 방법이 없어 보이는 해법을 제시한다. 남미 국가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들 나라에 일자리를 만들어 주라는 것.

... 오랜 시간과 돈, 무엇보다 열정과 애정으로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 써낸 감동적인 르포 하나는 정말 많은 생각거리와 연구주제, 크나큰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깨달았다. 더불어 사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읽어보면 좋겠다.

<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 하정임 옮김 /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펴냄 /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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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4 00:11 2009/08/0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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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전에 사 읽은 책에 대한 얘기를 10년도 지나서 하게 된 건 순전히 엊그제(아 이 글을 쓰기 시작할 그 당시엔 분명히 '엊그제'였다) 퇴근길 버스에서 내 뒤에 앉아있던 사람 때문이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지만 나의 버스 이동에는 분명히 방해가 되는 크기로, 그는 통화중이었다. 친구와 통화중인지, 왜 자기가 아직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래서 어디서 만날지 계속 계속 계속 묻고 답하던 중(이쯤에서 나는 짜증이 북받쳐 올라 버스에서 내려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버스가 멈춰 선 정류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보고 이 사람 하는 말,

"어머. 어떤 개념 없는 애들이 버스정류장에서 싸우고 있어. 완전 소리 커. 여기까지 다 들려."

아, 그 순간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푸하하하 웃어버렸는데, (그럴 리는 없었겠다만) 그 애가 나를 봤다면 아마도 DMB로 코미디 프로 보는 '개념 없는' 사람인 줄 알았을 게다(하지만 미안, 요새 DMB로 보는 뉴스는 웃을 일이 별로 없어).

주위에 누가 있건 말건 거리낌 없이 떠드는 사람들은,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며, '내'가 이어폰도 없이 DMB를 시청하는 동안엔 다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혼자 책 읽다가 뒤집어지게 웃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되는데(어, 나다;) 그 사람이 옆 사람 눈치 보면서 웃더냐 말이다.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땐 주위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오는 거랑 같은 이치다.

10년도 전에, 모 대학 앞 서점에서 이 책을 사 읽은 건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그 때 샀던 책은 XX 씨가 꿀꺽 한 후 당최 돌려줄 생각을 않았던 관계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건 1999년에 다시 산 8쇄본이다). 후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소진 전집>도 갖고 있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마지막 소설집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편애한다. <김소진 전집> 만듦새가 워낙 허술하기도 하지만(표지부터 책등까지 다 울어버린 그 제본이라니!), 그토록 따뜻하게 웃는,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해 보이는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까지 그의 이름 한 자락 들어본 적 없지만 낼름 책을 사버린 건, 순전히 그 표지사진 때문이었다.

원한다면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밤중에 무서운 할머니네 항아리를 깨 먹은 아이는 마침 내리는 눈으로 그 항아리에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혼날까 봐 아침 일찍 도망 나갔다 저녁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집에 들어왔더니! ...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더란 얘기다. (세 줄이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음을, 어른들이 모두 그를 "더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짜고 그러는(29쪽)"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구나.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 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푸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29~30쪽).

대체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하루 온종일 밖을 쏘다녀도, 아이들은 피곤해하지 않는다. 설혹 피로하다 쳐도, 피곤하다 느낄 새도 없이 잠들어버릴 거다. 그러므로 '피로'는 '어른'의 것.

나는 어린애답지 않게 몹시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듯하다. 그것은 내가 그 순간 헐떡이고 있었던 이유를 적절하게 해명해줄 수 있었다. 피로하다는 것,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 하긴 어찌 피로하지도 않고 감쪽같이 기절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때 내가 피로해야 하는 목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기절하는 것이었다. 기절이라도 하고 나면 이 세상에 뭔가가 달라져 있겠지, 혹은 최소한 모면의 여지는 남겠지 하는 맹렬한 위안이 달라붙었다. 동시에 그 피로감은 어쨌든 세상에 대한 것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변소에서 오줌보를 비우고 돌아서기까지 나는 너무나 생생했고, 빠루를 밟고 나서 갑자기 피로감을 느끼기까지 불과 십여 초가 흐르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피로감이란 육체적 고단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정신적 흔들림에서 우러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피로감은 어른에게나 해당하는 피로였다(15쪽).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건 슬프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비로소 타인이 보이게 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한 가지(친구와 전화하는 '나')가 아니라 두루두루(다른 승객들) 생각하고 살피는 것. 나를 '두루두루' 중 하나라고 인정하는 것.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애들을 가리켜 남녀노소 불문하고 '애들'이라고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내 주위에는 미성숙한 영혼들이 너무 많다. 그들의 '천진난만함'을 그대로 보아 넘길 만큼 너그러운 인간이 아닌지라 그 영혼들에게 이 책 한 권씩 쥐어주고픈 생각이 불끈불끈 든다만, 읽기나 할지. 읽고 '어른'이 되기나 할지. 세상엔 이렇게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리는 아이도 있는데.

참, 10여년 전엔 몰랐는데, 그 땐 그냥 '요절 작가'라고만 어슴푸레 생각했었는데, 이제와 책날개를 다시 보니, 그는 정말 '너무 일찍' 갔구나. 나는 이미 그가 살아보지 않은 나이를 살고 있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김소진 지음 / 강 펴냄 /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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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1 00:18 2009/07/11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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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얼마 전 번역본으로 출간된 <권력의 병리학>이다. 전체 500쪽이 넘는 책을 이제 머리말까지(60쪽;;;) 읽었는데, 시작 부분은 좀 지루하다. 아니, 지루하다기보다 늘어진달까. 문장이 상당히 길어서 누가 누구를 수식하는지, 뭐가 어디에 속하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보지 않으면 눈으로만 훑기 십상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미주에 지쳐 버렸는데, 몇 문장 안 가 한 바닥씩 나오는 주석을 처리하려면 미주밖에 방법이 없었겠다 싶으면서도 인용출처로 점철된 게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주석까지 모두 읽는 나로서는 두꺼운 책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기가 영 번거롭다. 게다가 그 긴 미주를 읽고 돌아오면 이미 본문은 까먹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 일쑤.

그러나 머리말을 건너뛰었더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없었을 것이다. 머리말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한 이틀간 계속 머릿속을 헤매고 있어서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계속 성가시게 하는 건 세 쪽에 걸친 상황묘사. 배경은 과테말라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줄리아와 함께 마을의 보건 운동 지도자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에 앞서 어떤 교육을 참관하도록 초청받았다. 그 교육은 어느 성당의 학교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에우에테낭고 시 너머로 낮은 산이 보이고 이 산으로 이어지는 진흙탕길 끄트머리에 그 성당이 있었다. 교육 내용은 성 역할이었다. 교육 대상은 원주민들이었고, 교사는 수도에서 온 두 명의 젊은 여성이었다. 날씬한 몸매의 교사들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보스턴에서 온 우리와 차림새가 비슷했다. 또한 그들은 미국의 대학 혹은 그 영향을 받은 재단이나 국제 관료 사회의 언어를 썼기에 말투도 우리와 비슷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과테말라시티에서 온 그 여성들은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약 스무 명가량의 젊은 여성이었는데, 그중에는 예외적으로 줄리아의 아버지도 있었다―어린 시절에 관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어른인 학생들이 아동용 책상에 비좁게 앉아서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교사 한 사람이 그림을 높이 들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의 내용은 성 역할이었다.
  나는 이런 수업이 어떻게 계속 진행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고, 과테말라시티에서 온 교사들이 직접 물을 때에만 말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했고, 통역자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더군다나 죽음을 비롯해서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지역 주민들은 교사들이 세워 놓은 목표와는 자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서 열 살 때부터 동생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교사(기대에 차서): 그러니까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여자라서 다르게 취급한 거지요?
       학생(사실대로): 아니,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했어요.

  어색한 정적이 뒤따랐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고, 내 동료들도 그랬음이 틀림없었다(오필리아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적 때문에 불편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 수업은 모욕적이었다. 주민들은 집단 학살과 강제이주를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는데, 교사들은 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대했다. 주민들은 주요 도시들, 우리 단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의도를 가진 단체들, 모든 질문에 '정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로부터 가져온 주제에 관해서 질문을 받고 있었다. 직접적인 위해는 없었꼬, 그 주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식을 바꾸고자 하는 이 수업이 지난 수십 년간 폭력을 겪어 온 이 지역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분명 의식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야 할 쪽은 이들이 아니라 과테말라시티와 워싱턴 D.C.에 있는 영향력 있는 자들이었다.
  보건위원회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줄리아가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신호가 반가웠다. 안뜰을 가로질러 흙바닥의 낮고 어두컴컴한 조리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오필리아에게 "희생자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워크숍"을 해달라는 제안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희생자들의 정신이나 문화를 개조하려고 멀리 과테말라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 <권력의 병리학> 32~34쪽

글쓴이는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이 원론적인 수준에서 '의미 있는 주제'라고 하지만 실상 묘사된 상황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의미 없는 주제'라고 생각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른인 학생들이 아동용 책상에 비좁게 앉아서"라는 식의 서술부터(그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배우거나 토론하고 있었다면 "어른 학생들이 비록 아동용 책상이었지만"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청바지 입은 젊은 교사들'에 담긴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애들이 쓰잘 데 없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지 않는가. 인용문을 바로 뒤따르는 문장을 보면 더욱 그렇다. "내 생각은 기우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열정 넘치는 보건위원회의 위원들은 엉성한 제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보건위원회 위원 만세.

아 물론 물론 지은이는 이런 '교육'에 대한 원흉으로 과테말라와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자들"을 지목하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떤 맥락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지은이 눈에 비친 수업 한 토막 가지고 저렇게 써내려간 게 나는 몹시 불편하다. 그가 정말 이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를 통해 "영향력 있는 자들"을 탓하고 싶었다면, 지은이는 좀 더 세심하게 그 상황을 살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수업을 진행한 여성들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에 차서' 어떤 답을 유도하려 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남에게 성 인지력(이든 뭐든)을 교육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일 게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장에서 하는 교육이 정작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다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이라니, '성 역할(원어는 뭐였을까?)'의 영역은 따로 있고 이와는 별개인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의 영역은 따로 있나? '성 인지력'은 먹고 살 만한,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것인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에도 성별성은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돌려보면,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성들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겪는다면 여성은 그동안 "'보다'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겪는다. 아래 인용글을 보자. 지역과 숫자를 조금만 바꾸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전 세계의 난민과 국내 피난민의 80%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20세기 후반의 전쟁의 규모와 성질에 의해, 과거에는 없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분쟁으로부터 벗어나 집을 떠났다. 이 때문에 1990년대에는 많은 상황에서 분쟁 그 자체보다 전쟁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 공공보건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성(gender)에 주목한 데이터는 적지만, 그래도 난민 캠프에서 여성이나 소녀는 남성이나 소년보다 오염된 물이나 오물에 더 많이 접촉한다. 또 강간이나 성적 착취의 위험도 더 많으며,경우에 따라 지뢰에 의해 수족을 잃어버리는 수도 많다.

여성과 소녀가 기본적인 일상필요 활동을 담당하고, 먹거리나 연료, 여물이나 물 등을 조달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활동을 하는 한편, 전쟁에 의해 숫자가 감소한 남성들은 보다 간단하게 여성을 먹이로 삼는다. 최근 밝혀졌듯이 서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 유엔 평화유지 부대·원조 일꾼(worker)에 의한 소녀·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보스니아에서 분쟁 이후의 신탁통치령에서 국제경찰에 의한 여성·소녀의 매매는, 남성 평화유지 부대·원조 일꾼, 경찰에 의한 약탈의 실태, 그러한 남성에게 먹거리·생활 필수품, 물리적 안전을 의존하는 난민 여성·소녀가 노출된 위험을 나타내고 있다.

조악한 사망률 데이터는, 추방된 여성·소녀에 대한 건강상의 충격을 감추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회·환경 관계의 충격·데이터의 경우 성(gender)에 근거한 분류를 하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기록된 적은 사례 중 하나로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 캠프가 있지만, 거기에서는 1세 미만의 여아 사망률은 남아 사망률의 2배이고, 5세 이상의 소녀·여성은 남성의 3.5배의 사망률이다. 다른 예로 자이레 동부의 난민 캠프에 있는 르완다의 난민 가족 중 여성이 가장으로 되어 있는 가족은 남성이 가장으로 되어 있는 가족보다 영양실조가 많다.

성(gender)에 근거한 데이터는 적지만 많은 사람들이 '난민의 여성·소녀가 남성·소년보다 사망률이 높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것은 난민 캠프에서 보건·식품 제공 체제가, 남성·소년에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성(gender) 평등이 주지되어 있지 않은 경우, 난민 캠프에서 여성이 가장인 가족·과부·소녀들은, 식품·의료 서비스를 받는 줄의 마지막에 서 있다. 보호와 평등법이 없는 경우, 식품·의약품을 교환조건으로 성을 제공하도록 강요받는다.

(출처: http://www.peacemaking.co.kr/news_view. ··· _no%3D64)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처럼, 지은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몹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아이티나 러시아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내게는 몇 년 전 가난한 사람들의 흡연율이 부자들보다 훨씬 높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몹시 놀라고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생과 사만큼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를 다하는 것일 터. 그러나 거기에 무게를 두는 나머지 살아남는 것 자체를 위협 받는 사람들에게는 성 감수성 교육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읽히게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은 '젠더 감수성 향상 교육' 정도로 번역하는 게 더 나았겠다. 아마 Gender sensitivity라고 되어 있는 걸 저렇게 번역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이 바닥(?)에서는 보통 개인적 차원에서 (성)차별을 인지해 내는 것에 대해서는 '젠더 감수성'이라고 한다. '성 인지'라는 말은 주로 정책분야에서 쓰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뭐랄까, 집단의 느낌을 준다(그래서 처음에는 왜 거기서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을 하는 걸까 의아했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젠더 감수성('성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데도 있더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쓰다 보니 아직 본문도 읽지 않은 주제에 너무 성급하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두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 느낀 것들, 그러니까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생각들은 다음에 정리할 기회가 오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아니 이런 얘기를 지금까지 한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건강권을 사회적으로, '권력의 병리현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토록 부족했었다니, 지은이도 옮긴이(들)도, 참 외롭고 쓸쓸했겠다.

<권력의 병리학>
폴 파머 지음 / 김주연·리병도 옮김 / 후마니타스 펴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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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03/25 16:20 2009/03/25 16:20

내 기억 속의 <행복한 왕자>는 계몽사 위인전집처럼 양면 하드커버에 내지는 아마도 2도 인쇄. 물론 어린이용 큰 글자. 그러나 형광 연두인지 형광 주황인지로 색을 입힌 삽화는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집에 읽을 책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엔 그거라도 감사할 따름. 볼 때마다 울게 돼서 자주 읽고 싶진 않았지만. 쩝. 왕자를 녹인 납덩이와 제비가 함께 있는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건 그 책의 삽화였을지?

뭐뭐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을 고르게 한 건 어릴 때 읽은 작품들의 원작을 찾아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 단편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텀블러 증정행사.

두 편의 단편집(<행복한 왕자>와 <석류나무 집>)을 붙여 펴낸 이 책은 작가가 "왕자와 공주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세상의 동화들에게 "웃기시네!" 하고 비웃을 목적으로 펴낸 것만 같다. <행복한 왕자>가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 때문에 한 개도 안 행복해 했던 왕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넘어가자. 사랑하는 소녀와 춤추기 위해 장미꽃이 필요하다는 애를 위해 한겨울에 심장에 피 철철 흘려가며 꽃 피워줬더니만 그 은공도 모르고 장미를 홀라당 버려버리는 남자애(<나이팅게일과 장미꽃>)에다가, '친구'라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온갖 방법으로 부려먹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인간(<헌신적인 친구>), 공주가 자길 사랑하는 줄만 알고 신나게 춤췄지만 비웃음 끝에 마음이 찢어져버린 난장이(이 단어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만; 쩝;)까지(<공주의 생일>) 이건 뭐 하나 웃으며 덮을 만한 작품이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별에서 온 아이>는 이런 얘기다.

별에서 온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애를 나무꾼이 주워다 키웠는데 얘는 생긴 건 예뻤지만 성격은 안 좋아서 거지 엄마가 찾아와도 외면했다가 그 벌로 흉칙하게 몸이 변했는데 그 때문에 깨우침을 얻어 엄마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왕비인 엄마를 만나 용서를 받고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들은 아이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이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왕관을 씌우고 손에는 홀을 들려 주었다. 아이는 강가에 있는 도시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다스렸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자비심과 공평함을 보여주었고, 사악한 마술사를 내쫓았으며, 나무꾼 부부에게는 수없이 많은 선물을 보내고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는 새나 짐승에게 결코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빵을,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주었다. 평화가 자리 잡았고 땅은 비옥해졌다(226쪽).

원래 동화는 여기서 끝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와일드는 여기에 굳이 한 문단을 덧댄다.

하지만 아이는 그리 오랫동안 그 도시를 다스리지는 못했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한 데다 너무 힘든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나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뒤를 이어 다시 사악한 왕이 도시를 다스렸다(227쪽).

어쩌면 와일드는 "웃기고 자빠졌네"를 동화가 아니라 우리 사는 현실에 하려고 이 작품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은 이런 것.

"전하, 전하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자들의 호사스러움 덕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옵니까? 전하의 허영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으며, 전하의 부도덕함 때문에 우리가 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옵니다. 가혹한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도 힘들지만, 봉사할 주인이 없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옵니다. 설마 까마귀가 우리를 먹여 살리겠사옵니까? 전하는 이런 일에 어떤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이옵니까? 아니면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가서 '그대는 훨씬 더 많이 사야 한다' 하고 말하고,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는 '그대는 이 값에 팔아야 한다' 하고 말씀하실 것이옵니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궁전으로 돌아가셔서 전하의 화려한 옷을 입으시옵소서. 저희가 고생하는 것이 대체 전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옵니까?(118~119쪽)"

2002년인가 2006년인가, 그 이전까지 월드컵 공인구-를 비롯한 유명짜 한 축구공-들은 제3세계 어린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하루종일 눈 빠지게 일해도 우유 한 통 살 수 있는 돈을 쥐었다나 못 쥐었다나.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아디다○는 바느질이 아니라 특수접착 방식으로 축구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와 같다. 그나마 있었던 알량한 벌이가 끊겨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늘었다는 거다.

이쯤 되니 이 책은 동화라기보다 논픽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젠장젠장젠장. (아니면 어릴 때 읽은 책은 당시의 추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충고로 받아들여야 할까?) ...... <행복한 왕자>는 여전히 나를 울리지만, 이 쓰디쓴 책을 다시 읽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내 눈물은 당분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혹은 같은 시대를 살다 죽어버린 생명들을 위해 흘려야 할 것이므로. 안녕, 오스카.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지음 / 김전유경 옮김 / 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펴냄 /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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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01/23 00:13 2009/01/23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