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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분과 통화를 하지 못해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를 예 해둔다. 까먹을까 봐;)

저녁에 운동을 하고 돌아와 주차를 하고 우리가 최근 발굴한 분식집에 가서 열무국수를 먹고 (아 그 집 열무국수는 별로예요!) 돌아오는 길에, 마침 오후에 매실 택배가 출발했다는 문자를 받은 게 생각 나서는 집 앞 슈퍼에 들러 35도짜리 과실주용 소주 두 병과 10리터에 달하는 유리병을 사지 않았겠어요? 소주 한 병이 3.6리터였으니 가지고 있던 가방이며 뭐며 합치면 10kg는 거뜬한 무게였죠. 슈퍼에서는 그거 한 번에 못 들고 간다며, 두 번에 나눠 가져 가라고 강권에 강권.

그러나 앤님도 아시다시피 우리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의 5층 아니겠어요? 잠깐 고민했지만, 늘 그렇듯 씩씩하게 다 짊어졌죠. 그 짐을 들고 오르내리기를 또 하다니, 아니 될 말입니다, 우어우어우어. 출퇴근 가방이랑 샤워 가방은 왼쪽 어깨에 메고. 애 데리고 승천하는 선녀마냥 소주 한 통씩 양 품에 안고, 남는 두 손으로는 유리병 손잡이를 잡고요.

행여나 유리병 뚜껑이 돌아가 병이 바닥에 떨어져 폭삭 깨질까 봐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뭐, 그렇게 무겁진 않았어요. 아시잖아요. 냉온수기 물도 저 혼자 가는 거. 아이패드 들어 있는 가방만 보고도 무겁다며 만날 빼앗아 가시는 앤님은 싫어할 얘기겠지만. 아 그리고 어제 운동 끝나고 몸무게를 재 봤더니 1kg이 또 쪘더라고요! 몸무게 앞자리가 드디어 바뀐 거죠. 근육인지 나잇살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거울에 비친 팔뚝은 아무튼 튼실해 뵈더군요. 흠화화.

욘석들을 영차 영차 5층까지 올려놓고 한숨 돌리고 물 한 잔 마시고 마지막 참외 두 개 씻어 먹고서는 이 무용담을 전해 드리리 에헴, 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찾는데 아뿔싸, 침대 위에도 작은방에도 가방 안에도 전화기가 없네요. 무용담은커녕 아아아아 앤님! 제 전화기가 없어졌어요!라고 전화하고 싶은데 전화기가 없다니.

이성을 되찾고 귀가경로를 역추적한 결과, 분식집에서 계산하며 카운터에 두었더군요. (잠시 잠깐, 차라리 기억 나지 말지! 하는 생각이;;;) 다시 신발을 신고 5층을 걸어 내려가 슈퍼를 지나쳐 휘적휘적 분식집에 갔더니 사장님이 절 보자마자 ‘언니! 휴대폰 놓고 갔죠?’ 하시네요.

5층을 다시 걸어 올라오며 다짐했어요. 슈퍼 사장님 말씀을 잘 듣자,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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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2 20:22 2013/07/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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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의 변

그해 2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살아온 곳을 떠난 내 손에는 낡은 이민가방 하나와 이불 한 채가 들려 있었다. 이민가방에는 봄 옷가지 몇 벌과 책 한두 권, 헤어 드라이기, 생필품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저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았고, 다시는 '고향'에서 살 기회가 없으리란 걸 그 때는 몰랐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오롯이 혼자만의 살림을 시작했을 때, 냉장고와 책상 등등이 갖춰진 원룸을 채운 내 물건은 책 몇십 권과 작은 행거에 걸린 사계절 옷가지들, 일가붙이가 쓰다 버린 1인용 침대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살림은 불고 불어 책은 어느새 천 권이 되었고, 둘 곳이 없어 남의 창고 신세를 지고 있고, 몇백 리터에 달하는 냉장고는 언제나 만원이고, 나는 차렵이불 정도는 너끈히 빨 수 있는 세탁기를 주말마다 돌리고, 잘하면 세 명도 잘 수 있을 퀸 사이즈 침대에서 36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180도로는 돌면서 2단 행거와 5단 서랍장을 끼고 사는 서울시민이 되었다. 방 하나에 짐을 다 부릴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누군가 어떤 문제, 특히 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해올 때면 나는 늘 이렇게 얘기한다. 참을 수 있으면 참으면 된다. 참을 수 없으면 떠나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그 선택으로 인해 놓치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놓쳐지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으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포기할 수 없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쥔 것이 너무 많고, 메워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다른 구차한 곳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 구차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나는 불현듯 20년 전의 이민가방을 떠올렸다. 겨울에도 찬물에 머리를 감으며, 아주 가난하게 살 거라고 마음 먹었던 순간도 떠올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일할 데가 없었을 때, 한국사회에서 서울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밥벌이가 없어 굶어 죽을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낮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자신만만했던 때도 떠올렸다.

원하는 만큼의 내 공간과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려고, 원할 때는 언제든 책을 사 읽고 온갖 취미를 누리려고, 부모님께 몇십 내지 몇백 단위의 돈쯤은 호기롭게 드리려고, 예상치 않았던 일정 규모의 지출도 그달 그달 충분히 감당해 내려고, 다른 많은 것들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 모든 것들을 좀 놓아버려도 괜찮겠다, 는 생각이 드는 건, 마침내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 나는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해지는 길,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을 더 이상 포기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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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15:24 2013/06/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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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잘한 일
보스에게 "저 이번 달까지만 나오고 정리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끝끝내 내뱉지 않은 일. 대신 점심은 따로 먹었다.

두 번째 잘한 일
면접 불합격 통보메일을 받고 "양측의 생각이 같아 다행입니다"라는 답장을 끝끝내 보내지 않은 일. 정말 뷁 같은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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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2 10:04 2013/06/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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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지 5분이 되지 않아 발견된, 눈썹(아 그러니까 눈썹, 이라 함은 아래 사진 우측 하단에 보이는, 차량용 눈썹, 되시겠다)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녀석. 웃기다가 안쓰럽다가 무섭다가. 차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되니까 일단 창문은 꼭 닫고 말을 건다. 꼭 붙잡고 있어. 10분만 더 가면 설 거야. 섣불리 움직였다간 차도로 떨어져. 그럼... 알지?

하지만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던 거지. 녀석은 눈썹을 벗어나 보닛을 낑낑 기어 올라와 마침내 앞유리에 붙었다. 신묘한 빨판 덕분에 용케 유리에 붙어 있는 털북숭이는 물론, 징그러웠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긴 건 네 탓이 아니지. 아니 '탓'이라니, 송충이 세계에선(그런데 저게 송충이가 맞긴 한 걸까) 네가 엄청난 미인에 모험가일 수도.

워셔액과 와이퍼로 저 녀석을 치워 버릴까, 세 번 정도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처치'하기에 녀석은 너무 컸다. 저렇게 큰 생물을 내 손으로 없애 버리면 두고 두고 생각이 날 것이다. 아 그러니까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 줘. 이제 5분만 가면 된다고. 그럼 어떻게든 널 막대기에 옮겨서 녹지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해 줄게.

하지만 녀석은 앞유리는 안전하지 않다고 여긴 모양이다. 낑낑대더니 계속 올라간다. 야야야! 그만 가. 올라가면 안 된다고! 녀석은 어느새 지붕으로 사라졌다. 야!!! 안 돼!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드디어 목적지 도착.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붕과 뒷유리를 살폈다. 주차 관리해 주시는 분이 왜 그러냐 물으신다. 아 예. 송충이 한 마리가 붙어 있었거든요. 별 시덥잖은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날아갔겠지 뭐. 예...

계속 봤더라면 귀여울 수도 있었던, 주황색 발이 요새 유행하는 신발만큼 예뻤(!)던 털북숭이. 마지막 순간 고통은 적었길.

차 앞 유리에 붙어 있는 송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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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5:24 2013/06/1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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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최고다

아무 생각 없이 블로그 DB 비밀번호를 바꿨다가, 너무 바빠 수습도 못 하고 이제야 다시 수정해서 들어왔다. 글도 잘 안 쓰면서 막, 한밤중에 열쇠 잃어버리고선 온갖 열쇠가게에 다 전화하고 난리 쳐서 겨우 겨우 집에 들어온 이 기분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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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10:27 2013/06/0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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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시각장애인의 웹 접근성에 대해 잠깐이나마 고민할 기회를 가졌다. '웹 접근성(Web accessibility)'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웹 페이지에 이미지가 있을 경우, 이를 설명해 주는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자료를 조금만 더 찾아봐도 주의(이 얼마나 비시각장애인적 단어 선택인가. '당연'이 아니라 '주의'라니)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키보드만으로 메뉴 이동이나 선택이 가능해야 하고(그 이동방향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페이지마다 반복되는 메뉴는 건너 뛸 수도 있어야 하고, '표'에 대한 설명('당연'하잖아. 표에 그은 선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말해주지 않으면 표가 표인지 뭔지 알 수 없으니까.)도 있어야 하고, 색의 대비도 확실해야 하고 그래프를 그릴 때는 배경을 색깔만이 아니라 다른 기호로도 표시해야 하고... 휘유, 장애에 관한 내 감수성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다. 이 분야에서는 내가 다수이자 권력을 가진 쪽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고 사고를 교정해야 하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운영하는 관련 블로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 http://www.haeppa.kr)

하기에 요즘 몇몇 대기업이나 은행 홈페이지에서 웹 접근성 '인증'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공지를 심심찮게 보면서, 한편으로는 웹 접근성이 향상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편의성보다 인증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느낌에 씁쓸하기도 하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인권위 진정에서 빚어진 일종의 '유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모쪼록 이를 계기로라도 시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웹 접근성을 보장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드디어 오늘 하려고 했던 얘기.

찾아볼 자료가 있어 어떤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렀다. 보고 싶었던 자료는 없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기관지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게시판에 들어가 보니 한 권 전체가 플래시로 제공되고 있었다. 그 단체에서 기관지를 홈페이지에 올리는 방법은 나름 진화해 왔다. 예전에는 자원활동가를 활용해 일일이 타이핑해서 올렸고, 그 다음에는 최종본 pdf를 긁어서 복사-붙이기-편집해서 올렸고, 그 다음에는 디자인 업체에서 최종 Quark Xpress 파일을 받아 텍스트를 복사해 올렸고(이 경우 pdf를 복사해서 쓸 때 가장 번거로운, 줄마다 들어가는 줄바꿈이 없다), (이렇까지 아는 이유는 내가 세 가지 다 해봤기 때문이지) 그 다음은 모르겠고, 이젠 전자책이구나. 그 전자책을 보고 처음 했던 생각은 와, 좋아졌네, 였다지. 플래시가 얼마나 웹 접근성에 도움 안 되는 도구인지 몸소 겪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웹 포스터를 첨부할 때마다 텍스트를 병기하는 이 단체의 평소 활동과, 게시판에 플래시'만' 올리기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 다시 보니 플래시 말고도 각각의 텍스트를 따로 올려 주었구나. 다행이다. 마음에 드는구려. 아 그러나 플래시에 자꾸 눈이 가는 난 어쩔 수 없는(?) 비시각장애인. 화려한 편집과 레이아웃, 이미지, 클릭만 하면 펼쳐지는 다음 페이지를 보며 '아름다움'과 '편리함'에 대한 내 '시각'이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이로구나, 성찰하는 것도 잠시, 일 하자.

* 덧붙임
이 글의 흐름과 결말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유는 사실... 원래는 플래시'만' 보고 이 단체를 열나 성토(!)할 목적으로 성급히 시작했다가 뒤늦게 텍스트가 함께 올라와 있는 걸 보고 급 반성했으나 도입부 써 놓은 게 아까워 얼렁뚱땅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수줍은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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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2 13:37 2013/05/22 13:37

취업 관련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그래, 돈 벌어서 이만큼이나마 내 힘으로 마련했다는 게 참 신기하고 기특하네 하면서 방을 훑었다. 내 방. 마침 눈이 닿은 곳엔

이부자리. 이크, 그분이 쓰시던 거다. 눈을 돌렸더니 침대 위 풀오버. 헉,기숙사 시절 같은 방 언니가 입다 준 거. 왼쪽은 안 되겠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배낭. 전 애인이 대학원 입학기념으로 선물. 으악, 선풍기 모양 히터. 그분이 사무실에서 업어옴.

내 힘이 아니라 각계의 온정으로 꾸려온 삶이었구나. 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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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7 22:14 2013/03/27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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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헌혈을 한 건 고등학교 1학년인지 2학년일 때였다. 학교로 찾아온 헌혈차가 무섭지 않았고, 주사도 무섭지 않았고, 친구들과 잠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팔꿈치 안쪽이 며칠 동안 멍들었지만 피가 빠져 나가는 강렬하고 황홀한 느낌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피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애시당초 내게 명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왕창 피 뽑는 게 좋았을 뿐. 하여 적당함과 모자람을 오가는 헤모글로빈 수치 때문에 퇴짜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고, 주위에 헌혈할 데가 없어서 못한 적도 또 여러 번이었지만, 시간이 있고 눈에 띌 때마다 고민 없이 헌혈의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어제.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서성이던 중 헌혈의집을 발견하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른 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작성하던 문진표에서 몇 가지가 걸렸다. 하지만 무조건이 아니라 '일부'는 할 수 없다 했으니 일단 간호사와 이야기를 해 보자는 심산으로 기다렸다.

"땡땡번 헌혈자님,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네. 혈압 먼저 재실게요."
"네. 그런데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니 제가 문진 선에서 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니 왜요?"
"일단, 제가 오늘 채혈을 했구요,"
"채혈요? 왜요?"
"수술 전 검사로요."
"어떤 병으로요?"
"땡땡병으로요."
"아이구. 그럼 안 되세요."
"그렇군요... 하지만 현재 관련해서 아무런 치료도 약물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왜 안 되나요? 제가 병이 있는 걸 몰랐다면 헌혈이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단을 받으셨고 이젠 본인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세요."
"음. 그럼 수술을 받은 다음에도 앞으로 헌혈은 안 되는 건가요? 평생?"
"네."
"...그렇군요. 괜히 번거로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환자라는 걸 자꾸 까먹네요."

20여 년에 걸친 내 헌혈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열 몇 장의 헌혈증을 남기고. (그나마 남아있는 건 한 장뿐;) 정기회원으로 등록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젠장. 게다가 밤중에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 피 뽑아 골수이식은행에 등록해 놨었는데, 이것도 이제 일치하는 환자가 나타나더라도 이식 안 시켜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때문에라도 조만간 탈락할 예정이긴 했지만; 아니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좀 억울하지만, 입장을 바꿔 내가 수혈 받는 입장이라도 환자의 피나 골수라고 하면 좀 꺼려질 것 같긴 하다;

병명을 처음 들었을 때도, 수술날짜를 잡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 몸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맞이하고서야...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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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7 16:35 2013/03/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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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회의 끝나자마자 한 시간 동안 사적통화를 계속하고 있다. 본인도 대단하고, 그런 줄 알면서도 할 일도 제대로 못 주는 회사도 대단하고, 그걸 참고 있는 나도 대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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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4 11:25 2013/03/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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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가지 않아도 좋을 자리였다. 내가 안 왔다고 일부러 찾아볼 이 없을 터이고 내가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다만 나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공부하기 시작했던 여성학(주의)은 더 이상 나를 지지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고, 잠깐이나마 여성단체에서 일도 했던 여성주의자이지만, 현재 '일반 사기업'에서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다. '전화는 여직원이 받는 게 아무래도 좋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사장이 꼭대기에 있는 개인회사이다. 왜 이런 데서 일하는 거냐는 질문을 몇 번 받았는데, 그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오라는 데가 여기뿐이라서."

이전 직장의 계약만료 후 새로운 밥벌이를 준비해야 했으나 계약만료가 다가올 때까지 직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여기서 연락이 왔고, 일단 입에 풀칠은 하면서 생각해 보자 하는 심정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게 벌써 2년 전이다. 그리고 현실은 여전히, 공고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자리에서 조그만 것이라도, 가능한 것부터라도 바꿔 나가기엔... 휴. 앞서 걸어가는 여직원을 가리켜 '아무 생각 없이' "땡땡 씨는 허벅지가 참 튼실해." 하는 상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왜'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지 설득하기엔 하루가 모자라다. 그리고 하루 종일 설득한다 해도 결국 나는 그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한 가지 주제만으로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걸리는' 일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진다. 그러니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를 달고 다니려면 일 따위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부하직원들에게 내 컵은 내가 닦을 테니 씻지 말라고 하거나, 종이컵 아깝고 내 차는 내가 알아서 하니 회의 때는 내 차는 빼라고 하거나 내 책상은 닦지 말라고 하면 이들은 외려 더 신경 쓰여 하기 마련이다. 무거운 물건이라도 같이 나르겠다고 나서면 불편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다시, '여성주의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 (꿈뻑꿈뻑)'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평생 내 것으로 가져가기로 했던 신념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이런 '현실'에서 내가 뭘 어쩌겠어,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하고,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조직도 완벽하지는 않잖아? 자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여성주의자인 '나'가 아직 살아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원 없이 공부했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여전히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활활 질투했으며, 다시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물론 여성학 전공자로서 여성학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자리나 고민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어쨌건 결국 그 날 느낀 건, 나는 더 이상(?) '여성학 커뮤니티'나 '여성학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아니구나, 라는 것.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 수는 없어도, 어디에 있지 않은지는 알게 되었다는 게 수확이면 수확이랄까.

...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 할 줄 알았는데, 외려 멋모르던 때보다 더 많이 하게 되니 인생 뭐 이러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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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9 14:44 2013/02/1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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