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땡땡땡병원에서 땡땡땡 선생님께 세 달 전쯤 수술을 받은 환자입니다. 이 메일이 담당자께 잘 전달되길 바라며 글을 씁니다.

지지난 주 토요일 오랜만에 병원에 갔더니 제 담당 선생님 방문 앞에 당일 예약 명단이 붙어 있더군요. 모든 선생님 방문 앞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병원장님과 제 담당 선생님 문에만 있더군요. 아무래도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예약시간에 맞춰 와도 오래 기다려야 하고, 그러다 보니 간호사에게 자꾸 본인의 순번을 묻는 사람들이 생기고 하니 그리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은 발상이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글자 크기가 너무 작네. 정형외과는 특성상 대개 연세 있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잘 안 보이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한데 내 순서는 언제쯤일까 하고 다가가서 명단을 살펴본 순간 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름과 예약시간 정도 있겠거니 생각했던 명단에는 굳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은 온갖 정보들이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름, 그 정도야 괜찮습니다. 세브란스(다른 데 예도 들고 싶지만 제가 가본 큰 병원이 여기뿐이라서요)는 개인정보와 사생활 보호를 위해 대기실 전광판에도 이름 중 한 자는 별표 표시하는 거 아시죠? 하지만 거기처럼 병원용 ID 카드나 환자번호로 관리되지 않으니 이름 두서너 자 표시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예약시간도 괜찮습니다. 그래야 자기 예약증이랑 대조도 해보고, 이 선생님이 대체 몇 분에 한 명씩 환자를 보시는지,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대충 얼마인지 가늠해볼 수도 있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대체 이런 정보가 왜?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더군요. 우선,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최초 예약일이 병기되어 있던 게 기억나는군요. 예약일 옆에 꼭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진료과도요. 어차피 땡땡땡 선생님의 예약 환자 리스트기 때문에 다 똑같은 과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굳이 출력해서 환자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과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그런 정도는, 참고 보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저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구분'이라는 항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구분'요. 대부분 사람의 '구분' 난에는 '공단'이라 쓰여 있고 한두 명 이름 옆에는 '보호1종'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공단' 속에 '보호1종'이라 되어 있으니 이름을 한 번 더 읽게 되었어요. 아마 그분이 저보다 좀 더 앞 예약자였다면 전 그 분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보고 '보호1종'을 한 번 더 떠올렸겠지요. 많이 노력하면서 살지만, '다름'에 시선을 한 번 더 주는 나쁜 버릇은 잘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제가 만나본 '보호1종' 분들은, 병원에 가는 게 싫다고들 하셨습니다. 복도에서 부러 큰 소리로 '보호1종'임을 알리며 면박 주는 일도 다반사요,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어도 진료순서가 '공단' 뒤로 밀리기 일쑤라고요. 병원에서 '자선'을 베푸는 것도 아니요, 어차피 국가에서 필요비용 다 받으면서 대체 왜들 그렇게 대 놓고 차별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들 했습니다.

그래서 전 묻고 싶습니다. 진료와 예약에, 그 사람이 '공단'인지 '보호1종'인지가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인지요. 아마도 원무과 담당일, 진료비를 계상하는 것 외에 어떤 소용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 시트는 간호사용 예약관리 프로그램(?- 대충 이 비슷한 것이겠지요?)을 엑셀로 저장해서 그대로 출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진료나 예약, 대기에 꼭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셀 숨기기'나 '삭제'를 이용해서 보이지 않게 처리한 후 출력하는 것은 어떨까요? 필요 없는 정보 때문에 불편해 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고, 종이 한 장에 들어가는 내용이 더 적어지니 글자도 좀 더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상에서 해당 셀을 지울 수 없다면, 조금 더 수고로우시더라도 필요 없는 부분은 종이로라도 가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국가로부터 의료비 보조를 받는 '보호1종'이라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당당하면 된다는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상황에서 무조건 그게 별거냐, 담대해져라, 말하는 건 함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진료대기에 굳이 필요 없는 정보를, 어떤 이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을 안고서까지 내보여야 할 이유가, 그 예약자 명단에는 없어 보입니다.

본의 아니게 긴 글이 되어 버렸네요. 어쨌거나 다음 번 병원에 갔을 때는 선생님 방문 앞에서 제 이름과 예약날짜, 시간 정도로 확 트인, 깔끔하고 예쁜 시트를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환자 땡땡땡 드림

후기: 한참 바쁜 오후, 병원 홍보과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얘기해 내가 건의한 대로 수정하기로 했단다. 기쁜 소식에 잠깐 기분이 좋았다. 역시, 직접 말해 보지도 않은 채 분개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한 것은, 저런 식으로 메일을 쓸 수 있는 것은 내가 '공단' 소속 환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호1종'을 보는 것이 불편한 '나'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 모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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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10/05 15:03 2009/10/05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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