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헌혈을 한 건 고등학교 1학년인지 2학년일 때였다. 학교로 찾아온 헌혈차가 무섭지 않았고, 주사도 무섭지 않았고, 친구들과 잠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팔꿈치 안쪽이 며칠 동안 멍들었지만 피가 빠져 나가는 강렬하고 황홀한 느낌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피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애시당초 내게 명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왕창 피 뽑는 게 좋았을 뿐. 하여 적당함과 모자람을 오가는 헤모글로빈 수치 때문에 퇴짜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고, 주위에 헌혈할 데가 없어서 못한 적도 또 여러 번이었지만, 시간이 있고 눈에 띌 때마다 고민 없이 헌혈의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어제.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서성이던 중 헌혈의집을 발견하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른 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작성하던 문진표에서 몇 가지가 걸렸다. 하지만 무조건이 아니라 '일부'는 할 수 없다 했으니 일단 간호사와 이야기를 해 보자는 심산으로 기다렸다.

"땡땡번 헌혈자님,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네. 혈압 먼저 재실게요."
"네. 그런데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니 제가 문진 선에서 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니 왜요?"
"일단, 제가 오늘 채혈을 했구요,"
"채혈요? 왜요?"
"수술 전 검사로요."
"어떤 병으로요?"
"땡땡병으로요."
"아이구. 그럼 안 되세요."
"그렇군요... 하지만 현재 관련해서 아무런 치료도 약물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왜 안 되나요? 제가 병이 있는 걸 몰랐다면 헌혈이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단을 받으셨고 이젠 본인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세요."
"음. 그럼 수술을 받은 다음에도 앞으로 헌혈은 안 되는 건가요? 평생?"
"네."
"...그렇군요. 괜히 번거로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환자라는 걸 자꾸 까먹네요."

20여 년에 걸친 내 헌혈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열 몇 장의 헌혈증을 남기고. (그나마 남아있는 건 한 장뿐;) 정기회원으로 등록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젠장. 게다가 밤중에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 피 뽑아 골수이식은행에 등록해 놨었는데, 이것도 이제 일치하는 환자가 나타나더라도 이식 안 시켜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때문에라도 조만간 탈락할 예정이긴 했지만; 아니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좀 억울하지만, 입장을 바꿔 내가 수혈 받는 입장이라도 환자의 피나 골수라고 하면 좀 꺼려질 것 같긴 하다;

병명을 처음 들었을 때도, 수술날짜를 잡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 몸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맞이하고서야...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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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7 16:35 2013/03/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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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회의 끝나자마자 한 시간 동안 사적통화를 계속하고 있다. 본인도 대단하고, 그런 줄 알면서도 할 일도 제대로 못 주는 회사도 대단하고, 그걸 참고 있는 나도 대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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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4 11:25 2013/03/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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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때

오늘은 뭘 먹을까, 지난 번에 뭘 먹었더니 맛있었나, 뭐가 먹고 싶은가를 생각하지
오늘은 뭐가 먹기 싫을까, 라거나
일전에 맛없게 먹었던 음식을 계속 곱씹어 보고, 그 맛을 다시 떠올리고 재삼 기분 나빠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왜 안 좋았던 일은 계속 생각하고, 잊었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고, 스트레스를 자청하는 걸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져서 곰곰 생각해 봤는데
한 이틀을 고민해 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기분 나쁜 일들은 맛 없는 밥과 동급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랬더니 삶이 조금 더 느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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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16:28 2013/02/1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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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놀아버릇하니, 일하기 싫어 큰일이에요;;"라는 어느 분의 말씀에 "저는 일하기 싫은데 계속 일하고 있어서 큰일입니다 ㅠ.ㅠ"라 답한 적이 있다. 내년을 맞이하는 나의 원대한 꿈은 놈팽이, 였다. 슬렁슬렁, 입에 풀칠할 정도로 최소한의 일만 해야지. 무슨 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한 10년 전부터는 기댈 구석 없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않게 된다. 그러기엔 나는 아직 사회적 기준으로 상위에 가깝고, 무엇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친다. (돈 떨어지면 부모한테 손 벌리겠지, 넘겨 짚은 인사가 있었는데 차마 앞에서 웃어주진 못했다. 대신 썩소는 성공. 입에 경련 날 뻔했다;;;) "놀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때가 무려 7년 전이건만, 7년이면 하물며 교수도 연구년을 가고 활동가도 안식년을 가건만, 나는 내년에도 일하게 되었다. 그나마 자리를 옮기는 게 위안인가. 이래저래 노는 건 다시 1년 뒤를 기약. 설마 1년 동안 페트라가 닳아 없어지진 않겠지.

2.
어느 분이 자신을 '지식인'이라 칭하길래(참으로 '용감'하지 않은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니 ㅎㄷㄷ 나는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사고를 많이 해도 나를 평생 '지식인'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것도 성격이겠지 싶긴 하다만;;;), 나는 나를 뭘로 칭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해 봤다. 얄팍한 공부경력이나 사고 깊이 가지고 '지식인'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비정규직 노동자'라기엔 그에 관한 정형(stereo type)이 너무 강해서 왠지 죄스럽고(그게... 비정규직이긴 한데 1인 가구가 먹고 살기에 모자람 없는 월급에, '선생님' 소리 듣는 직업이라 그렇다. 그래도 나는야 1년 계약직. 2년이 되면 짤없이 나가야 한다), '댄서'라기엔 춤을 너무 못 추고, 결국 남는 건 '여성주의자'밖에 없는 건가. 나 요새 '여성주의자' 이름에 부끄러운 짓 많이 하는데 ㅠ.ㅠ

3.
비빔국수 집에 가서 비빔국수에 만두까지 싹싹 비우고 왔더니 배가 띵띵해졌다. 만두는 돼지고기 냄새가 좀 나서 별로였지만 그래도 안 먹으면 버려질 테니, 약간의 역기를 참고 다 비웠다. 그랬더니 체해버린 것 같네. 아니 어쩌면 체한 건 만두 때문이 아니라 국수집을 나오면서 발견한 조선일보 3종세트(조선일보, 스포츠조선, 또 하나는 기억이 안 난다) 때문일지도. 전 직장에선 조선일보에서 전화 오면 "저희는 조선일보랑 인터뷰하지 않습니다" 하고 끊으면 됐는데 이 직장에선 그럴 수가 없는 것도 은근 스트레스다. 경험한 바에 따르면 기본적인 것도 안 챙기고 '전문가'들한테서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건 신문사 상관 없이 그 직업군의 특성인 것 같긴 하지만.

4.
길거리나 텔레비전을 보니 올해는 가로든 세로든 커~~~다랗고 길~~~다란 목도리가 유행인 모양이다. 하나 떠볼까 하고 인터넷을 뒤지는데 마음에 쏙 드는 실을 찾기가 어렵다. 하는 수 없이 목도리는 잠시 보류하고(난 왜 맨날 한겨울이 다 돼서야 겨울소품 뜰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러니 작년 겨울에 뜨다 만 모자가 아직도 서랍에 있지;;;) 최근에 책도 싼 값에 구입했겠다 도일리나 뜨려고 했는데 역시나 맞춤한 면사 찾기가 어렵다. 할 수 없이 코스터로 선회. 0.8mm 코바늘 가지고 놀려면 당분간 눈 좀 침침하겠네. 앙.

5.
또 어느 분이 써놓은 글에서 "악의적인" 글은 사양한다는 말을 보고, '악의적인' 글은 어떤 걸까 생각해 봤다. '악의'의 유무는 듣는 사람이 판단하는 걸까? 그럼 '악의'를 가지고 입에 발린 말을 한다면, 그걸 듣는 사람은 그게 '악의'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 아니면 악의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듣기 좋은 말만 해 달라는 뜻인 걸까? 듣기 싫은 말은 모두 '악의'라는? 그런데 이런 걸 물어보면 나한테 '악의'적이라고 할까? 악의는 없는데;;;

6.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려서 지금, 번호 달 때마다 한 줄씩 줄여서 쓰고 있다. 1번은 여덟 줄, 2번은 일곱 줄, 3번은 여섯 줄, 4번은 다섯 줄, 5번은 네 줄. 이제 6번은 세 줄이 되어야 하고, 7번은 두 줄, 8번은 한 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이 스킨이 한 줄에 지금 내가 보는 편집창과 똑같은 글자수를 넣어줄 것인가? 궁금하다.

7.
어휘력이 해가 갈수록 떨어져서(당연하잖아, 공부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하고 사는데!) 쉬엄 쉬엄 번역을 해볼까 생각 중. 그런데 번역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책이 눈에 안 띄네.

8.
아싸~ 윗집 아가공룡 중 1룡이 우당탕 다니다 엎어져서 잉잉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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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 21:25 2009/12/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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