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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1 향일암을 추모함 by etcetera (4)

할머니를 보내 드리느라 세상과 며칠 격리되어 있다 가까스로 다시 발을 들여놓은 어젯밤, '향일암 전소'라는 인터넷 기사 제목을 마주해 버렸다. 정황파악을 위해 기사를 클릭하기는 했지만 부러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내게는 낙산사 화재보다, 숭례문 전소보다 더 먹먹한 소식인지라 궁금한 게 많을 법도 하지만, 아마 오랫동안 기사를 정독하는 일은 없지 싶다.

향일암 올라가는 길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험했었다. 변변한 계단도 없고 사람 하나 빠져 나가기가 힘들어 보이는 바위틈이 몇 개고 있는, 그토록 '불친절'한 길을 한참이고 걸어야 비로소 절벽에 면한 절과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훗날 아주 조금 친절해진 그 길에 놓인 계단에는 어머니가 시주한 계단 두어 개가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아마 어제 새벽에 타버린 기왓장 안쪽에는 내 이름도 몇 개쯤은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 험한 길을 오르는 것 자체가 마음 닦는 길이었음을, 어린 나는 알았을까.
 
어머니가 가족의 안녕과 대학합격을 빌고 빌었던 그 석불 앞에서 나는 어설픈 절을 흉내내며 무엇을 빌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 것도 빌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다만 관광객이 무시로 드나드는 번잡스러움을 피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암자가 있다는 걸 알고, 가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늘 그쪽을 흘낏거렸던 기억이 있다.

먼 데서 온 사람들이야 새벽길을 걸어 그곳 일출을 보지만, 성정상 어디를 가든 부러 일출을 보지는 않는 데다 외지인도 아니었던 나는 거기서 해돋이를 본 적은 없다. 내게 남아 있는 건 다만, 바위틈새마다 누군가가 놓아두었던 촛불들, 거대한 거북이 등딱지 같았던 절벽, 그리고 해를 향한 암자라는 이름에 걸맞고도 걸맞았던,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언제나 세상 끝인 것처럼 눈부셨던 햇빛.

무엇이건 빌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지척에 오랫동안 살았으면서도, 험한 길 핑계에, 늘 거기 있을 거라는 안일함이 더해져 몇 번 걸음하지 못했다. 이제는 아무 연고도 없는, 내 유년의 동네. 어린 내가, 청소녀인 내가, 말썽쟁이였던 이십 대의 내가 그곳에서 반쯤 타버린 것만 같은 기분. 불에 그슬린 나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곳에 오르기까지 걸었던 그 길만큼, 그곳에 머물렀던 그 짧은 순간만큼 내 삶이 조금은 더 쉬워지고 조금은 더 가벼워졌었던 거구나 깨달았다.

다녀온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슴에 저마다의 향일암을 하나씩 갖고 있을 거라는 위안으로는 모자라다. 그러니 지금은 다만, 추모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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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12/21 19:51 2009/12/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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