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리스 커버를 하나 사야 해서 검색하다 문득, 이삿짐 센터 분들이 했던 얘기가 생각나 주절거려 본다. 내 짐을 나르는 분들은 하나같이 책 권수에 놀라고(그래봤자 장서가 축에도 못 끼는구만 왜들 그렇게 놀라는지), 잡동사니 짐에 놀라고(취미생활이 너무 많은 건 나도 좀 문제인 것 같긴 하다), 살림 규모에 놀란다. 그들을 놀라게 하는 '살림'이란 대략 이런 것(하도 말들이 많길래 '혼자 사는 살림'은 어떤 거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품목이 조목조목 나오더라).

커다란 냉장고
'커다란'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크지도 않다. 500리터인가 600리터인가. 사실 지난 번 집에 들어갈 때 양문형을 사고 싶었는데 집이 좁아 도저히 안 들어가겠어서 좀 작은 걸로 샀다. 내가 처음 살았던 원룸에 있던 냉장고가 100리터가 안 되었고 두 번째 집에 들어가면서 샀던 게 200리터 정도 했으니 좀 커지긴 했네. 이 냉장고를 산 게 3년 전이니 당분간 개비하긴 글렀고 다음 집에선 김치냉장고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다.

커다란 세탁기
이것도 냉장고랑 같이 개비한 13kg짜리. 살림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냉장고랑 세탁기는 큰 게 장땡이라는 걸. 첫 직장에서 보너스 받아 엄마한테 김치냉장고 사 드릴 때는 몰랐던 사실을, 저 세탁기를 살 때는 알게 되었다. 드럼과 일반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드럼 산 사람 대부분이 후회하거나 일반 세탁기를 하나 더 산다는 친구 얘기에 일반 세탁기로 구입. 이 녀석이랑 냉장고 할부 대느라 6개월 동안 초절약(거짓말!!!) 모드로 지냈던 기억이 새록새록. (근데 이불까지 빨려고 큰 거 샀다면서 이불은 왜 안 빠는 거임?)

커다란 침대
독립했을 때 내가 처음 썼던 침대는 아는 사람이 쓰다 버린 철제 프레임 침대. 그 다음 집으로 이사할 때 싱글 침대를 하나 사서 내내 쓰다가 잠깐 오피스텔에 살 때 버리고 또 한동안은 요보다 조금 더 두꺼운 매트리스만 쓰다가 2년쯤 전에 퀸 사이즈를 새로 장만했다. 지금은 몰라도 아무래도 나이가 더 들면 싱글이 불편할 것 같아서. 싱글 샀다 버리고 다시 퀸 사려면 아깝잖아. 당시 안방에 공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프레임은 반평생 쓸 요량, 매트리스는 나중에 여유 되면 더 좋은 걸로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에이스로 질렀다. 그리고 혼자 살기에도 이력이 좀 붙으니까 싼 가구 사서 잠깐 쓰고 버리는 것보다 좋은 거 사서 오래 쓰는 게 더 낫더라. (근데 넌 싸구려도 오래 쓰잖아!)

커다란 책상과 의자
이거야, 오피스텔에 있을 때 공부하라고 그분이 선물해 주신 거니까. 그 때 이후로는 계속 잡동사니 거치대가 되어버려 좀 죄송한 마음이지만, 어쨌든 ㄱ자형 1800mm 책상이 작은 건 아니지. 스무 살, 하숙할 때 책상 대용으로 썼던 가짜 나전칠기 밥상이 만 원이나 했던가.

5단 서랍장
난 뭘 잘 못 버린다. 그나마 잡동사니는 이제 제법(뭐시라?) 버릴 줄 아는데 옷만은 예외. 20년 전 츄리닝이 아직도 서랍에 있고, 10년도 넘은 해진 면티를 아직도 입을 정도. 그래 옷은 사계절 통틀어 1~2년에 한 벌 살까 말까 한데도 옷은 늘 많다. 너무 많다(대개 헐어 빠져서 의류 재활용 함에도 못 넣는 것들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2단 행어를 설치하고도 5단 서랍장이 그득 그득. 물론 맨 아래 칸에는 가방 따위가 들어 있지만. 이 서랍장 역시 동네 잡화점에서 파는 플라스틱 5단 서랍장에서 진화한 것이다. 10년도 넘게 썼던 그 물건은 예전에 오피스텔로 이사할 때 겨우(?) 처분했다. 처분할 때까지도 멀쩡해서 버리기 정말 아까웠는데.

뭐 대략 이런 정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사람들이 내 살림에 놀라는 건 내가 혼자 살기 때문이다. 그들이 늘 하는 말. 자취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큰 거 안 써요. 이건 둘이 사는 살림이잖아요. 그럴 때면 난 (실제로 보지 않고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그!) 특유의 가증스런 웃음을 배시시 날리며 말한다. 혼자 살아도 살림이에요, 헤헤.

'자취'는 "손수 밥을 지어 먹으면서 생활함"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어느샌가 "혼인하기 전 잠시 혼자 삶"이라는 의미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직' 혼인도 안 한 처자가 이렇게 큰 세간을 부리고 산다는 데 놀라는 거고. 이런 선입견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은 게, 장차 혼인을 염두에 둔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면 새로 살 건데' 하는 생각(그러고 보면 결혼하면서 살림을 몽땅 개비하는 것도 내 입장에서는 참 미스터리다. 하긴 결혼에 얽힌 미스터리가 이뿐이겠냐마는;)에 가전이나 가구를 임시방편으로 마련하지 않냐 말이다. 하지만 '임시'로 쓸 거라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장기적으로 내 집 살림을 꾸린다고 생각하면 물건 고르는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커다란' 물건들을 이고 지고 사는 이유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집 크기나 구매력을 배제하고 하는 얘기다. 있는 집 자식 아니고서야 처음부터 몇 백 리터짜리 냉장고 들여놓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 돈도 돈이거니와 좁은 방구석에서는 이고 살 수도 없는데(크기만 문제겠나. 냉장고 소음은 또 어쩔 거야). 게다가 나는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세간이 적은 게 전부 앞으로의 혼인 걱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이들의 거주지는 대개 굉장히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사의 편이성을 위해 세간은 적게 두는 게 장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절주절 하는 이유는 딱 하나. 그저 난, '자취'하는 게 아니라 "혼자 산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누군가가 거두어줄 때까지 '임시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둘이 아니라 혼자 사는 거라고. 집이 크건 작건. 세간이 많건 적건. 아, 살면서 살림 하나씩 마련해 가는 재미가 혼인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얘기도 덤으로.

거 참, 매트리스 커버 하나 사려다 날 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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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0/06/29 14:53 2010/06/2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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