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행복한 왕자>는 계몽사 위인전집처럼 양면 하드커버에 내지는 아마도 2도 인쇄. 물론 어린이용 큰 글자. 그러나 형광 연두인지 형광 주황인지로 색을 입힌 삽화는 핀트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집에 읽을 책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엔 그거라도 감사할 따름. 볼 때마다 울게 돼서 자주 읽고 싶진 않았지만. 쩝. 왕자를 녹인 납덩이와 제비가 함께 있는 이미지가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건 그 책의 삽화였을지?

뭐뭐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집을 고르게 한 건 어릴 때 읽은 작품들의 원작을 찾아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 단편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텀블러 증정행사.

두 편의 단편집(<행복한 왕자>와 <석류나무 집>)을 붙여 펴낸 이 책은 작가가 "왕자와 공주는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세상의 동화들에게 "웃기시네!" 하고 비웃을 목적으로 펴낸 것만 같다. <행복한 왕자>가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 때문에 한 개도 안 행복해 했던 왕자라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넘어가자. 사랑하는 소녀와 춤추기 위해 장미꽃이 필요하다는 애를 위해 한겨울에 심장에 피 철철 흘려가며 꽃 피워줬더니만 그 은공도 모르고 장미를 홀라당 버려버리는 남자애(<나이팅게일과 장미꽃>)에다가, '친구'라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온갖 방법으로 부려먹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인간(<헌신적인 친구>), 공주가 자길 사랑하는 줄만 알고 신나게 춤췄지만 비웃음 끝에 마음이 찢어져버린 난장이(이 단어는 별로 쓰고 싶지 않다만; 쩝;)까지(<공주의 생일>) 이건 뭐 하나 웃으며 덮을 만한 작품이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별에서 온 아이>는 이런 얘기다.

별에서 온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애를 나무꾼이 주워다 키웠는데 얘는 생긴 건 예뻤지만 성격은 안 좋아서 거지 엄마가 찾아와도 외면했다가 그 벌로 흉칙하게 몸이 변했는데 그 때문에 깨우침을 얻어 엄마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우여곡절 끝에 왕비인 엄마를 만나 용서를 받고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그들은 아이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이를 궁전으로 데리고 가서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왕관을 씌우고 손에는 홀을 들려 주었다. 아이는 강가에 있는 도시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다스렸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자비심과 공평함을 보여주었고, 사악한 마술사를 내쫓았으며, 나무꾼 부부에게는 수없이 많은 선물을 보내고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는 새나 짐승에게 결코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빵을,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주었다. 평화가 자리 잡았고 땅은 비옥해졌다(226쪽).

원래 동화는 여기서 끝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와일드는 여기에 굳이 한 문단을 덧댄다.

하지만 아이는 그리 오랫동안 그 도시를 다스리지는 못했다. 고생을 너무 심하게 한 데다 너무 힘든 시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삼 년이 지나 아이는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뒤를 이어 다시 사악한 왕이 도시를 다스렸다(227쪽).

어쩌면 와일드는 "웃기고 자빠졌네"를 동화가 아니라 우리 사는 현실에 하려고 이 작품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19세기나 지금이나, 세상은 이런 것.

"전하, 전하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자들의 호사스러움 덕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옵니까? 전하의 허영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으며, 전하의 부도덕함 때문에 우리가 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옵니다. 가혹한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도 힘들지만, 봉사할 주인이 없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옵니다. 설마 까마귀가 우리를 먹여 살리겠사옵니까? 전하는 이런 일에 어떤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계신 것이옵니까? 아니면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가서 '그대는 훨씬 더 많이 사야 한다' 하고 말하고,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는 '그대는 이 값에 팔아야 한다' 하고 말씀하실 것이옵니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궁전으로 돌아가셔서 전하의 화려한 옷을 입으시옵소서. 저희가 고생하는 것이 대체 전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옵니까?(118~119쪽)"

2002년인가 2006년인가, 그 이전까지 월드컵 공인구-를 비롯한 유명짜 한 축구공-들은 제3세계 어린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하루종일 눈 빠지게 일해도 우유 한 통 살 수 있는 돈을 쥐었다나 못 쥐었다나.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아디다○는 바느질이 아니라 특수접착 방식으로 축구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와 같다. 그나마 있었던 알량한 벌이가 끊겨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늘었다는 거다.

이쯤 되니 이 책은 동화라기보다 논픽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젠장젠장젠장. (아니면 어릴 때 읽은 책은 당시의 추억으로만 가지고 있는 게 최선이라는 충고로 받아들여야 할까?) ...... <행복한 왕자>는 여전히 나를 울리지만, 이 쓰디쓴 책을 다시 읽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다. 내 눈물은 당분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혹은 같은 시대를 살다 죽어버린 생명들을 위해 흘려야 할 것이므로. 안녕, 오스카.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지음 / 김전유경 옮김 / 임프린트 펭귄클래식 코리아 펴냄 /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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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09/01/23 00:13 2009/01/2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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