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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07 헌혈 (부제: 실감) by etcetera (3)
처음 헌혈을 한 건 고등학교 1학년인지 2학년일 때였다. 학교로 찾아온 헌혈차가 무섭지 않았고, 주사도 무섭지 않았고, 친구들과 잠시 시간을 때우는 것도 재미있었다. 팔꿈치 안쪽이 며칠 동안 멍들었지만 피가 빠져 나가는 강렬하고 황홀한 느낌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피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좀 죄송하지만, 애시당초 내게 명분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왕창 피 뽑는 게 좋았을 뿐. 하여 적당함과 모자람을 오가는 헤모글로빈 수치 때문에 퇴짜를 맞은 적도 여러 번이고, 주위에 헌혈할 데가 없어서 못한 적도 또 여러 번이었지만, 시간이 있고 눈에 띌 때마다 고민 없이 헌혈의집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어제.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서성이던 중 헌혈의집을 발견하고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른 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작성하던 문진표에서 몇 가지가 걸렸다. 하지만 무조건이 아니라 '일부'는 할 수 없다 했으니 일단 간호사와 이야기를 해 보자는 심산으로 기다렸다.

"땡땡번 헌혈자님,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네. 혈압 먼저 재실게요."
"네. 그런데 문진표를 작성하다 보니 제가 문진 선에서 잘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니 왜요?"
"일단, 제가 오늘 채혈을 했구요,"
"채혈요? 왜요?"
"수술 전 검사로요."
"어떤 병으로요?"
"땡땡병으로요."
"아이구. 그럼 안 되세요."
"그렇군요... 하지만 현재 관련해서 아무런 치료도 약물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왜 안 되나요? 제가 병이 있는 걸 몰랐다면 헌혈이 가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단을 받으셨고 이젠 본인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세요."
"음. 그럼 수술을 받은 다음에도 앞으로 헌혈은 안 되는 건가요? 평생?"
"네."
"...그렇군요. 괜히 번거로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환자라는 걸 자꾸 까먹네요."

20여 년에 걸친 내 헌혈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열 몇 장의 헌혈증을 남기고. (그나마 남아있는 건 한 장뿐;) 정기회원으로 등록한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젠장. 게다가 밤중에 생각해 보니 몇 년 전에 피 뽑아 골수이식은행에 등록해 놨었는데, 이것도 이제 일치하는 환자가 나타나더라도 이식 안 시켜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때문에라도 조만간 탈락할 예정이긴 했지만; 아니 내가 무슨 전염병 보균자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좀 억울하지만, 입장을 바꿔 내가 수혈 받는 입장이라도 환자의 피나 골수라고 하면 좀 꺼려질 것 같긴 하다;

병명을 처음 들었을 때도, 수술날짜를 잡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내 몸의 일부가 누군가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맞이하고서야... 조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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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3/07 16:35 2013/03/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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