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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7 사직의 변 by etcetera (4)

사직의 변

그해 2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살아온 곳을 떠난 내 손에는 낡은 이민가방 하나와 이불 한 채가 들려 있었다. 이민가방에는 봄 옷가지 몇 벌과 책 한두 권, 헤어 드라이기, 생필품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저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았고, 다시는 '고향'에서 살 기회가 없으리란 걸 그 때는 몰랐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오롯이 혼자만의 살림을 시작했을 때, 냉장고와 책상 등등이 갖춰진 원룸을 채운 내 물건은 책 몇십 권과 작은 행거에 걸린 사계절 옷가지들, 일가붙이가 쓰다 버린 1인용 침대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살림은 불고 불어 책은 어느새 천 권이 되었고, 둘 곳이 없어 남의 창고 신세를 지고 있고, 몇백 리터에 달하는 냉장고는 언제나 만원이고, 나는 차렵이불 정도는 너끈히 빨 수 있는 세탁기를 주말마다 돌리고, 잘하면 세 명도 잘 수 있을 퀸 사이즈 침대에서 36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180도로는 돌면서 2단 행거와 5단 서랍장을 끼고 사는 서울시민이 되었다. 방 하나에 짐을 다 부릴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누군가 어떤 문제, 특히 관계에 대해 조언을 구해올 때면 나는 늘 이렇게 얘기한다. 참을 수 있으면 참으면 된다. 참을 수 없으면 떠나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것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그 선택으로 인해 놓치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놓쳐지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으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포기할 수 없으면, 선택하지 않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쥔 것이 너무 많고, 메워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다른 구차한 곳이 나타날 때까지는 이 구차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나는 불현듯 20년 전의 이민가방을 떠올렸다. 겨울에도 찬물에 머리를 감으며, 아주 가난하게 살 거라고 마음 먹었던 순간도 떠올렸다.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일할 데가 없었을 때, 한국사회에서 서울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밥벌이가 없어 굶어 죽을 확률은 어마어마하게 낮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자신만만했던 때도 떠올렸다.

원하는 만큼의 내 공간과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려고, 원할 때는 언제든 책을 사 읽고 온갖 취미를 누리려고, 부모님께 몇십 내지 몇백 단위의 돈쯤은 호기롭게 드리려고, 예상치 않았던 일정 규모의 지출도 그달 그달 충분히 감당해 내려고, 다른 많은 것들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 모든 것들을 좀 놓아버려도 괜찮겠다, 는 생각이 드는 건, 마침내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 나는 지금보다 좀 더 행복해지는 길,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을 더 이상 포기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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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6/17 15:24 2013/06/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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