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며칠은 열심히도 쓰던 일지는 여행 열흘이 넘어가며 초 간단하게 바뀌고 있다. 이날의 기록은 이렇게 되어 있다.

8/11 안녕 페루 안녕 볼리비아

새벽에 푸노 도착. 우로스 투어. 코파카바나 도착. 물가 싼데 따신 물 잘 안 나오고 와이파이 잘 안 됨. 옆방 소리 다 들리는 방. 전기온수기 쓰다 감전될 뻔. 고산증세에 시달림. 망할 놈의 환율.

그러니 이제 기억을 더듬어 살을 붙여야 한다. 그날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그날 밤, Cruz del Sur 터미널에서 L님과 작별했다. L님은 집이 그 근처라며 버스표도 미리 끊어주고(심지어 가장 좋은 자리로 불리는 2층 맨 앞자리), 그 귀하다는 신라면 컵과 소세지 두어 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늘 혼자 다니는 데 익숙해서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말 그대로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는; 한국에 돌아오면 맛있는 걸 많이 사주겠다 했는데 여전히 해외를 떠도는 L님;

밤차는 해 뜰 때까지 좀 길게 길게 갔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도 다섯 시간 만에 푸노 도착. 그 유명한 티티카카 호수를 보고, 호수에 갈대를 엮어 섬을 만들어 산다는(실은 ‘살았다는’) 우로스 섬을 탐방한 다음 볼리비아로 넘어갈 참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몇 군데를 돌아 오후에 볼리비아로 넘어가는 버스를 예약하고 배낭을 맡겼다. 그런데 앗, 터미널 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볼리비아는 공중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고 하던데, 국경지대라 그 문화가 들어온 건지, 물부족 지역(아이러니하게도 티티카카 호수 근방은 물이 부족한 지대라 함)이라 그런지. 그러나 공짜로 화장실 쓰던 사람에게 돈 내고 쓰는 화장실이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 일단 참기로 했다. 밖에 나가면 더 싸거나 공짜인 화장실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 그리고 푸노 구경을 나갔다가... 결국 더 비싼 돈 주고 화장실을 쓰게 되었다는;

우로스 섬 투어는 여행사를 끼나 안 끼나 비슷한 가격이라고 한다. 터미널에 30솔인가를 부르는 삐끼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이들은 우로스 여행부터 볼리비아 티켓까지 세트로 판매하는 경우가 많음) 굳이 상대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해안, 아니다 호안을 따라 걷다 보면 나오는 선착장에서 배 티켓과 입장권을 구입하면 된다. 20솔인가 25솔인가 들었던 듯(가계부가 날아가서 확인 불가. 흑)

우로스 섬은, 갈대섬으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하는 섬이다. 예전에 쫓기던 우로스 족이 티티카카 호수로 들어가 갈대로 섬을 만들고 살았다고 하는데, 우로스 족은 이제 없고, 페루 사람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며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한다고; 그래도 갈대섬 밟는 경험이 흔한 건 아니니까 뭐.

멀리서 본 갈대섬
<멀리서 본 갈대섬>

배에서 내리면 폭신한 땅(?)이 밟히고, 섬의 주인(?)이 나와서 갈대섬의 원리에 대해 (물론 에스파냐어로) 설명해 준다. 뭐 잘 모르겠고, 물에 닿은 갈대가 삭으면 새 갈댓단을 위로 계속 쌓는다는 얘기일 거다(론리인가에 그렇게 나왔다).

갈대섬 바닥과 쥔장의 그림자
<갈대섬 바닥과 쥔장의 그림자>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그 설명에 있지 않다. 관광객용으로 특별 제작한 배, 그러니까 민속배도 아니고 뭣도 아닌, 정체불명의 퓨전 배를 섬 옆에 대더니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돈을 내고 타란다. 다들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는 와중, 갈대섬 밟는 데 의의를 둔 나와 돈 없다는 브라질 청년만 그 섬에 계속 있겠다는 의사를 표시. 그랬더니 우리에게 슬쩍 다가와 깎아줄 테니 타란다. 못 이기는 척 그러마고 탔더니 다른 섬으로 이동한 후 풀어준다. 보아 하니 카페 섬이다. 뭐 사 먹고 사 입으라 이거지. 산책하고 고양이랑 놀고 다른 사람들이랑 말도 좀 섞고 하다 돌아왔는데, 슬슬 편두통이 찾아왔다. 이것이 고산병 증세로고. 약을 먹었지만 큰 도움은 안 됐다. 그저 시간이 지나 몸이 적응하길 바랄 수밖에.

기원불명 정체불명, 우로스섬의 배
<기원불명 정체불명, 우로스 섬의 관광객용 배>

티티카카 호수의 녹조라테
<티티카카 호수의 녹조라테; 아까 그 파란빛 물과 같은 호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버스로 국경을 넘는 건 처음 겪는 신기한 일. 우왕좌왕 하다가 도장을 하나 빼먹긴 했지만 어쨌든 볼리비아. 코파카바나다.

밤에 도착한 코파카바나는 그 유명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티티카카 호수보다는 흙먼지바람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옛날 ‘신작로’ 같던 거리들. 페루에서 넘어온, 혹은 볼리비아에서 넘어갈 그 많은 버스들이 씽씽 달리면 뒤에는 한참동안 모래먼지가 날렸다. 호숫가 역시, 그렇게 건조할 줄이야.

블로그 몇 군데서 추천해 준 숙소에 들러보았으나 방이 없거나 흥정이 안 되거나 너무 비쌌다. 그래도 다행히 호텔 싱글룸 하나를 얻어 이틀을 묵기로 했다. 방은 나쁘지 않았고, 호텔답게(!) 수건이랑 비누 등도 구비가 되어 있었지만 옆방 소음이 잘 차단되지 않는 건 단점. 그래도 추/비추를 선택하라면 ‘추’ 쪽으로 기울 뻔했으나... 전기온수기 샤워 후 물을 잠그려고 수도꼭지에 손을 댔다 가벼운 감전을 경험한 후 ‘비추’로 바뀌었다. 그것만 빼면 가격도 나쁘지 않았고, 주인도 친절했고, 아침도 주고 좋았는데. 이때 식겁해서 그 다음 날은 머리는 감지 않고 찬물에 샤워만 했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방이 좋거나 싸더라도 전기온수기가 달린 숙소는 잡지 않았다. (볼리비아는 전체 인구의 25% 정도가 극빈층이고, 당연히 온갖 물자가 풍족하지 않고, 당연히 가스 시설 등이 잘 갖춰지지 않아 성능 떨어지는 전기온수기가 비교적 흔한 편이다.) 실제로 전기온수기 감전사례도 있다고 하고.

호숫가에 왔으니 물고기를 먹어야지. 얼마였더라... 아무튼지 간에 아주 싼 가격에 디저트까지 나오는 물고기 정식을 먹고 태양의 섬 투어(정확히는 왕복 뱃삯)를 예약하고 들어와 잠들었다. 국경 넘을 때 환율이 아주 개판이었는데 페루랑 완전 비교되는 물가 때문에 마음이 풀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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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7 13:11 2014/08/2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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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님이 그랬다. 모라이 살리나스 투어는 돈 아깝지 않다고.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어려운 곳들이기도 하고, 25솔(L님은 22솔에 갔다고 함)이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 그 전 날 신청해 둔 참이다. 아침을 먹고 짐 챙겨서 체크아웃한 뒤 성당 한 바퀴를 돌고 어제 예약한 여행사 앞에 서 있었다. 어제 내 예약을 받은 사람은커녕 약속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여행사 문을 열러 오는 사람조차 없다. 이게 뭔가 싶었지만 기다리는 것 외에 별 뾰족한 수도 없기에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려니 드디어 웬 아저씨가 데리러 와서 웬 이상한 데로 데려가 또 웬 이상한 버스에 태우더니(이 모든 과정이 뭔가 빚 때문에 어디 식모로 팔려가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게 했다. 혼자 여행하는 + 현지어 못하는 여자의 비애.) 교외로 교외로 나간다. 아 그런데 영어와 스페인어를 번갈아 하는 가이드의 발음을 전혀 못 알아듣겠다. 아롱, 마운탱, 마이 프렝... 설상가상 차량소음 때문에 당최 어디서 스페인어가 끝나고 영어가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어 결국 안내는 포기. 밖에 보이는 풍광에 만족하기로 한다.

데이투어는 전 세계 어디나 똑같은지, 처음 들른 곳이 민속마을 비스무리한 데다. 웬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더니 옛날 시골집 같은 마을로 인도하기에 들어가 보니 여러 가지 직조한 물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하하. 어김없이 공짜 차도 한 잔씩 돌았다. 당최 그런 물건을 살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언감생심, 배낭족이 그런 사치가 웬 말인가. 눈으로 호사만 부렸다. 여기처럼 거기도 바가지를 씌우는지, 직접 짠 건지 어디서 떼 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기(한국) 장사치들보다 한참은 착해 보였다. 화장실도 맘껏 쓰게 해주고.

모라이는, 잉카인들이 작물을 시험재배하던 곳이라 한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위도에 따라 작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실험했다나. 사진으로 보면 별 감흥 없지만 사람들 크기와 비교해 보면 이 규모도 웬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저런 구멍(?)이 총 다섯 개 있고,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면 산책하고 사진 찍을 시간을 준다.

모라이
<거대 분지 모라이>

그러고 나면 살리나스로 가는데, 산 속 염전이다. 사람들이 흔히 터키 파묵칼레 같다고 하는데, 파묵칼레(나 여기도 가봤지롱)의 흰색은 돌이고, 여기 흰색은 소금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짠물을 받아 소금을 만드는데 슬쩍 맛봤더니 정말 정말 짰다. 뭐, 모르고 맛본 건 아니지만;

살리나스
<산 속의 염전, 살리나스>

쿠스코로 돌아오니 네 시쯤 되었나. 시장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사람 입이 간사한 건가? 어제만큼은 맛이 없더라는; 그러고서 시장을 도는데 얼굴에 얼룩이 덕지한 아이가 눈에 띈다.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기 뭐 해 갖고 있던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흔치 않은 광경인지, 그러니까 뭐가 흔치 않은 광경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모여 쳐다본다; 나란 존재 자체가 신기했던 걸까 내 행동이 신기했던 걸까 물티슈가 신기했던 걸까 애가 얌전히 있는 게 신기했던 걸까. 아 그런데 너댓 살 정도 돼 보이는 이 녀석이 나한테 앵기더니 당최 안 떨어지려고 할 줄이야; 결국 일행(이 있는 줄도 처음엔 몰랐다;)인 할머니가 데리고 가고서야 상황종료.

푸노행 밤차를 타면 쿠스코는 오늘로 안녕이다. 그때 생각난 게 하필 스타벅스라니. 그래도 그 고풍스런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은 마시고 가고 싶었다. 헉, 그런데 아메리카노 작은 게 7.5솔? 내가 좀 전에 먹은 달걀밥이 3솔이었는데?!!!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돌아나왔다. 아니 저런 걸 난 한국에서 어찌 거의 날마다 먹었던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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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2 09:25 2014/08/2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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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기차 타러 나갈 채비를 하는데 호스텔 아저씨가 여덟 시라며 깨우러 왔다. (원래 깨워주고 그런 시스템 아니다. 이 동네 체크아웃도 보통 아침 아홉 시나 열 시다.) 에스파냐어로 뭐라 뭐라 하는데 모르겠고, 그저 간밤의 일이 거듭 미안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뺨 부비부비를... 흑.

기차 타고 왔던 길을 달려 오얀타이탐보에서 아무 콜렉티보나 골라 타고 쿠스코로 돌아왔다. 원래는 올 때든 갈 때든 시간을 내어 오얀타이탐보 구경을 조금이나마 하려고 했었는데 결국 기차역 구경만 하고 왔다는; 쿠스코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 있었다. 정처 없이 길을 걷다(그렇다, 쥔장은 맨날 ‘정처 없이’ 길을 걷는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제일 아까워하는 인간이, 조금만 걸어도 발목과 발바닥에 무리가 가는 인간이, 밖으로만 나가면 하염없이 걷는다) 마침 ‘사이판’이라는 이름의 중국식당 발견. 아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지. 나는 사이판에 세 번 다녀온 사람이고, 사이판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고, 사이판에서 중국집은 안 가본 사람이고, 서브웨이와 파스타집, 일본라멘집만 다니는 사람인데 지구 반대편에서 사이판 중국집을 발견하다니. 아 그래, 이건 서울에서 ‘여수횟집’ 간판을 본 기분과 비슷하다. 그러니 메뉴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들어가야지. 대충 허기를 채우고 산 페드로(San Pedro) 시장 구경에 나섰다. 기념품, 과일, 잡화, 식료 등등을 파는 안쪽에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다. 상인들이 추렴해서 간판을 통일했나 보다. (이 집에는 있는 메뉴가 저 집에는 없는 경우도 있긴 한데, 메뉴에 없어도 옆집에서 해 주는 건 다 해줄 것 같은 느낌) 아니 그런데 이렇게 쌀 수가! 내일은 꼭 여기서 밥 먹을 테다. 메뉴판 사진 찍어 와서 스페인어 사전 찾았다구!

쿠스코 시장의 메뉴판
<산 페드로 시장의 메뉴판>

어제의 등산 덕에 허벅지 근육이 다 터졌는데 그래도 컨디션이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끙차 소리가 절로 나긴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볼리비아 영사관 가서 비자를 받았다. 다른 분들 블로그를 보니 비자 받기 어려웠다는 사람도 간혹 있었는데 나는 “서류 가져왔나요?” “네.” “이거 작성하세요” 하고 서류 작성하고 있으려니 그새 여권에 비자 찍어서 주더라는. 아무래도 복불복인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앞에서 초인종 눌렀는데 2층에서 언니야가 커튼 열고 기다리라고 했을 때 짜증 안 내고 문 열어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서인 것 같기도 하다, 흐흐. 비자 받기에 성공한 후 다시 시내로 나와 모라이 투어 예약하고 현금을 좀 찾았다. (카드로 찾았는데 현금서비스인 거 알고 완전 짜증나서 포스트 또 올림) 오전 중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다니 짝짝짝! 오늘은 쿠스코에서 하루 종일 놀기로 했으니까 시내 구경이랑 시장 구경을 해야지.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에 큰 성당이 두 개 있는 건 쿠스코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신자가 아니라 큰 감흥은 없고, 오히려 고풍스런 건물 2층에 자리한 스타벅스가 더 신기했다.

쿠스코 스타벅스
<쿠스코 스타벅스>

시골이라더니, 한국 시골에는 스타벅스 없다구요.

어제 결심한 대로 산 페드로 시장에서 3.5솔짜리(1500원도 안 된다) 달걀밥을 사 먹었다. 밥 위에 달걀 프라이, 감자튀김이 올라가 있고, 나름 양파, 토마토 같은 채 썬 채소들이 사이드로 얹혀 있다. 만족 만족 대만족. 단언컨대 이 달걀밥은 페루에서 사 먹은 것들 중 가격 대비 가장 훌륭한 음식이었다. (쥔장 식성이 원래 일품음식 좋아하고 반찬 많이 안 먹음) 저녁에는 L님을 만나 현지인들이 가는 소심장 꼬치구이 가게에 갔다. 내가 편식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L님은 내가 과연 그걸 먹을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돼지염통도 먹는데 소심장은 못 먹을 리 없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사실, 심장은 근육이라서 식감만 따지자면 닭가슴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콜라겐의 식감을 못 견디는 내게는 맞춤인 음식이었던 셈.

L님 덕에 일개 여행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현지인 식당도 가 보고, 작고 예쁜 기념품 가게도 가 보고, 혼자라면 안 들어갔을 카페도 가 보고, 혼자 다녔을 때보다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래서들 친구가 필요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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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8 10:52 2014/01/2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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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트레일의 포터들

저 사진의 주인공은 기찻길이 아니다. 일명 ‘도촬’로서, 이날 나는 산에서 내려와 말과 글로만 듣던 포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추픽추의 포터에 관해서는 이 글 참조) 저 작은 체구에, 암만 봐도 25kg은 넘어 뵈는, 키를 넘어선 짐. 저 순간엔 어떤 수사나 합리화도 도움 되지 않았다. 그저, 저들이 지고 있는 것이 내 짐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마추픽추와는 별개로 ‘마추픽추 마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다. 생계를 순전히 마추픽추 관광객들에게만 기대는 작은 마을은 ‘특색’이랄 게 없는 것 같다. 모든 음식점의 메뉴가 대동소이(피자, 파스타)하고, 가격대 역시 비슷하다. 다른 데라면 어떻게든 피해 다녔을 식당/술집 삐끼들도 피할 수 없다. 아무튼, 산에서 내려와 늦은 점심을 하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 가격만 봤을 때는 좀 비싸지만 이 정도는 쓰지 뭐 하는 기분으로 주문했는데 결제할 때 되니까 서비스 피인지 택스인지 블라블라 하면서 7달러를 더 뜯어갔다. 손바닥만 한 생선 한 마리에 45솔(18,000원쯤)이라니. 미리 말해 줬으면 안 갔을 텐데, 왜 미리 말을 안 했는지 아니까 더 기분이 나빴다.

참고로,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식사할 수 있는 곳은 광장의 중국집이다. 이름은 잊었으나 광장에 면해 있고, 빨간 등으로 중국집임을 짐작할 수 있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2층 가게. 해외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중국음식을 팔고, 채식주의자 메뉴도 별도로 있다. 나는 채소볶음면을 먹었는데 스파게티 면을 몇 가지 채소와 함께 볶은 간단한 음식이지만 양도 엄청 푸짐했고 탄산음료까지 해도 17솔이던가? (이날 저녁 먹은 기록이 없다. 어쩐지, 페루 나오면서 가계부 정리하는데 돈이 좀 비더라니;) 그 정도밖에 안 했다. 20솔이 안 돼서 카드결제를 거절당했다는 게 한 가지 흠(?)이었지만.

내일 아침엔 다시 쿠스코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 일찌감치 자려고 누웠는데 8시 반쯤 호스텔 주인이 문을 두드린다. 어제 리셉션에 있던 사람이랑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이 주인, 오늘치 방값을 달란다. 으잉? 어제 체크인 할 때 이틀치 지불했는뒈요; 이럴 때를 대비해 어제 영수증 달라고 해놓길 잘했다. 엣헴, 하고 영수증을 짠 보여주는데 헉, 왜 50솔이라고 쓰여 있음? 영수증을 달라고만 하고 금액확인을 안 한 내 불찰이다. 아 짜증. 설상가상, 이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못한다. 서로 열나 자기주장을 펼치다가 다시 생각난 것이 구글번역. 겨우 어제 그 남자한테 지불했으니 찾아서 물어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오케이, 확인 후 아홉 시에 다시 오겠노라는 아저씨. 일이 잘못 됐을 경우를 대비하여 구글번역에 돌릴 분노의 영작을 시작했다.

내가 어제 방 잡을 때 리셉션에 있던 그 남자한테 이틀 묵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남자가 이틀치 방값을 지불하라더군요. 그래서 100솔을 줬어요. 제가 만약 하루치만 지불했다면, 제가 아침에 나갈 때 왜 제 짐을 여기다 뒀겠어요? 저는 더 싼 방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솔직히 전 더 싼 방으로 옮기고 싶었어요. 하지만 미리 돈을 지불해서 그럴 수가 없었죠. 사실 말이죠, 이런 상황이 있을지도 몰라서 영수증을 요청했었어요. 그런데 영수증 금액을 확인하지 않았네요. 그건 제 실수예요. 그 남자가 제 앞에서 영수증을 써 줬는데 그게 잘못됐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죠. 좋아요, 만약 그 사람이 100솔을 안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제가 숙박비를 두 번 지불하죠. 밤도 늦었고 다른 숙소를 찾기도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당신은 그 사람 해고해야 할 거예요, 알겠어요?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니까요. 틀림없이 또 다시 당신을 속일 겁니다.

그 와중에 마침 L님이 메시지를 보내 주셔서 중계 시작; 거기가 어디라고, 곧 달려올 것처럼 걱정해 주었다. 덕분에 용기백배. 에잇, 내 구글번역의 도움을 받아 이 사기꾼들을 반드시 물리치고야 말겠다!

그러나 이 황당한 사건의 결말은 참으로 싱거웠으니... 9시에 찾아온 아저씨는 대뜸 뭐라 뭐라 하며 내 뺨에 자기 뺨을 부비부비 한다. 확인했다는 뜻인 것 같으니 평소 부비부비 인사를 싫어하더라도 좀 참자. 그런데 음, 거짓말쟁이... 사기꾼... 직접 한 얘기는 아니지만 좀 미안하다. 착오의 가능성보다는 사기의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인 건 맞았지만, 그래도 너무 단정해 버린 감이 있다. 그와 별개로, L님 말씀대로 세상은 구글이 구원하나 보다. 다시 한 번 구글번역 만세 -_-;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 덕분에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 대한 인상은 극도로 나빠졌으니... L님에게 기찻삯을 더 지불하더라도 마추픽추는 당일치기로 (당일치기가 가능한 시간대의 기차표는 더 비싸다) 다녀가라고 신신당부해 두었다. 어쩌면 추가로 기찻값을 내더라도 아구아스에서 바가지 쓰는 가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싼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일정에 대한 조언을 구해 오더라도 똑같이 얘기할 것이다. 나 역시,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확률이 크지만 다시 마추픽추를 가게 되더라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에서 머물지는 않으리라. 먹을 것도 쿠스코에서 다 싸올 거다, 흥. 어쨌든 덕분에 잠 다 깨서 열한 시 넘어서야 다시 잠들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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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3 13:52 2014/01/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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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번째 자발적 등산은 약 10년 전, 태백산이었다. 회사 관두고 싶다고 난리 친 끝에 일주일 휴가를 받아 울릉도에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는데, 인터넷이고 뭐고 제대로 안 되던 시절인지라 묵호항에서 출발하는 울릉도행 배는 하루 한 번 오전에만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 리가. 어찌 할까 고민하다 그 길로 오후 기차를 타고 태백으로 갔다. 왜 태백이었는지는, 글쎄다, 내 무의식이나 기억할까. 광부들의 사택을 개조해 만든 콘도형 민박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무식해서 용감하게) 아이젠도 없이 산에 올랐다. 주머니에는 이소라 4집이 든 CDP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숙소에서 발딱 일어나 ‘지금 나갈까? 아냐, 지금 나가기엔 너무 일러. 날도 추운데.’ 하다가 맞춤한 시간인 것 같아 (그래봤자 여섯 시나 좀 넘었을까) 나가보니 헐, 이미 긴 줄이 형성돼 있다. 한 명을 붙잡고 “이거 버스 티켓 줄인가요?” 했더니 끄덕끄덕 해서 줄 끝으로 가서 대기. 아 그러나 한참을 기다린 내 앞에 보인 것은 매표소가 아니라 버스였으니... 버스표는 저~쪽에서 구입해 왔어야 한다는; 내 발음 그렇게 후지지 않았다고. (발음이 후질 만한 단어가 없잖아;) 그냥 못 알아들었다고 할 것이지 끄덕끄덕을 왜 하냐고! 어쨌든 덕분에(!!!) 우다다다 달려 매표소 가서 표 사고 다시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우쒸.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와이나픽추는 건너 뛸 생각이었다. 올라가려고 예약을 해 두긴 했지만 이 몸으로는 무리인 것 같았다. 게다가 악명이 워낙 높아야 말이지. 그런데 막상 마추픽추에 들어가니 할 게 없었다. 음... 그럼 입구만 살짝 구경해 볼까? 하는 생각으로 와이나픽추 화살표를 따라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새로운 관문이 나를 맞고, 7시 예약자들이 삼삼오오 들어가고 있다.

와이나픽추. 마추픽추가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고 와이나픽추는 젊은 봉우리라는데, 그 네이밍에 지리학이 개입한 것 같지는 않다. 페루정부는 마추픽추의 하루 입장객을 2500명으로, 와이나픽추의 입장객을 400명(오전 7시, 10시 각 2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와이나픽추에 올라가려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능력 좋은 현지 여행사는 임박해서도 표를 구해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나는 거의 한 달 전 한국에서 예매했기 때문에.)

와이나픽추의 위용
<와이나픽추>

저 사진 뒤쪽에 우뚝 선 봉우리가 와이나픽추다. 그 아래 헛간처럼 생긴 건물과, 그 근처 개미만 한 사람들이 보이는지. 그로써 저 산의 규모와 경사가 가늠 되시는지? 헥헥.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입구만 보고 가는 건 좀 서운하다. 저 문은 넘어보자 하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갔다. 표를 검사하고 노트에 이름과 여권번호, 입산시각 따위를 쓰라 한다. (나올 때는 들어갈 때 썼던 이름 옆에 하산시각과 사인을 써 넣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고관리' 때문이지 싶다 --;) 그런데 내 바로 뒷사람 두 명이 표 없이 왔다가 돌아나가는 광경 목도. 음, 저 사람들은 가고 싶어도 표 없어서 못 올라가는데 내가 여기서 바로 나가면 좀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럼 조금만 가볼까? 힘들면 돌아오면 되지 뭐. ...(중략)... 모두가 말한 그대로였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등산은 아니나 한 시간 동안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내려와야 하는 곳도 와이나픽추. 마추픽추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곳도 와이나픽추. 성취감 끝내주는 것도 와이나픽추.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은 절대 가면 안 될 와이나픽추. 별 거 아님. 진심 실족사만 주의하면 됨 -_-; (이렇게 엄살 떨었지만 막상 올라가서는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이도 보고, 70세는 되신 것 같은 할머니도 뵙고 그랬다;) 나중에 보니 양쪽 무릎은 다 까지고 내가 미쳤었지 싶었지만, 잘 미쳤었다. 뭘 해도 다섯 시간을 위해 수백만 원을 들여 스무 시간을 날아온 미친 짓보다야. 암.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본 마추픽추 전경
<와이나픽추에서만 찍을 수 있다는 마추픽추의 전경>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길이 마추픽추 전용 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버스값이 왕복 2만 원 돈인지라 돈 없고 체력 좋은 이들은 걸어서 오르내리기도 한다.)

와이나픽추 표지
<와이나픽추 인증. 해발 2693미터>

와이나픽추에서 내려오니 열 시 팀들이 입구에 옹기종기 앉아 있다. 떡실신(;) 된 우리를 보고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 미소를 보여준다. 아아, 행운을 빌어요!

이제 뭘 한다? 그냥 떠돌았다. 가이드도 해설서도 아무 것도 없이. 거기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있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뱅뱅 돌았다. 그분이 사진 많이 찍으라셔서 (이럴 때만 말 잘 듣는다) 사진은 잔뜩 찍고.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도 왠지 혼자 거기 있는 느낌이 든다. 실제 찍은 사진을 봐도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되레 고즈넉한 느낌이다. 신기하다. (물론 세계 어디에나 진상은 있다.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노래 부르고 떠들고 다니길래 한국말로 조용히 "니네 어제 기차에서 떠들던 걔네지 __+" 했더니 삽시간에 조용해지더군. 곧이어 대체 우리가 지금 들은 말은 어느 나라 말일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하더라는, 흐흐.)

마추픽추 전경
<모두들 찍는 그 각도에서 찍은 그 사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돌을 다룬 방식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땅에서 솟아 파낼 수 없을 때는, 그 바위를 초석 삼아 벽을 만들었다. 돌 두 개의 아귀가 맞지 않을 때는 잘랐는지 갈았는지, 아니면 서로 어울리는 돌을 찾아내었는지, 어쨌든 서로 맞추어 담을 쌓았다. 피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함께 흘러가기. 그러면서도 내 중심은 잃지 않기. 어쩌면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충고.

마추픽추의 정교한 담벼락
<마추픽추의 벽>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건, CCTV와 관제탑이 아니라 사람이 관리하도록 한 방식. ‘최첨단’ 시설을 들이기에는 돈과 기술이 부족했을까? 고용창출이 선결과제였을까? (안전요원이 생각보다 엄청 많다.) 글쎄,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 기막힌 잉카의 후손들이 최대한 유적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무렴, 마추픽추 관광객이 페루 전체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마추픽추의 안전요원
<마추픽추의 안전요원>

점심이 지난 어느 순간, 드디어 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냥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내 생일이다. 음력으로 쇠는데(‘내’가 쇠는 건 아니다),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양력-음력 생일이 겹치는 날이기도 하다. 생일선물 참 거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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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2 10:40 2014/01/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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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에서 잉카의 수도 쿠스코(Cuzco)까지는 14시간이 걸린다. 그 열네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산 넘고 또 산 넘고 또 산 넘고, 점점 높아지고 달리는 건 버스인데 내 숨도 차고, 창가에 둔 물병이 빵빵해졌다 쪼그라들기를 반복하고, 그럼에도 바깥 풍경은 혼자 보기 아깝게 멋있고.

쿠스코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저기가 쿠스코라는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마치 어릴 적 할머니 동네에 온 듯, 기와집도 있고 전체적으로 예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품위와 위엄이 느껴진다. 도시 전체에 후광이 걸린 것 같다.

쿠스코 가는 길
<쿠스코 가는 길>

마추픽추는 이맘때가 성수기라서 쿠스코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두었다. 이름이 예쁘고, 여자들이 주로 있을 것 같아서 선택한 마마 시모나. 마마 시모나 산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소는 나쁘지 않았다. 서둘러 짐을 풀고 볼리비아 영사관을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 찾기 어렵다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라 나 역시 엄청 헤맸다. 현지인도 모르는 길목에 있을 게 뭐람. 그 근처를 한 시간 이상 헤맨 끝에 겨우 찾았으나 으아악, 업무시간 종료! 할 수 없지. 마추픽추 다녀온 다음에 다시 가야 한다. (볼리비아 영사관 찾아가는 방법은 여기 클릭)

저녁에는 드디어 L님을 만나 저녁을 얻어 먹고, 잠을 청했다. 내일은 마추픽추 턱 밑까지 이동한다.

아침에 일어나 미니 버스(콜렉티보)를 타고 기차역이 있는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 도착했다. 이 기차가 마추픽추 턱 밑에 있는 작은 마을 아구아스 칼리엔테스(Aguas Calientes)에 데려다 줄 것이다. 그런데 기차는, 기차는... 그 옛날 경춘선이 떠오를 정도로 시끄러웠다. 놀러 간다고 들뜬 마음에 관광열차, 거기에 머릿수가 합쳐치면 가공할 만한 소음을 만들어낸다. 아아 이건 좋지 않은 징조야, 절레절레.

가끔 나는 정말 바보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있는데,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나는 왜, 성수기라고 쿠스코 숙소는 미리 예약해 놓고 정작 이틀이나 잘 예정인,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숙소는 알아볼 생각도 안 했던 걸까? 몇 군데 게스트하우스에 들렀지만 남아 있는 도미토리가 없다. 겨우 남아있는 70솔짜리 싱글룸도 하루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러다간 경찰서 가서 하룻밤만 재워 달라 사정해야 할 판이다. 대체 같이 기차에서 내린 그 많은 여행객들은 다 어디서 짐을 푼 걸까. (사실 이건 새로운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궁금하다;) 다 포기하고 경찰서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골목에 있는 호스텔 간판이 보인다. 론리에도 나와 있는 호스텔 존(John). 1박에 60인가 70솔을 불렀는데 이틀 잘 거라고 하니까 100솔로 퉁쳐 주었다. 하루에 이만 원 돈이니 어차피 선택의 여지도 없고, 이곳이 물가가 비싼 곳이라고는 해도 한국 모텔값에 비하면 싼 편인지라 그냥 감사히 들어가기로 했다. 쿠스코의 30솔 도미토리 따위는 잊어라! 며칠 (그래봤자 이틀) 도미토리에서 고생했으니 좀 쉬라는 계시로 이해하기로 했다. 시장에서 이것 저것 사다가 방에서 와구 와구 먹고 마실 테닷.

방 잡기 좀 전부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오후가 되니 제법 온다. 페루에서 처음 맞는 비다. 그나저나 이 상태라면 내일 와이나픽추는 못 올라가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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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0 14:50 2014/01/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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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일어나서 체크아웃. 늦게 잠든 젊은이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나는 얼른 나스카라인을 해치우고(?) 쿠스코로 이동해야 한다.

1층 사무실에 갔더니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아저씨 직원이 앉아 있다. 저 간다고 했더니 내 숙박 카드를 보며 어쩌구 저쩌구. 숙박비 냈다는 소리인 것 같아 어제 현금으로 냈다고 하는데도 계속 중얼중얼 하며 8시에 직원이 오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 한다.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라고? 왜? 여기 무슨 호텔임? 나갈 때 물건 검사하고 그런 거임? 아니면 내가 돈을 안 냈다고 되어 있는 거? 어쨌든 나는 8시까지 기다릴 수 없다고. 바쁘다고! 10여분 동안 서로 한 얘기만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뻗쳤고, 상대방도 적잖은 흥분에 빠졌을 무렵, 나는 기적적으로 구글번역을 생각해 냈다. 한국어-영어 번역은 이상할 때가 더 많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인 영어와 스페인어 간의 기계번역은 훨씬 이해할 만할 것이다.

아이패드에 창을 띄우고 영작 시작. 저 어제 돈 냈어요. 알겠단다. 그럼 제가 왜 여덟 시까지 기다려야 하죠? 노! 하더니 가라는 손짓을 한다. 아우 정말... 서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포옹하고 마침내 호스텔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도 그분이 무슨 얘길 하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 궁금해.

나스카까지는 싸디 싼 소유즈(Soyuz) 버스를 탔다. 이쪽 동네만 운행하는 버스회사로, 호스텔도 겸업하고 있다. 두세 시간을 가는데 5,000원 정도니 엄청 싼 표다. 대신 서비스도 허술해서 고속버스가 아니라 시외버스 같다. 짐 표도 제대로 관리 안 해줘서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도 이동시간이 얼마 안 되니까 감수할 만하다.

나스카라인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 거기 라인 같은 게 있는지 모르고 뚫어버린 아메리카 대륙 관통 고속도로 가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면 두세 개의 라인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경비행기를 타고 죽 둘러보는 것. 당연히 경비행기 쪽이 좀 더 인기 있고 비싸다. 이왕 보는 거 경비행기를 타기로 진작 마음먹었는데, 나스카라인을 보겠다는 욕심보다는 경비행기를 한 번 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스카 터미널에 내려 쿠스코 가는 표를 먼저 끊으려는데 헉, 두세 군데 들렀음에도 오늘밤 표가 없단다. 일단 표를 확보해 놔야 뭘 해도 마음이 놓이기에 다른 버스 회사로 이동하려는 찰나, 삐끼에게 붙잡혔다. 이카에서부터 예약하고 온 호주 언니 둘을 픽업하러 온 삐끼였다. 버스 표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이 언니들도 구경하고 쿠스코로 갈 거라고, 표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막 꼬드긴다. 호주 언니들도 뒤에서 끄덕끄덕 하고. 가격도 90달러던가? 아무튼 싸게 부르기에 에라 모르겠다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인간 완전 사기꾼. 일단 호주 언니 둘과 나를 떼어놓고 상담할 때부터 이상했다. 소곤소곤하는 대화 사이로 내용이 살짝씩 들리는데, 니네가 예약한 건 90불짜리 상품이지만 사실 요 상품이 더 좋은 건데, 이건 비싸지만 쟤(나를 일컬음)를 데려왔으니까 좀 깎아줄게 어쩌구 저쩌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삐끼와 독대. “자 봐봐, 니가 가겠다고 한 비행기는 무려 20인승이야. 그게 90달러지. (친절하게 사진까지 보여준다) 이거 잘못 타면 가운데 끼여서 나스카라인이고 뭐고 아무 것도 못 봐. 대신에 이거(옆 사진) 봐봐. 6인승 경비행기인데 훨씬 좋아.” “그래서 그건 얼마인데?” “145달러.” (웃기고 있어 정말) “그럼 난 그냥 90달러짜리로 할게.” (삐끼 당황) “아니 아니, 진짜 안 보인다니까.” “할 수 없지. 그리고 내 친구들한테 들은 가격은 이게 아닌걸.” “좋아, 그럼 특별히 너만 깎아주지.” 하면서 흥정 시작. 145가 120인지 130인지 115인지가 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무조건 90을 부르며 앉아 있었다. 마지막엔 “야! 나는 그냥 얻어 걸린 거잖앗!” 하고 옜다 봐줬다 하는 심정으로 계산기에 100을 찍었더니 결국 항복. (나중에 알고 보니 호주 언니야들한테 받은 가격도 100.) 싸게는 아니어도 그냥 저냥한 가격이니 만족하려 했으나 수가 너무 빤히 보인 데다, 그렇게 사기 친 돈으로 샀을 것이 분명한 최신 투싼(응, 현대의 그 투싼)을 타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그래도 그 사기꾼, 오후에 온 유럽 사람들에게 똑같은 사기를 쳤는데, 아무 의심 없이 145달러를 지불한 독일 아저씨한테 호주 언니야들이 “우리는 100달러 냈는데?” 하고 천진하게 얘기하는 통에 사기꾼 초난감해지고, 독일 사람은 따지고, 사기꾼은 호주 언니들한테 그 얘길 왜 하냐고 성질 내고... 하는 통에 기분이 아주 약간 좋아졌다. 어쨌거나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호스텔과 겸업하는 곳이었는데 이름도 론리에 나오는 호스텔과 헷갈리게 지어놨던... 아 까먹었다. 내 한국 가면 반드시 경종을 울리리라! 했건만;

나스카는 라인보다 비행기 타서 본 풍경이 훨씬 좋았다. 굉장히 독특한 지질이라 그렇게 오랫동안 라인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가 보다. 그러나 정작 라인은 너무 높은 데서 봐서인지 큰 감흥이 없었다. 뭔가 그냥 장난감이나 낙서 같았달까. 그 스케일 감상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전망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건 자연 다큐멘터리이고; 내게 이날의 투어는 그저 ‘경비행기 체험’이었다는.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돌아온 호스텔에는 사기꾼이 있었고, 볼일(=돈 받기)이 끝났으니 터미널에 다시 데려다 줄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일행이었던 다섯 명 중 네 명은 함께 비행기를 타면서 친해졌는지 자기들끼리 아르마스 광장에 밥 먹으러 갔고, 혼자 다른 비행기에 탄 데다 사교성은 요만큼도 없는 나만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막막하다. 저 사기꾼, 아침만 해도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더니... 일단 짐을 두고 터미널까지 걸어가 겨우 겨우 밤 11시 59분에 출발하는 최고급 버스 표 한 장, 마지막 남은 딱 한 장을 구했다. 우리 돈으로 8만 원 돈 하는 표를 보며 머리를 쥐어 뜯었다. 으아아악, 아주 돈을 뿌리려고 작정한 여행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왜, 왜! 어제 와카치나에서 표를 안 샀던 거냐!

그 사기꾼의 집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짐을 챙겨 터미널로 돌아와 이제는 익숙해진 버스 기다리기를 시작했다. 까짓, 6시간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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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6 19:56 2014/01/16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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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페루
* 지역: 와카치나(Huacachina)
* 숙소이름: Banana's Adventure Lodge
* 위치: 이카에서 택시 타고 '바나나스 어드벤처' 가자고 하면 데려다 줌. 어딘지 몰라도 마을 어귀에서 기사가 동네 주민에게 물어봐서 데려다 주니 상관 없었음. 마을이 작아 오아시스 한 바퀴 돌다 보면 그 주위에 웬만한 숙소는 다 있음
* 방 종류: 6인 도미
* 가격: 75솔. 1일 숙박+버기투어+티셔츠 가격. 첫날 숙박은 이렇게 세트로만 판매함. 10솔에 별매하는 티셔츠를 안 받고 65솔로 깎아주면 안 되냐고 사정해 봤지만 씨알도 안 먹힘. 그러나 다음 날 체크아웃할 때 다른 게스트들의 카드를 봤더니 나보다 적게 지불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봐서 여럿이 와서 흥정하면 좀 깎아주는 것도 같음. 공식적으로는 미리 예약하고 오면 10% 할인해 준다 함.
* 아침포함 여부: 불포함
* 부엌사용: 아마도 X. 부엌시설처럼 보이는 걸 찾을 수 없었음. 이 지역 모두 비슷할 텐데, 이 지역 게스트하우스는 거의 다 퍼브를 겸하고 있어서 사 먹어야 할 것임.
* 와이파이: 가능 (2층 방에서도 가능했음)
* 장점
  - 깨끗하고 밝음
  - 화장실이 방에 딸려 있음
  - 따뜻한 물 잘 나옴
* 단점
  - 생각보다 비싸고, 세트판매 방식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음
  - 게스트에 비해 콘센트가 적어서 충전 눈치보기가 치열함
* 기타
  - 동네 돌아다니며 보니 이 동네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음. 고로 다시 찾으라면 무조건 더 싼 데로 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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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14 2014/01/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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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리마 공항. 늦은 시각인데도 공항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고, 돈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몇 달은 너끈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없는 가게가 없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잠! 좌석이 개방되어 있는 커피숍에 앉아 있으려니, 종업원이 근처 테이블에 다가가 메뉴판을 내민다. 주문하지 않는 자여 앉지도 말라. 다행히(?) 나는 눈에 띄지 않았던지 내게 오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 짐을 이고 지고 잘 만한 공간이 있는지 탐사에 나섰다.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미관을 크게 해치면 안 되므로 노숙공간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마침 맞춤한 통로 발견. 이미 몇몇 이들이 자리를 잡고 누워 있다. 나도 졸지에 공항 거지가 되어 통로에서 쪽잠을 청했다. 처음에는 조심 조심 방어적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30분이 채 되지 않아 배낭에 살짝 기대고, 그 다음엔 옆으로 누웠다가, 한두 시간 만에 드디어 집에서처럼 누워 자기 시작. 이제 페루에 막 도착한 것 같은 삼삼오오 무리들은 잘 생각은 않고 맥주며 카드를 가져와 논다. 어휴, 체력도 좋다.

자다 깨다, 추위에 몸부림 치다 마침내 일어난 때는 4시쯤. 이 시각에 사용 가능한 교통수단은 택시뿐이렷다. iPeru에 다시 한 번 들렀으나 역시나 별 신통한 얘길 듣진 못했다. (제발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좀!) 그래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낫겠지. 밖으로 나가 막 손님을 내려주고 떠나려는 일반 택시를 하나 잡았다. Cruz del Sur 터미널을 외치니 50솔을 부른다. 아우, 트루히요에서 공항 갈 때도 그러더니 이 동네는 뭐 물어보기만 하면 다 50이래. 그 가격 아닌 거 다 알거든요. 못 알아들은 척 손을 폈다 구부리면서 손으로 표시해 달라는 시늉을 했더니 그걸 10으로 이해했는지 어쨌는지 바로 25솔에 데려다 주겠단다. 지난 번 탔던 그린택시의 55솔에 비하면 감지덕지라 더 따지지 않고 고고.

덕분에 터미널에 무사 도착해서 직원이 출근하길 기다렸다. 다행히 여섯 시 반 이카(Ica)행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나의 리마는 여기까지. 하지만 수도와 잘 맞았던 적이 없는지라 그닥 아쉽지는 않다. 수도와 나의 악연(?)은 아마도 이스탄불(엄밀히 얘기하며 이스탄불은 수도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도나 마찬가지니까; 너무 갖다 붙였나?)이 그 시작인 것 같은데, 도착한 첫날 삐끼와 걷기에 너무 치인 나머지 하루 이틀 머물면서 천천히 둘러보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날 밤에 다음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구경은 한 달 뒤 다시 돌아왔을 때 하기로. 그 때쯤이면 터키에 익숙해져 있을 테니까. 그러나 결국 여행 막바지, 마침 50년 만에 내린 폭설로 고속버스 휴게소에 만 하루 넘게 갇히는 사고 발생. 터키 정부에서 주는 구호물자도 받아 먹고, 내내 앉아 있던 통에 다시 없을 굵기의 종아리도 가져 보고, 9일 동안 머리 안 감기 기록도 세워 보고,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결국 귀국 전날 밤 늦게야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바람에 구경이고 뭐고 이스탄불은 빠빠이.

흠, 그러고 보니 리마라는 지명을 처음 들은 건 어릴 적 읽은 금성사 소년소녀세계명작에서였다. 티티카카 호수도 나오고, 라마라는 동물도 나오고, 리마라는 이름도 모두 거기서 처음 들었다. 젊은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고, 말이 안 통하는 ‘신비로운’ 원주민 여성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를 그린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관점으로 다시 읽으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냐고 성질 낼 게 분명한 작품이지만, 어린 마음에 남은 건 그 신비로운 분위기와 이국적인 이름들이었다. 마침내 도착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때가 더 나았다. 그러니 어쩌면 더 ‘자세히’ 탐험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리마 안녕.

무사히 차를 타고 언제나 나를 굶주림에서 구원해 주는 버스식량을 흡입했다. 여행정보에 따르면 7시간 정도 걸린다던데, 불과 5시간 만에 도착하는 바람에 모르고 못 내릴 뻔; 사람들이 작은 도시 이카에 가는 이유는 대개 그 인근에 있는 ‘와카치나(Huacachina)’라는 오아시스 마을 때문이다. 가는 방법이 택시뿐이라 터미널에 ‘공식’ 택시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그 셈에 넘어가지 않고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와카치나는 물가가 비싸다기에 슈퍼에서 물이라도 사 가고 싶었다. 웬 블로그에는 근처에 마트가 있다고 하던데, 나는 결국 못 찾았다. 길을 걷는 주민들에게 ‘슈퍼마켓?’이라고 말을 걸어봤지만,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하는 표정으로 무시하고 지나간다. 내가 방문한 곳을 통틀어 최고로 불친절하고 불쾌한 곳이 이카였던 듯. 서비스 노동자가 보여줌직한 친절을 요구할 생각은 없으나, 말 거는데 대꾸도 안 하는 건 너무하잖아. 심지어 길거리에서 나를 향해 중국 사람을 흉내내며 조롱하는 아저씨들까지 만났다. 결국 슈퍼 찾기는 포기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서 점심 겸 토스트 한쪽을 먹었다. 론리에서는 싼 값에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지만 역시나 가격에 비해;;; 싸다는 건 어디까지나 론리 편집진 그들 기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췌. 후다닥 해치우고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흥정한 뒤 와카치나로 갔다. 미리 생각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짐을 풀고 오아시스 구경 겸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남쪽으로 오니 확실히 관광객, 특히 유럽 미국 애들이 많이 보인다.

오후엔 버기투어. 와카치나에 있는 대부분의 호스텔은 버기투어와 숙박을 세트로 판매하는데, 개조한 버기카를 타고 사막을 누비는 건 별 기대가 없어서였는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차가 롤러코스터인 척도 하고, 샌딩보드도 스릴 있고. 그러나 역시 내 성정에는 투어보다는 사막이 더 매력적이다. 신비한 물결무늬와 사람 잡는 발빠짐.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종일토록 사막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그 모래만은. 흑. 결국 포토시(볼리비아의 광산도시)에서 쓰려고 마련해 온 마스크를 여기서 개시했다. 함께 차를 탄 일행(유럽과 미국에서 온 20대 초반의 무리들)은 마스크 쓴 나를 보고 히히덕거렸지만. 얘들아, 내 기관지는 소중하단다.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와카치나의 사막과 오아시스, 버기카>

내가 묵은 방에는 프랑스 남자애 셋과 이탈리아 남자애 하나, 영국 여자애 하나가 더 있었다. 역시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백인들이라 금세 친해져 어울려 술 마시고 놀고, 싸운다. (이 동네 호스텔은 주로 레스토-바를 겸업하고 있어 게스트들은 밤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며 노닥인다.) 다행히 서로 낄 생각도, 초대할 생각도 없다. 귀마개랑 수면안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얘들아, 굿나잇. 그런데 조금만 조용히 해 주면 고맙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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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3 16:01 2014/01/1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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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을 "그리고는 기절", 이라고 끝맺었지만 사실 바로 기절하려던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몰라 근처 식당의 메뉴판을 찍어 놓고 방에 돌아와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 메뉴의 정체를 알아낸 뒤 맛난 밥을 먹고 돌아와 잔다, 가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몸으로는 도저히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한 시간만 자야지 하다 결국 그날도 저녁을 굶고 새벽까지 내리 자버렸다. 자고 일어났어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빈속에 진통제를 먹고 뒤척였다. 어쨌든 오늘은 리마로 돌아가는 날이다.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밤차를 타야지.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카페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도착한 날부터 눈에 띄었던 아담한 집이라 한 번 가보고 싶었다. 7천 원이면 주스와 커피 빵 스크램블까지 먹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바보 같이 계속 굶었을까. (비록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지만;)

완차코에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뒤적여 보니 이 마을에도 성당이 있다 한다. 16세기에 지어진, 페루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성당이라나. 카페를 나서며 주인에게 성당 위치를 물어보고 쉬엄쉬엄 걸었다. 아 그런데... 무슨 성당이 언덕 꼭대기에 있냐고! 이 무슨 절도 아닌데 108 계단이 있냐고! 햇빛은 이미 쨍쨍하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계단을 혼자 꾸역꾸역 걸어 올라갔다. 이 성당은 열두 시에 문을 닫고, 이미 열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나는 오늘 떠나니까, 헥헥. 그리고 마침내 다 올라가 성당 앞마당(?)에서 본 마을과 바다의 풍광은 이 모든 투덜거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가보길 잘했다.

오늘은 무조건 쉬고 최소한으로 걷기로 했으므로 해안가로 내려와 둑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구경,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서핑하는 사람 놀러 온 사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 갈대배를 손질하는 사람...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이 바다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 가슴이 찡해졌다가, 바다뿐 아니라 이 순간 자체가 다시 오는 일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역시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것도. 아마도 나는 오늘 이 몇 시간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마추픽추보다 더.

이제 슬슬 떠나볼까. 트루히요로 나가 버스표를 끊고 좀 둘러보다 차를 타면 맞춤하겠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헉, 숨을 토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선글라스 썼던 부분 빼고는 새까맣게 타버린 게 아닌가. 차라리 선글라스 같은 거 쓰지 말 걸, 선명한 경계 때문에 밤에도 선글라스 써야 할 판이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 내가 탔다는 걸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얼굴이 가렵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계는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한 달 이상 지나서야 사라졌다는 슬픈 얘기.)

그러나 잠시 뒤 얼굴 따위 문제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트루히요 시내로 나와 보니 리마행 버스는 전부 매진이다. 비싼 회사부터 싼 회사까지 대여섯 군데 되는 그 동네 버스터미널을 모두 돌았으나 모두 매진 매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보니 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이 사람들도 주말에는 놀러들 다니나 보다. 오늘 밤차를 타고 내일 새벽에 리마에 도착해서 이카(Ica)로 가서 하루 묵고, 그 다음 날 쿠스코로 떠나야 예정했던 날짜에 마추픽추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이 상태라면 내일 예정한 오아시스 버기카 투어에 나스카라인은 포기해야 할 판이다. 아악, 나는 왜 이런 일 따위 예상하지 못하고 쿠스코 숙소와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와 입장권을 미리 사버렸던가. 그놈의 바다가 뭐라고 완차코에서 하루를 더 묵어버렸던가. 하루를 더 잤으면 서두르기나 하던가. 얼굴만 시커매지고 말 걸 뭐하러 헤벌레 하고 유유자적하고 있었는지. 나한테 짜증이 뭉게뭉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나. 정신을 차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몇 가지 옵션을 떠올려 봤다. 트루히요에서 하루 잔다, 이카를 포기한다, 쿠스코에 하루 늦게 도착한다 등등.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오늘 리마로 가야 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근처 여행사에 들어가 흥정이고 뭐고 없이 달라는 돈 다 주면서 리마행 밤비행기표를 사버렸다. (그마저 표가 있네 없네 난리가 났었다는; 그래도 20만 원으로 막았으면 선방했다.) 에효, 아침만 하더라도 오늘은 별 일 없이 보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박사건이 줄줄이 터져주실 줄이야. 하긴, 이런 사건 하나 없으면 자유여행이 아니지.

그 상황이 정리된 건 일곱 시쯤. 해도 졌겠다, 몸도 힘들겠다, 기분도 별로겠다, 시내에 더 있을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와 자정이나 되어야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보딩 시간까지 세 시간도 더 남았지만 리마에서는 여섯 시간도 기다렸는데 뭐. 일지나 써야지. 새벽 1시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쩔 것이냐가 또 고민이겠지만 공항에서 시간 좀 때우다 터미널 가면 된다. 갔는데 리마에서 이카까지 가는 버스표 없으면? 흥, 또 비행기 타 버릴 테다! 그 때는 그 때대로 수가 있을 거다.

그러는 통에 저녁은 또 굶었고 (이젠 새롭지도 않다;) 열두 시에 비행기는 출발했고, 아홉 시간 걸려 왔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내린 곳은 첫 날 도착했던 바로 그 곳, 리마 공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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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23:20 2014/01/0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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