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을 "그리고는 기절", 이라고 끝맺었지만 사실 바로 기절하려던 건 아니었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어떤 메뉴를 골라야 할지 몰라 근처 식당의 메뉴판을 찍어 놓고 방에 돌아와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 메뉴의 정체를 알아낸 뒤 맛난 밥을 먹고 돌아와 잔다, 가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몸으로는 도저히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한 시간만 자야지 하다 결국 그날도 저녁을 굶고 새벽까지 내리 자버렸다. 자고 일어났어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빈속에 진통제를 먹고 뒤척였다. 어쨌든 오늘은 리마로 돌아가는 날이다. 해변에서 노닥거리다 밤차를 타야지.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카페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도착한 날부터 눈에 띄었던 아담한 집이라 한 번 가보고 싶었다. 7천 원이면 주스와 커피 빵 스크램블까지 먹을 수 있는데 나는 왜 바보 같이 계속 굶었을까. (비록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지만;)

완차코에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을 뒤적여 보니 이 마을에도 성당이 있다 한다. 16세기에 지어진, 페루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성당이라나. 카페를 나서며 주인에게 성당 위치를 물어보고 쉬엄쉬엄 걸었다. 아 그런데... 무슨 성당이 언덕 꼭대기에 있냐고! 이 무슨 절도 아닌데 108 계단이 있냐고! 햇빛은 이미 쨍쨍하고, 오르는 이 하나 없는 계단을 혼자 꾸역꾸역 걸어 올라갔다. 이 성당은 열두 시에 문을 닫고, 이미 열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고, 나는 오늘 떠나니까, 헥헥. 그리고 마침내 다 올라가 성당 앞마당(?)에서 본 마을과 바다의 풍광은 이 모든 투덜거림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니, 가보길 잘했다.

오늘은 무조건 쉬고 최소한으로 걷기로 했으므로 해안가로 내려와 둑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 구경,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서핑하는 사람 놀러 온 사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사람, 갈대배를 손질하는 사람... 온몸으로 햇빛을 받으며 이 바다를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 가슴이 찡해졌다가, 바다뿐 아니라 이 순간 자체가 다시 오는 일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역시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하고 오래 기억한다는 것도. 아마도 나는 오늘 이 몇 시간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의 목적인 마추픽추보다 더.

이제 슬슬 떠나볼까. 트루히요로 나가 버스표를 끊고 좀 둘러보다 차를 타면 맞춤하겠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헉, 숨을 토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선글라스 썼던 부분 빼고는 새까맣게 타버린 게 아닌가. 차라리 선글라스 같은 거 쓰지 말 걸, 선명한 경계 때문에 밤에도 선글라스 써야 할 판이다. 그리고 놀랍지도 않게, 내가 탔다는 걸 자각한 바로 그 순간부터 얼굴이 가렵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경계는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한 달 이상 지나서야 사라졌다는 슬픈 얘기.)

그러나 잠시 뒤 얼굴 따위 문제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트루히요 시내로 나와 보니 리마행 버스는 전부 매진이다. 비싼 회사부터 싼 회사까지 대여섯 군데 되는 그 동네 버스터미널을 모두 돌았으나 모두 매진 매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해 보니 아, 오늘은 금요일이다. 이 사람들도 주말에는 놀러들 다니나 보다. 오늘 밤차를 타고 내일 새벽에 리마에 도착해서 이카(Ica)로 가서 하루 묵고, 그 다음 날 쿠스코로 떠나야 예정했던 날짜에 마추픽추에 오를 수 있다. 그러니 이 상태라면 내일 예정한 오아시스 버기카 투어에 나스카라인은 포기해야 할 판이다. 아악, 나는 왜 이런 일 따위 예상하지 못하고 쿠스코 숙소와 마추픽추로 가는 열차와 입장권을 미리 사버렸던가. 그놈의 바다가 뭐라고 완차코에서 하루를 더 묵어버렸던가. 하루를 더 잤으면 서두르기나 하던가. 얼굴만 시커매지고 말 걸 뭐하러 헤벌레 하고 유유자적하고 있었는지. 나한테 짜증이 뭉게뭉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 어쩌나. 정신을 차리고 이 사태를 해결할 몇 가지 옵션을 떠올려 봤다. 트루히요에서 하루 잔다, 이카를 포기한다, 쿠스코에 하루 늦게 도착한다 등등.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오늘 리마로 가야 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근처 여행사에 들어가 흥정이고 뭐고 없이 달라는 돈 다 주면서 리마행 밤비행기표를 사버렸다. (그마저 표가 있네 없네 난리가 났었다는; 그래도 20만 원으로 막았으면 선방했다.) 에효, 아침만 하더라도 오늘은 별 일 없이 보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대박사건이 줄줄이 터져주실 줄이야. 하긴, 이런 사건 하나 없으면 자유여행이 아니지.

그 상황이 정리된 건 일곱 시쯤. 해도 졌겠다, 몸도 힘들겠다, 기분도 별로겠다, 시내에 더 있을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와 자정이나 되어야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보딩 시간까지 세 시간도 더 남았지만 리마에서는 여섯 시간도 기다렸는데 뭐. 일지나 써야지. 새벽 1시에 도착한 다음에는 어쩔 것이냐가 또 고민이겠지만 공항에서 시간 좀 때우다 터미널 가면 된다. 갔는데 리마에서 이카까지 가는 버스표 없으면? 흥, 또 비행기 타 버릴 테다! 그 때는 그 때대로 수가 있을 거다.

그러는 통에 저녁은 또 굶었고 (이젠 새롭지도 않다;) 열두 시에 비행기는 출발했고, 아홉 시간 걸려 왔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돌아갔다. 그리하여 내린 곳은 첫 날 도착했던 바로 그 곳, 리마 공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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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23:20 2014/01/09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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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이날의 일지는 고작 다섯 줄이다.

10:30 예정인 투어 전에 성당 보려고 나감. 한목소리로 피사로를 알려 준 승객들, 광장까지 바래다 준 소이 엄마 무한감사.

아르마스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성당은 비신자에게는 오전에만 개방된다. 그래서 투어 전에 잠깐 둘러 보기로 마음먹고 아침 일찍 트루히요 행 봉고버스를 탔다. 아침으로는 호스텔 식당에서 탄 식빵 두 쪽과 버섯 오믈렛. 아 배고파. 어쨌거나 어제 시행착오를 겪은 덕에 아르마스 광장까지 가는 길은 자신이 붙었다. 그래도 안내원에게 광장 간다고 얘기는 해 둔 터. 마침내 광장 언저리에 이르자 승객들이 너도 나도 "여기야 여기, 내려!" 한다. 내가 탔던 버스 승객 모두 내 행선지를 알고 있고, 그 승객 모두가 내게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려 주는 그런 경험은 늘 유쾌하다. 겪을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마침 같이 내린 아기 엄마도 아르마스 광장으로 가는가 보다. 버스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인데, 광장은 이쪽 길이라며 알려준다. “저 이 길 알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란 말을 스페인어로 못 해서 함께 걸으며 서로 안 통하는 말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말해 주었는데 듣자마자 잊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여행길에 잠깐 스친 인연, 다시 볼 일 없는 사람 이름은 기억해서 뭐 해? 하는 생각을 내가 미처 하기도 전에 뇌가 알아서 필터링 해 버린 거다. 듣고, 잊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다 해서 1초나 될까. 내 마음은 언제 이렇게 건조해져 버린 걸까. 그래도 신속하게 반성했으니 조금은 덜 여문 걸까. 어쨌든 그 '반성' 덕에 아기 이름이라도 기억하게 된 거다. 돌도 안 된 귀여운 아기의 이름은 ‘소이’였다. 까꿍 몇 번에 까르르 웃는다. (참 신기한 게, 한국 아가들은 나를 보면 일단 무서워하고 경계하는데, 여기 아가들은 일단 날 보면 웃어준다.)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해서 소이 엄마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어디로 가세요? 그제야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저 뒤쪽을 가리킨다. 생판 모르는, 인생에 다시 볼 일 없을, 길이 서툰 여행자를 위해 추운 날 아기를 안고 한참을 동행해 준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왈칵. 정말 미안해요, 그런 당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서. 의미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네요.


리마성당처럼 화려한 마리아와 예수. 리마가 더 낫네.

성당에 들어갔다. 앞으로도 여행길에 무수히 보게 될 성당들. 규모도 크고 장식도 화려하지만 내게는 리마의 ‘은혜교회’가 더 끌린다. 대충 둘러보고, 오늘도 마음의 평안을 빌고, 밖으로 나왔다.


광장에서 조나단 또 마주침. 아 불편

생각보다 성당구경이 짧아져서 광장을 떠돌았다. 어제 조나단에게 설명 들었던 광장 조각상을 좀 자세히 보려고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헉, 조나단; 안녕;;;

어제 안녕 빠빠이 하고 헤어졌는데 다시 만나니 뻘쭘하다. 내가 수다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낯모르는 사람의 얘길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어제는 설명 들으면서 막 이해하는 척 했단 말이다; 그런데 오늘 와서 다시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데 조나단은 내가 엄청 반가운가 보다. 하긴 그런 성정이니 안내원을 하겠지. 하지만 미안, 당신은 참 착하고 친절하지만 난 여기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땡땡아, 언제 떠나니? 하길래 오늘, 찬찬투어 마치고, 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후다닥 도망. 안녕 안녕.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돌아다니거나 유적지를 보는 것보다는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이 최고라고들 한다.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 나눴던 대화들, 마음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겐 그런 행위들이 별 의미 없고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뭐, 다시 볼 거야? 아니잖아. 그들을 통해 뭔가 참신한 얘기나 생각을 듣고 싶어? 사람들 사는 거,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더 어릴 때는 재미났던 일들이, 이젠 허허롭기만 한 걸 보니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인가. 흔히 여행은 젊을 때 가라는 얘기들을 한다. 난 이게 체력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인 걸 알고는 있지만, 어쨌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 서로 서로 넘치는 열정을 나누는 것, 거기서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나를 보여주고 너를 읽는 것, 이건 몸이든 마음이든 젊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할머니 마음을 가진 내겐 이제 그 모든 것들이 귀찮고 버겁다. 아우, 비생산적이야. (아 그러고 보니 ‘한량’ 다음의 내 장래희망이 ‘멋진 할머니’인데 ‘멋진’은 몰라도 ‘할머니’는 벌써 이룬 건가.) 아아, 그래서 여행은 ‘젊을 때’ 가야 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생애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달의신전 재밌지만 피곤.

데이투어 차를 타고 황야를 달리다 보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산이 하나 나온다. 옛날 사람들도 틀림없이 나처럼 느꼈을 거다. 그러니 그 주위에 신전을 두 개나 지었겠지.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당연하게도 그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생긴’ 느낌은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유적 하나하나 설명을 마친 후 질문 없냐고 묻는 가이드에게 모두들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날 내가 한 질문은 딱 한 개. “저 산 이름은 뭔가요?”였다. Cerro Blanco, 흰 산, 이라고 했다.

달의신전은 어느 정도 발굴되어 둘러볼 수 있었지만 태양의신전은 돈 없어서 아직까지 못 열어보고 있단다. 달의신전도 독일인가 프랑스의 어느 재단에서 발굴비를 대줘서 그나마 관광객을 받을 모양이나마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신전 흙벽의 문양은 한국 도깨비 무늬랑 참 비슷하게 생겼다. 이런 것들을 보면, 정말 지구 중앙에 반대편과 통하는 길다란 터널이 한 개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한쪽에서 그 터널을 타고 와 다른 편에 정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 먹고 찬찬 투어. 아 진짜 나는 배낭족 아니고 휴양족이었던 것. 그래도 북쪽에 오길 잘한 듯.

데이투어는 원래부터 ‘데이’가 아니라 사실 오전 투어 + 오후 투어이다. 오전에는 모체(Moche) 유적지인 달의신전과 박물관 구경, 오후가 찬찬(Chan Chan) 투어다. 따라서 오전만 하거나 오후만 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할 수 있다. 그러니 팀과 함께 점심을 먹어도 되고 따로 먹어도 된다. 버스 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드가 데려다 주는 식당에 가겠다고 한 모양이고, 나는 당연히(?) 혼자 해결하겠노라 하고 내렸다. 오전 투어를 함께 했던 멕시코 커플이 함께 내린다. 그들은 오후 투어는 안 한다며, 내게 점심을 같이 먹겠냐 묻는다. 가이드가 데려다 준다던 그 식당은 엄청(물론 배낭여행객 기준이겠지;) 비싼 데라며.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 다니는데 이 친구들 좀체 메뉴를 선택하지 못한다. 수십 군데 식당의 메뉴와 가격을 보고 고민만 하다 지나치느라 나도 덩달아 몇 블록이나 걷게 되었다. 이보세요, 당신들은 체력이 되나 본데 저는 오전 투어만으로 이미 삭신이 쑤시거든요. 발목이랑 발바닥이랑 허리가 나갈 것 같아요! 하며 뒤에서 찌릿찌릿 레이저를 쏘아댄 기운이 느껴졌는지, “그런데 너 시간 되겠어? 한 시 반까지 가야 하는데 벌써 30분이나 지나 버렸네.” 어이쿠, 감사합니다. “응, 나는 그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그래, 넌 뭘 먹을 테냐?” “글쎄, 샌드위치나 먹을까 봐.” “그래, 샌드위치는 언제나 가장 무난한 선택이지. 거기 광장 가는 길에 싸고 괜찮은 집 있어.” 이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서로 각자의 길로. 그리고 나의 점심은, 슈퍼에서 만들어 파는 중국식 볶음면 한 컵. 반찬은 길바닥으로 내리쬔 햇빛. 이렇게 또 본의 아니게 다이어트를;

오후 투어는 방대한 찬찬 유적을 둘러보고 완차코의 석양을 보는 데서 끝나는 일정이다. 사방 몇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방대한’ 유적은, 모두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흙으로 구운 벽돌 아니고, 그냥 흙을 이겨 만든 건물과 벽, 궁전이다. 아니 대체 그 건물들이 몇 백 년 동안 어떻게 보존이 된 거지? 그러니까 그 무모해 보이는 짓을 한 사람들은 그 지역에 비 따위는 결코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그들의 낙관은 틀렸다. 20년 전쯤, 지구 온난화의 따뜻한 손길이 여기에도 뻗쳐 마침내 비를 내려 주었으니, 그때 상당량의 찬찬 유적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뭐, 이렇게 무지막지한 시대의 도래를 예상치 못한 게 선조들 잘못은 아니다.

이 같은 불상사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흙담 위에는 참으로 허술해 뵈는 슬레이트 지붕이 쳐져 있다. 여행사진을 본 사람들이 모두 “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물었던 게 바로 그 지붕 사진이었는데,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왜 찍었는지 모를 그 사진에는 찬찬의 과거와 페루의 현재, 지구의 미래가 모두 들어있다. (정정. 아무래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게 찜찜해서 찾아보니, '점점' 더 훼손되고 있는 건 맞지만 엘니뇨는 이미 그들이 살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예전보다야 나아졌지만, 아직도 조금만 걸었다 하면 발목과 허리가 금세 아프다. 사실 오후 투어를 시작할 때쯤 나는 이미 고관절에서 소리를 내며 발을 끌고 있었다. 마지막 배낭여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여기서 또 한 번. 도저히 더는 못 움직이겠다 싶은 생각이 든 건 네 시쯤. 그러나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차는 완차코에 도착했다. 석양사진 찍고 모이라는 가이드에게 내 숙소는 여기니 나는 이만~ 하고 돌아섰다. 5~10분이면 걸을 거리를 근 한 시간이나 걸려 호스텔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 덕에 완차코의 석양을 만끽. 왜들 그리로 사진 찍으러 모이는지 알겠더라는. 그리고는 다시 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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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9 12:20 2014/01/09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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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편집해 넣기 귀찮음. 나중에 추가하던가 할 예정;)

빅벤을 나오니 아까랑 다르게 생긴 봉고차 버스들이 지나간다. 안내원에게 "쁠라싸 데 아르마스(Plaza de Armas)"를 외치니 타라 한다. 황야를 지나 시내로 접어들고 사람들이 분주히 타고 내린다. 시내 초입부터 긴장하며 광장 같은 게 보이는지 살폈으나 아직인 것 같다. 안내원도 아무 말 없고. 그러다 보니 안내원이 돈을 걷는다. (보통은 내릴 때 요금을 내지만 회차지점이 가까워 오거나 손님이 적어 한가할 때는 중간에 걷기도 한다.) 내게도 손을 내미는 안내원에게 "아까 냈잖아요" 했더니 잠깐 생각하다 흠칫 놀란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치며 "피사로!" 한다. 엥? 피사로가 뭔데요? 차 안이 술렁술렁하며 스페인어가 몇 마디 오가더니 누군가 내게 어딜 가냐 묻는다. (나 왜 이런 말 다 이해하는 거임?) 아르마스 광장요. 그게 피사로란다. 알고 보니 아르마스 광장은 피사로(Pizaro)가(街)에 있었다는. 그리고 버스는 광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을 지나간다는. 그래서 광장 같은 건 눈에 안 띄었던 거라는. 안내원은 차를 세우고 나를 내리더니 마침 맞은편에 서 있던 똑같이 생긴 버스를 불러주었다. 얘를 피사로로 데려다 줘. 덕분에 겨우 광장에 도착. (참고로 이 경우 돈을 받을까 안 받을까 궁금했지만, 얄짤 없이 1솔 내라고 해서 냈다.)

아르마스 광장과 주변 건물들을 구경하고, 광장 끝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부족했던 한 끼를 해결하기로 했다. 들어가 메뉴판을 보다 가격이 한국과 비슷하다는 데 놀랐다. 체감상 페루의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물가는 비슷하다니. 이 사람들도 살기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 그런데 치킨버거 맛이 왜 이래. 치킨에서 형언할 수 없이 이상한 냄새가;;; '형언'할 수 없어서 진짜 표현을 못 하겠다. 그래도 세비체보다는 나으니 꿋꿋이 먹었다.

특이했던 건 케첩과 마요네즈를 먹는 방식. 카운터에서 1회용 케첩과 마요네즈를 지급하는 한국과 달리 매장 중간에 거대한 케첩과 마요네즈 대가 비치되어 있고, 햄버거와 함께 주는 빈 용기에 원하는 만큼 펌프질을 해 담는 식이었다. 커피전문점에 있는 시럽 비치대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원가절감과 쓰레기배출 감소라는 측면에서 어떤 방식이 더 나은 걸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내 머리로는 계산 불가라 1초만에 포기;

찬찬 데이투어를 예약하고 광장 주변에 있다는 옛날 집들을 둘러본다. 트루히요 관광지도를 보면 유독 Casa(집, house, '까사블랑까'의 그 '까사') 어쩌고 하는 건물들이 많은데, 그 안에 뭐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고 그냥 옛날에 지은 예쁜 (스페인식) 집 구경이다. 내게는 집 자체보다는, 그 건물들이 아직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어떤 집은 은행이고(그래서 들어가는 절차가 까다롭다), 어떤 집은 소셜클럽 전용건물(그래서 방문가능 시간과 층이 정해져 있다)... 없애버리거나, 아무도 거주하지 못하게 막아버리거나 하지 않고 시대와, 사람과 함께 흘러가도록 두는 건물.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Casa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고 있구나.

카사 한 곳을 찾느라 길을 헤매다 관광 안내원 조나단을 만났다. 언뜻 보면 경찰관 같은 제복을 입고(이 동네 사람들 참 제복 좋아하는 듯) 명찰을 목에 걸고(tourist 어쩌구 쓰여 있음) 대로변에 서 있다가 나 같은 어리바리 관광객이 오면 안내해 준다. 공짜다. 처음엔 혹 이상한 사람인가, 안내원을 가장한 삐끼인가 긴장했는데 정부에서 지원하는 제도인가 보다. 그 보답으로 나중에 시청 방명록에 내 인적사항과 안내원 이름 정도 적어주고 오면 된다. 그에게 시청 청사와 아르마스 광장 안내를 받았는데,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거대한 조각상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그려. 어쨌든 덕분에 심심치 않은 오후를 보냈다.

원래는 내일 데이투어를 마치고 바로 리마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이 작은 동네가 참 마음에 들어 하루 더 묵을까 어쩔까 계속 고민하다 결국 완차코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지금 다시 선택하래도 리마보다는 완차코에 있을 테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데 옆으로 봉고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앗, 모자 쓴 안내원! 아까 트루히요 나갈 때 탔던 버스다. 나 무사히 아르마스 광장 갔다가 잘 돌아왔어! 하는 마음으로 손을 막 흔들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던 안내원, 잠시 뒤 내가 기억 났는지 함박웃음을 짓는다. 웃는 모습이 예쁜 청년이었구나.

시차 때문인지 저녁 굶고 침대에 엎어진 건 여섯 시 조금 넘어. 덕분에 기상시간은 새벽 두 시.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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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8 12:40 2014/01/0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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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페루
* 지역: 완차코(Trujillo)
* 숙소이름: NAYLAMP
* 위치: 완차코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대로변에 있음
* 방 종류: 싱글
* 가격: 35솔
* 아침포함 여부: 불포함 (별도판매, 6솔~)
* 부엌사용: 미확인
* 와이파이: 가능 (1층 입구와 가까운 쪽 방이어서였는지 방에서도 됐음)
* 장점
  - 론리에 나옴. 대로변에 있어 찾기도 쉬움
  - 방안에 가만 있어도 파도소리 엄청 잘 들림
  - 수압 약간 낮으나 따뜻한 물 잘 나오는 편
* 단점
  - 1층은 방에 볕 안 듦. 2층 방값은 더 비쌈
* 기타
  - 이틀 묵으면서 6솔짜리 아침(버섯 오믈렛+토스트) 한 번 사먹음. 오믈렛은 짜고 토스트는 탔지만 시장이 반찬.

트루히요의 숙소는 대체로 가격에 비해 질이 떨어지고 도심이라 시끄럽다는 평이라 대개 완차코에 숙소를 잡는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 완차코는 서핑해안이라 서핑교습을 해 주는 게스트하우스도 좀 있습니다. 관광지라 물가는 대체로 비싼 편이지만 더 싼 (도미토리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있습니다. 제가 묵었던 데는 도미토리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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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13:10 2013/09/1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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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차코(Huanchaco) 찾아 삼만리

동이 틀까 말까 한 아침 일곱 시 반. 트루히요에 도착했다. 웬 블로거의 여행기를 보니 아침에 도착해서 바로 완차코(Huanchaco) 해안 구경을 하고 찬찬(Chan Chan) 일일투어를 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 일정에 따르기로 한다. 숙소는 완차코에 잡아야지.

터미널 맞은편에, 한국 거랑 비슷하게 생긴 버스정류장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Linea 터미널
<버스정류장에서 바라본 Linea 터미널>

한국의 마을버스 내지는 봉고차 크기의 버스들이 연달아 지나가고, 안내원(나 어릴 때는 대부분 '안내양'이었는데 여기는 대개 젊은 '안내군'들이다)들이 제각기 목적지를 외친다. (물론 못 알아들었다. 한국 마트나 시장에서 호객하는 소리도 잘 못 알아듣는 판에;) 그 많은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완차꼬?" 했지만 다들 안 간단다. 한 20분 그러고 있자 과연 여기가 버스정류장이 맞는지, 완차코 가는 버스가 여기 서기는 하는지, 아니 대체 완차코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른 아침, 지나는 사람 하나 없는지라 물어볼 데도 없고, 바쁜 버스 안내원들을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바쁘다'는 의미는 이렇다. 봉고차 버스의 안내원은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에 문을 열고 내린다. 물론 여전히 달리고 있는 차에서. 열심히 모객을 한 다음 출발하는 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문을 닫는다. 승객에게 빨리 빨리, 를 외치며 타고 내리는 걸 돕는다. 순전히 차를 더 일찍 출발하게 하기 위해서.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는 앞문이고 뒷문이고 문을 닫지 않는다. 승객으로 만원이 되었을 때조차.)

버스만 믿고 온 터라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단 벤치에 앉아 정신을 좀 수습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길 5분? 웬 중년여성이 정류장으로 온다. 짐을 보아하니 같은 버스를 타고 왔던 모양이다. 손짓 발짓 섞어 완차코 가는 버스가 여기 서냐 하니 그렇단다. 아이고 감사 감사. 그런데 얼마예요? 하면서 손으로 돈 모양을 그렸더니 이 아주머니 손사래를 친다. 응? 버스비 얼마냐는 거였는데 돈 좀 달라는 소리로 알아들으셨나 보다. 다시 한 번 물었더니 이번엔 통했다. 운 씬꾸엔따(1.5솔). 한국 돈으로 700원쯤 되려나?

그러고 있으려니 빨갛고 노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버스가 한 대가 온다. 드디어 완차코 가는 버스. 이 버스가 그 버스라고 알려주신 아주머니도 함께 탔다. 나중에 보니 버스에 대문짝만 하게 Huanchaco라 쓰여 있다. (론리에도 버스안내가 되어 있더라. 췌.)

완차코 가는 버스
<완차코행 버스>

삼사십 분 열심히 달리다 보니 바다가 보인다. 좀 아까의 아주머니가 내리면서 "난 내린단다. 넌 좀 더 가야해." 해 주신다. 고맙습니다. 그때부터 긴장하고 밖을 바라봤지만 완차코가 어디인지는 오리무중. 버스가 설 때마다 여기서 내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내리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류장에서 기사와 안내원이 이구동성으로 여기니까 내리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왕, 고마워요. 버스가 떠나는데 기사와 안내원 모두 손을 흔든다. 무뚝뚝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마주 인사하며 활짝 웃어 주었다.

그리고 완차코.
내려서 본 풍광은 이러했다.

완차코 해변
<완차코 해안>

완차코 해변은 현지인들도 많이 놀러오는 곳이라 일과시간에는 사람이 없을 때가 없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가면 태평양과 독대할 수 있다. 이런 곳인 줄은 몰랐는데, 여기 참, 좋다. 그런데 사진으로 봐선 여느 바다랑 다를 게 없네;

해변을 쭉 걸어 올라가 숙소를 잡았다. 론리에 소개된 NAYLAMP다. 1인실에서 샤워도 하고 속옷도 빨았다. 그리고 침대에 엎드려 포스트도 남겼다. 허기지고 체력도 달려 일일투어는 내일로 미루고 일단 밥을 먹고, 트루히요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세비체(Ceviche)와 잉카콜라

빅벤(Big Ben)이라는 식당은 세비체(Ceviche)로 유명하다고, 론리님께서 말씀하셨다. 세비체는 익히지 않은 생선살을 라임즙에 담뿍 절인 것을 기본으로, 다른 것을 위에 얹거나 섞거나 하는 페루 음식이다. 그런데 나는 회를 못 먹는다. 날것의 느물느물한 감촉을 견디지 못해서다. 그리고 신 것도 못 먹는다. 남들이 별로 안 시다고 하는 과일도 못 먹을 정도다. 그래서 가기 전부터 먹을 수 있을지 적이 걱정되었다. 그래도 페루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인데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는가. 단백질(생선살)은 산(酸)과 만나면 응고되니까, 감촉이 일반 회랑 좀 다를 수도 있다는 데 희망을 가졌다.

가격대는 좀 되지만, 이왕 먹어볼 거면 제대로 된 데서 제대로 된 메뉴를 맛봐야 한다는 생각에 빅벤으로. (참고로 빅벤에서는 점심식사만 가능함. 열한 시 반에 열고 다섯 시 반에 닫음)

빅벤에서 바라본 완차코 해변
<빅벤에서 바라본 완차코 해변>

마실 것은 잉카콜라. 페루인들이 코카콜라보다 더 많이 마시는 음료라고 하는데, 코카콜라사에 인수되었다나. 익숙한 불량식품의 맛이다. 합성착향료와 색소가 듬뿍 들어 있다.

잉카콜라와 볶은 옥수수
<잉카콜라와 볶은 옥수수>

그리고 세비체는 역시, 나를 위한 음식은 아니었다. 생선살은 겉이 아주 약간 응고되었지만 특유의 살성은 여전했고, 그 신맛은 내 이까지 녹여버릴 듯, 좀 있으니 잇몸까지 아렸다. 하루 넘게 굶다시피 했고, 그 가격을 생각하자면 어떻게든 다 먹어치웠어야 했으나 결국 1/3도 못 먹고 내가 졌소를 읊조리고 도망 나왔다. 남은 접시를 보고 좌절할 주방장이나 웨이터에게 당신들 잘못이 아니에요, 제 입맛이 문제예요, 얘기해 주고 싶었지만 스페인어가 안 되니 도망 칠 수밖에. 30분 만에 2만 원을 날렸지만, 계산할 때 기념으로 준 열쇠고리 가격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굶어 쓰러지진 않을 테니 트루히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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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9/16 12:55 2013/09/1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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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날씨는 무슨, 그냥 따뜻한 겨울이구만! 도착 만 하루가 지나고, 계속 추위에 떨고, 만 하루를 굶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침대 위.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고 속옷도 빨고. 숙소를 나서면 보이는 건 그저, 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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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8/01 00:54 2013/08/0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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