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처음 탄 건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방학이 되었고, 서울로 출장왔던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창가좌석에 앉아 바라본 바깥은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리고 그놈의 날개는 왜 그리 커서 풍경을 가로막는지!) 그 후로도 한동안 창가사랑은 계속되었고, 어쩌다 날개가 막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되면 마냥 좋아서 헤실거렸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오는 길엔 한국에 돌아오기 싫어서 멀어지는 육지를 보며 억지눈물을 흘리기도. (슬프긴 한데 눈물은 안 나오고. 달리 싫은 감정을 표현할 길은 없고. 그래서 억지로 막 울었다, 하하.)

그러나 이제 비행기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인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걸 점점 더 싫어하게 돼서인지, 나이를 먹어서인지, 나이가 듦에 따라 배뇨작용이 활발해져서인지, 딱히 어떤 계기도 없이 뚜렷한 기억도 없이 이제 나는 복도쪽 자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아버지가 내게 창가좌석을 내어준 것 같은 기분으로, 나 역시 창가는 초짜들에게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말이 좋아 '양보'지, 저 사람 저러는 양을 보니 비행기 몇 번 안 타봤군 호호, 하는 맘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다 떠나 장거리 비행에서 맘껏 먹고 '마시'려면 복도좌석은 필수. 각 열두 시간, 여덟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기에 인천에서부터 복도자리를 부탁해 두었다. 다행히 첫 구간은 복도 쪽이었지만 토론토-리마 구간은 좌석정리 중이라 배정을 할 수 없단다. 그리고 토론토 공항에서 약간 불안한 맘으로 받아든 보딩 패스에는 아악, 선명한 WIN. 에이 참,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번호를 보니 앞쪽이다. 이만하면 선방한 셈.

탑승하는데 힝공사 직원이 나름 서비스라고 "아리가토~" 하길래 "노노, 아임 코리안" 해 주었다. 분명 여권을 봤을 텐데 아리가토가 한국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해외에 나올 때마다 곤니치와와 아리가토는 참 지겹게 듣지만, 매번 거슬리는 걸 보면 나도 새삼 '조선의 딸'이구나 싶다. 정말 새삼스러운 감정이지만. 예전에 수업시간에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읽으면서 사안을 '객관화'하기 어렵고, 뭔가 학문탐구와 무관해 뵈는(?) 묘한 감정이 추가로 생기는 걸 보며 우리는 역시 조선의 딸인가 보다, 했었는데.

아무튼. 에어캐나다는 프레스티지 구간을 거쳐야 이코노미 좌석을 찾아갈 수 있는 구조인데, 이코노미 구간으로 들어갔는데도 내 번호가 안 나온다. 엥, 혹시 설마 말로만 듣던 공짜 좌석승급이 내게도 임하신 건가 두근두근, 하고 쫄래쫄래 한 바퀴 돌다 승무원한테 붙잡혀 표를 보여주니 좀 아까 지나친 그 프레스티지 좌석으로 안내해 준다. 아마 프레스티지가 다 안 팔려서 불쌍한 배낭여행객 하나 구제해 준 모양이다. 에어캐나다님, 정부시책에 반하는 냉방정책은 용서할게요. 이코노미보다 더 두껍고 좋은 담요 고마웠어요. 담요 하나 더 달랬더니 군말 없이 꺼내준 건 더 고마웠구요. (결국 담요 얘기에서 시작해 담요로 끝난 비행담)

여담. 이번에 새로 얻게 된 풀리지 않을 궁금증. 왜 기체는 내가 화장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요동치는가. 커피에 홍차, 주스, 과일 등등으로 엄청 활발해진 이뇨작용 덕분에 거의 2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갔는데, 꼭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앉기만 하면 기체가 요동치며 좌석벨트 매라는 안내방송 나왔다. 기체 잘못인지 내가 너무 자주 간 것인지. 그 와중에도, 아 이 상태에서 무슨 일 생기면... 내 마지막 모습이 이 꼴이면... 죽어서도 좀 부끄러운데;;; 그렇지만 이 와중에 어떻게 할 수는 없고 어쩌지;;; 싶었다. 허 참, 결국 창가건 복도건 비행기에선 그냥 소식하는 게 진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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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9/02 15:17 2013/09/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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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18시 30분

한 달 전에 급하게 결정한 여행이라 당연히 싼 표는 없었다. 개중 가장 싼 티켓이 캐나다 경유. 비행시간만 가는 데 스무 시간, 오는 데는 스물일곱 시간. 환승 대기시간까지 하면 꼬박 이틀씩이 걸리는 여정이다. 비행기 값만 생각하면 최소 일 년은 살다 와야 덜 아깝지 싶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탄 에어캐나다는 욕 나오게 추웠다. 한국의 추운 지하철(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보다 더 추웠다. 지하철이야 정 못 참겠으면 자리 옮기거나 내려 버린다지만 이건 꼼짝 없이 열 시간 넘게 앉아 있어야 하는데, 머리에 에어컨 냉기 닿으면 바로 편두통 오는데... 긴팔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지급 받은 담요로 머리를 한 번 더 감쌌다.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니 이젠 팔다리가 시리다. 참다못해 승무원을 불렀다. 저 얼어 죽을 것 같아요. 담요 하나만 더 주세요.

여분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간 승무원, 다시 오더니 남는 담요가 없단다. (없다니까 할 말은 없지만 여분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지금도 이해 불가능) 대신 "I'm freezing"이 심각해 보였던지 불쌍한 승객을 위해 커다란 생수병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연세 지긋해 뵈는 여승무원이었는데, 진짜 눈물 나게 고마워서 엄마라고 할 뻔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늘 드는 궁금증. 내가 많이 예민하고, 특히 에어컨 바람에 몹시 예민하고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인 거 인정. 그런데 정말 이 정도 온도에서도 다들 버틸 만한 거야? 이건 정말 냉장고 수준이라구!


다시 7월 29일 18시 30분

저녁에 출발해서 12시간을 왔는데, 깨워서 아침 먹으랄 땐 언제고, 아침 먹고 좀 있다 내리니까 저녁이란다. 날짜는 다시 7월 29일이 되었다. 이런 경우 대개 시간을 벌었다며 좋아하던데, 거기서 눌러 살 거 아니고야 돌아갈 땐 반대인데 뭐 그리 좋은가. (심지어는 날짜변경선을 자주 넘나드는 사람은 수명이 단축된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아무튼 토론토 도착. 환승 게이트는 ABCDEF 중 하나. 표지판을 보니 ABCDF는 방향이 같고 E만 다른 방향이다. 설마 1/6이겠냐 싶어 일단 ABCDF 쪽으로 가려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부터 하자 싶어 모니터를 봤더니 맙소사 E. 그래도 다행히 E는 코앞에. 그러나 줄 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입국심사관 두 명만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 뻘쭘. 셋이 눈이 마주치자 다 민망해서 웃었다.

- 어디 가니?
- 리마.
- 왜 가니?
- 여행.
- 거기 왜 가는데?
- 마추픽추가 있잖아.
- 거기 갈 거야?
- 응.
- 돈은 얼마나 갖고 있니?
- 얼마 안 돼.
- 얼만데.
- 미화로 600불 있어.
- 한국에선 직업이 뭐니?
- 땡땡땡이야.
- 회사 이름이 뭔데?
- (말하면 니가 아냐) 걍 쪼마난 회사.
-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고.
- 땡땡땡.
- 이쪽으로 나가면 밖으로 다시 못 나오는데 괜찮겠어? 담배를 피운다거나 하는 것도 못 해.
- 괜찮아.
- 즐거운 여행 하렴.
- 고마워.

입국심사는 영어회화 연습 같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나오며 피식 웃었다. 생애 처음으로 입국심사대 앞에 섰을 때는 저 짧은 영어도 못 알아들어 심사관이 결국 통역을 불러줬었는데. (마지막 질문만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한국에서 범죄와 연루된 행위를 한 적 있냐는. 그냥 들으면 황당한데, 음산한 표정에 까까머리, 시꺼먼 립스틱이 발린 당시 여권사진을 보면 그 질문이 왠지 수긍이 된다.)

다음 비행편까지는 다섯 시간 정도 남았다. 말이야 괜찮다 했지만 그 안에서 할 만한 게 없다. 와이파이도 안 되고. (이후에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못 쓰고'로 판명됨) 의자에 앉아 있다, 뒷자리 시끄러운 사람을 피해 면세점이랑 가게 구경을 하다 보니 유일하게 줄이 만들어져 있고 그 줄이 도무지 줄지 않는 가게가 하나 있다. 가서 보니 Tim Hortons. 보통 '팀홀튼'이라고 쓰고 부르는데 한국어 표기법상으로는 팀 호튼즈, 가 맞지 싶다.

말은 많이 들었는데 한 번도 마셔본 적은 없는 터. 평소라면 줄 서서 먹는 집이라면 사양했겠지만 얼마나 맛있나 보자 하고 대열에 합류했다. 샌드위치 하나, 커피 하나. 우물쭈물 주문하고 바로 텀블러 꺼내는데 눈앞에 이미 커피가; 컵 두 개씩 겹치는 사람이 예사로 있는 걸 보니 이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재활용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종이라도 덜 쓰게 한국처럼 재생지로 만든 슬리브를 주는 것도 방법일 것 같은데 왜 굳이 컵 두 개를 겹치는지. 이것도 지역별 특색인 것인지?

저렴한 가격을 생각하면 커피는 마실 만했다. 하지만 샌드위치는 확실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터키 베이컨 클럽 샌드위치였는데 내가 안 좋아하는 치아바타 빵! 게다가 터키랑 빵은 너무 차가웠고 결국 베이컨은 찾지 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문득 드는 생각. 나 다른 거 시켰던 거 아닐까?)


Apology accepted

줄 서 있다 벌어진 귀여운 사건 하나.

바로 뒤에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엄마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도넛이 먹고 싶다 했던 모양. 그런데 얘가 갑자기 나를 발로 찬다. 힘껏 퍽! 찬 건 아니고, 실수인지 일부러인지 헷갈리게. 그래 돌아보니 애가 방실방실 웃고 있다. 원체 애들이랑은 말을 길게 섞는 편이 아닌 데다(애들이랑만?;) 애가 웃는 게 워낙 해맑아서 그냥 Are you okay? (찬 건 걘데 내가 왜 괜찮냐고 물은 걸까. 너의 정신세계는 괜찮니? 이런 의미였을까?) 했더니 끄덕끄덕 하길래 한 번 웃어주고 말았다. 그러고 돌아서니 엄마가 애한테 묻는다. "너 뭐 했니?" "발로 차쪄요." "그럼 Excuse me 하고 I'm sorry 해야지." 여기까지 흘낏 듣고 다시 열심히 메뉴 구경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애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잉? 돌아봤더니 조금 전 걔가 울먹울먹 하면서 아임 쑤오어어리, 한다. 엄마 왈, 애가 미안하다고 뒤에서 말하는데 내가 안 돌아봤단다. 그래서 울음 터졌다고. 이제 괜찮다고. (그 시점에 뚝 그쳤다) 으하하, 아가야, 못 들어서 미안. 사과 받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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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9:19 2013/09/0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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