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강 미스터리

아르마스 광장 뒤쪽으로 좀 걸어가니 청계천 같은 곳이 나온다. 리마강이다. 사이즈는 한강에 한참 못 미치고, 청계천보다는 좀 더 넓은 것 같다. 사람들이 다리에 서서 한참씩 내려다보고 있다. (사진 자세히 보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리마강의 다리
<리마강의 다리>

그래 나도 강 구경 좀 하자 싶어 다가가니 웬걸, 이런 광경이 나를 맞는다.


리마강 공사현장
<리마강 공사현장>

안내문을 읽을 수 없어 대충 짐작하건대, 원래는 강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다른 것으로 변모 중인 듯하다.

리마강 개발사업 안내판
<리마강 개발사업 안내판>

그런데 왜, 더 이상 강도 아닌 공사판을 강물처럼 하염없이들 바라보는지는 모르겠다. 할 일이 없다기엔, 근처에 공원도 있고 노점도 있고. 공사 관련자들이라기엔 한마디 간섭도 없고.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분들이라기엔 그 수가 제법 되고. 강물이 흐르던, 옛날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걸까? 다가올 삐까뻔쩍한 도로들을 그려보는 걸까?


경비대 교체식과 스타벅스

(옛)강변을 따라 벤치와 작은 광장, 노점들이 모여 있는 곳을 한 바퀴 돌고 대통령궁으로 돌아왔다. 열두 시가 안 됐는데 벌써 군악대 연주를 시작했다. 울타리 바깥엔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고, 군인들은 열심히 교통정리(?) 중이다. 트럼펫 끝에 악보를 끼우고 연주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래서인지 뭔가 엄숙한 분위기이긴 한데 동시에 어설프다. 울타리 앞에서 몇 곡 연주하고 물러서길래 끝인 줄 알았더니 그건 그저 호객행위(?)였을 뿐. 광장 가장자리로 가더니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메인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는지 군악대는 더 이상 악보를 보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음악이라 악보는 필요 없는지도. 광장 양 옆으로 열 맞춰 경비대가 등장한다. 음악 때문인가, 뭔가 좀 애잔하다. 치켜드는 발 높이가 눈에 띄게 차이 나는 것도, 발 내려놓는 타이밍이 조금씩 다른 것도, 앳된 얼굴들도, 다. 포스트를 쓰다 말고 찾아보니,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인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식민지시대 농민혁명가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를 기리는 곡이란다. 내친 김에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니 pasar에는 넘다, 지나가다, 이동하다, 이런 뜻 외에도 멈추다, 사라지다, 살아가다, 지내다, 죽다, 이런 뜻도 있다. 그럼 "El condor pasa"는 콘도르가 지나가네, 가 될 수도, 콘도르칸키가 죽는구나, 가 될 수도 있겠구나. 알고 나니 더 애잔하네.

경비대 교체식
<경비대 교체식 - 군악대 연주와 구경꾼들>

그러나 교체식을 보면서 현장에서 깨달은 건 따로 있었으니, 역시 난 걷기 위한 몸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 아이고 허리 발목 발바닥이야. 얼마나 걸었다고 발목이 끊어질 듯 아프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이후 루트따위는 잊기로 하고, 유니온거리를 지나올 때 보아 둔 스타벅스로 향한다.

다국적기업, 특히 음식을 다루는 다국적기업의 몹쓸 좋은 점 하나는, 해외에서 만났을 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거다. 세계 어딜 가도 똑같은 간판과 인테리어, 대동소이한 메뉴, 비슷한 가격. 나 여기 어딘지 알아. 뭘 먹어야 할지도 알고 있고,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 두려움이나 망설임 같은 건 없지.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고. 그저 일상처럼 하면 돼. 긴장이 풀린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참, 페루 스타벅스에는 ‘아이스’ 메뉴가 없다!) 새끼캥거루(아이패드)를 뱃속에서 꺼내 지도를 살핀다. 터미널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너무 이르고, 더 걷기엔 체력이 달린다. 그러니 가는 길에 있는 예술박물관에 들렀다 터미널로 돌아가기로 한다.


파사, 뽀르떼의 진실

론리에는 이 즈음 페루의 평균기온이 나와 있었다. 18도였나. 그럼 봄가을 날씨쯤 되겠군, 반팔과 얇은 겉옷 몇 벌이면 되겠지 했던 게 패인이었다. ‘평균’은 최댓값과 최솟값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평균기온만 가지고는 새벽에는 2, 3도까지 내려가고 한낮에는 20도를 훌쩍 넘는 이 동네 일교차를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도착 첫 날부터 벌벌 떨게 된 쥔장, 유니온거리 옷집에 들어가 스웨터 한 벌을 사기로 한다.

앞에 지퍼가 달린 아크릴 스웨터의 가격은 16,000원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었더니 뭐라 뭐라 한다. 그 와중에 '코멘트'라는 말을 건지고 사인하라는 건가? 코멘트가 없다고? 무슨 말? 한참 궁리를 했으나 알 길이 없다. 아멕스라 안 되나(페루는 확실히 비자의 나라다) 싶어 비자카드를 내밀었는데도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이 언니 또박또박 말하길, 파사, 뽀르떼. 왓 이즈 파사 뽀르떼? 파사는 무슨 전치사인가 보지? for 정도? 근데 뽀르떼는 뭐야? 둘 다 답답하긴 마찬가지. 이 상태로 몇 분이 지나고 보다 못한 옆 직원이 거든다. 저기;;; 죄송하지만 거드셔도 못 알아듣거든요;;; 그때 옆 직원이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본인의 ID카드다.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그제야 Oh, you need my passport! 하고 여권을 꺼내 주었다. 그러니까 처음 들었다고 생각한 '코멘트'는 '도큐멘트'였던 거고, 카드 사용자의 신분확인이 필요했던 거고, 파사 뽀르떼(pasaporte)는 패스포트(passport)였던 거지. 첫날부터 완전 식겁. 그래도 이렇게 호되게 겪은 덕에 여행 내내 이민국이나 은행에서 파사포르테 보여 달라는 요구에 넹넹! 할 수 있었다.

한 겹을 더 입었어도 여전히 춥지만 어쨌든 예술박물관으로 간다. 리마 예술박물관의 줄임말은 '말리(MALI: Museo de Arte de Lima)'다. 사방에 'MALI'가 쓰여 있어서 처음엔 무슨 화가 이름인 줄 알았다. 줄임말이라는 걸 깨닫고 또 혼자 으쓱 으쓱. 말리에는 사보갈 특별전이 한창이었는데, 굉장히 유명한 화가인가 보았다. 평소에는 입장권을 판매하는데 페루 독립(7월 28일)기념주간 행사 덕분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사보갈은 몰랐던 분인 데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라 특별히 여기 보탤 말은 없지만 관람객만은 인상적이었다. 딱히 잘들 차려입은 것도 아니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구성도 다양한데 모두 가이드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각자 개별적으로 관람하는 게 아니라 몇 명씩 모아서 설명해 주는 것과, 각 전시실에는 정해진 인원만 입장하게 하는 것도. 역시 스페인어를 공부했었어야 해. 그런데 분명 2층 건물인 것 같은데 2층에 올라가는 길을 못 찾겠다. 대충 찾아보다 결국 포기.


밤차 타고 트루히요로

터미널에 돌아오니 고작 오후 네 시다. 가는 길에 밥집이 있으면 늦은 점심을 먹을까 했는데 영 끌리는 데가 없다. 끌리는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개시'하기 어려워서다. 나는 이상하게 낯선 곳에 가면 쉽게 먹을 걸 먹지 못한다. 입맛이 보수적이어서이기도 하고, 긴장해서이기도 하고, 낯가림이 심해서이기도 하다. 여기선 스페인어를 못 읽은 탓도 크다. 덕분에 들어가 볼까? 하는 집이 두어 군데 있었음에도 메뉴판만 몇 번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터미널 2층에 간단한 스낵을 파는 것 같은데 딱히 올라가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배고프겠다, 춥겠다, 그 때부터 불쌍한 터미널 동양 거지 코스프레가 시작되었다. 담요 하나 뒤집어 쓰고 졸다가 오가는 사람 구경하다, 아이 추워 하다 (왜 문은 안 닫냐고!) 보니 마침내, 드디어, 버스 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 저녁을 다 굶었네. 아침에 비행기에서 이게 오늘의 유일한 식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거지놀이 하며 바라본 터미널 풍경
<거지놀이 하며 바라본 터미널 풍경>

버스는 2층 맨 앞좌석이다. 앞이 통유리고 발 뻗기도 좋아 인기 많은 좌석이다. 으, 그런데 어디선지 화장실 냄새가 난다. (알고 보니 그 언저리 1층이 화장실. 흑.) 출발한지 오래지 않아 자신을 샌드위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으로 보이는 빵 한 조각과, 디저트로 의심되는 빵 한두 조각, 홍차가 배급되었다. (비싼 고속버스는 이렇게 ‘식사’도 준다) 빵맛이 무슨 상관.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와이파이도 된다. (접속이 안 될 때도 있다. 나는 안 되는 시간이 더 길었다.) 내 시장기를 해결해 주셨는데 와이파이쯤이야.

목적지인 트루히요까지는 버스로 아홉 시간이 걸린다. 대여섯 시간 자고 일어나도 휴식 따윈 모른다는 듯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다. (이런 장거리 버스에는 기사가 두 명 탑승하고, 교대로 운전한다.) 풍광은 좋구나. 이제 해가 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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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17:01 2013/09/1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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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는 터미널 위치가 안 나와 있기에 구석에 앉아 지도 탐구부터 시작했다. 미리 정해 놓은 루트는 있고, 문제는 출발점인 산 마르틴(San Martin) 광장까지 걸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다. 한참 만에 터미널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거대물체가 지도에 있는 스타디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 나 진짜 기특한 거 같아. 확인을 위해 앞에 서 있는 아주머니한테 건물을 가리키며 "스타디움?" 했더니 "시"란다. 우하하. 그라시아스(Grasias, 고맙습니다)!

길 묻는 얘기 나온 김에. 해외로 자유여행을 가고는 싶은데 언어가 안 돼서 못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언어가 되면 훨씬 많은, 양질의 경험을 보다 편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뭔가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참고로 현지어 하나 모르는 내가 돌아다니면서 길 묻는 방식은 이랬다. 일단 길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 앞을 막아선다. "익스큐즈 미. 땡땡땡(목적지)?" 그럼 백에 아흔아홉은 손짓 발짓 표정을 섞어 성심성의껏 알려준다. 그럼 난 확인차 되묻는다. "아,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라고요?"라던가. "건너가야 된다고요?"라던가. 영어 아니고, 스페인어 아니고, 한국어 맞다. 자국어만 쓰는 상대방 입장에서는 영어나 한국어나 못 알아듣는 말이긴 매한가지인데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내게도 외국어인 영어를 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톤이나 표정, 행동 등의 언어외적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객에게 친절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건 언어구사력보다는 눈치라는 데 한 표.

아이패드에 지도를 띄워놓고 지린내가 진동하는 골목을 지나 열심히 걷는다. 한 20분 걸으면 목적지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웬 정체불명의 제복 입은 남자가 내게 관심을 보인다. 군인인가? 경찰인가? 했지만 그냥 그 건물인지 회사인지의 안전요원. 사람을 만난 김에 다시 한 번 확인한다.

- 산 마르틴 광장이 이쪽 맞아요?
- 이쪽 방향은 맞는데, 그거 뭐예요?
- 응? 뭐요?
- 그 테이블.
- 테이블? 테이블?
- 손에 들고 있는 그거요.
- 아, 아이패드. 태블릿요.
- 길거리에서 그거 들고 다니지 말아요. 언제 누가 들고 달아날지 몰라요. 그런 건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확인하도록 하세요.
- (헉) 네.

그 시간 이후로 아이패드는 졸지에 아기캥거루가 되어 여행 내내 내 뱃속에 파묻혔다. 아이패드는 놓고 가라는 그분 말씀 들을 걸.

왕복 8차선쯤 되는 대로의 교통신호조차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없어 교통경찰이 진을 치고 있다. 그런데 교통경찰도 통행에 방해되는 수준이 아니면 신호위반 따위는 묵인하는 것 같다. 따라서 무사히 길을 건너려면 빨간불이냐 녹색불이냐 같은 건 잊고, 능숙하고 당당하게 다니는 현지인을 졸졸 따라가야 한다. 무섭고 겁나는 와중에도 한 가지 웃겼던 건, 대로 중간에 광장처럼 생긴 공원이 있길래 혹시 목적지? 하고 가보려는데 들고 날 수 있는 횡단보도가 없다, 아하하; 그런데 공원엔 벤치도 있고 막; 이건 정부에서 무단횡단 권장하는 건가?

드디어 산 마르틴 광장 도착.

산 마르틴 광장
<산 마르틴 광장(정확히는 광장의 중앙장식)>
(별 의미 없지만 여행에서 처음 찾아간 목적지이고 처음 찍은 사진이라 올림)

원래 오늘의 계획이 걷기, 였으니 여기서부터 아르마스 광장까지 걷기 시작한다. 이 길에는 페루 최초의 미사가 열린 곳에 세웠다는 성당 Iglesia de la Merced가 있다. 한국말로 하면 은혜교회; 성당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서 깊은 곳이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도 많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 나도 뭔가를 빌고 싶었지만 딱히 기도할 거리가 없다. 그러다 잠시 서서 마음의 평안을 빌었다.

미사를 드리는 공간 양쪽 벽에는 마리아와 예수, 성자들을 형상화 한 장식들이 가득이다. 그런데 구유에서 출산한 성모 마리아는 웬걸, 선녀 같은 옷을 입고 계신다.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걷는 예수님 형상은 그 와중에도 보라색 '비로도'에 금실 수가 놓인 옷을 입고 계시고. 보라색은 '왕의 색',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색깔이었다. 왕의 색이 된 이유는, 합성염료가 없던 시절, 염색하기 가장 어려웠던 색이기 때문.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색이 보라색인 게 여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남성을 상징하는 파랑이 만나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이것이 "여성에게 권력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어떤 게 맞는 말인지, 혹은 둘 다 맞는 건지는 궁금한 분들이 알아서 찾아 보시도록. 어쨌든 참으로 스페인 사람처럼 생긴, 보라색 빌로드 옷을 입은 예수님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다른 지역 성당에서도 계속 비슷한 모습이라 그 인상은 곧 사라졌지만, 거대한 마호가니 장식만은 이 성당이 유일한 것 같다.

성당을 나와 유니온 거리를 걸었다. 옛날에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던 거리다. 역사 따윈 이름에만 남아있고 지금은 거대한 쇼핑거리가 되었다. 기분이 묘하다.

유니온 거리의 끝에 아르마스(Armas) 광장이 나온다. (스페인 식민지였던 이 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이 광장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다.) 광장 주위에는 대통령궁과 대성당이 있다. 대성당의 입장료는 만 원? 만오천 원? 이미 택시비로 적잖은 돈을 써버린 터라 들어갈지 말지는 며칠 뒤 다시 왔을 때 결정하기로 한다. (결국 여긴 들르지 못했다. 피사로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던데, 교인이 아니라서인지 크게 아쉽진 않다.)

리마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

리마 대성당
<리마 대성당>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통령궁 문은 닫혀 있고(당연;)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거기가 대통령궁인지도 모르고 어슬렁거리다 웬 군인에게 딱 잡혔다. 불심검문 같은 건 아니고, 현지인과도, 보통의 관광객과도 구별되는 얼굴이어서인 것 같다. 왜들 그렇게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 하는지. 아무튼, 열두 시에 경비대 교체식이 있으니 구경 오란다. 오호, 좋은 정보 감사. 한 시간 반 정도 남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실제로 도착부터 지금까지 지난 시간은 고작 네 시간 가량이라는 거. 대체 한 달 여행 가지고 포스트 몇 개를 우려먹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열두 시가 될 때까지 주위를 좀 더 걸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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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6 09:41 2013/09/0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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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는 무서워

도착 첫날. 한국에서 생각해 둔 계획은 이랬다. 아침 여섯 시 반에 리마에 도착하면 일단 버스 터미널에 가서 배낭을 맡긴 후 시내를 쏘다니다 밤에 버스 타고 북부 트루히요(Trujillo)로 이동하기. 유명 관광지들이 대개 남쪽에 있어서 중미에서 넘어오지 않는 한 한국 여행자들은 북부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트루히요에 잉카 이전 시대의 유적지가 있다 해서 일정에 넣었다. 트루히요에 갔다 리마로 돌아와 남쪽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잉카만 보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첫 이동이라 트루히요까지 가는 버스는 미리 예약해 둔 터다. (몸소 겪었음에도 생각할수록 세상 참 신기하다. 한 자리에서 지구 맞은편 고속버스 좌석까지 예약이 가능하다니.)

별일 없이 새벽에 도착해 수많은 택시 호객꾼을 물리치고 iPeru(페루정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여행안내 센터)를 찾았다. 이크, 비행기 도착은 1층인데 iPeru는 2층에 있다. 배낭까지 이고 지고 찾아가야 하는데 참 불친절한 동선일세. 까딱 잘못하면 'Free tourist information'이라 우기는 여행사 호객꾼에게 잡혀가기 십상이다. (실제로 두 번째 방문 때 당했다.) 2층에 올라가도 한참 헤맨 끝에야 작은 사무실을 찾을 수 있었다.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 거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수준으로 질문을 던지는 앞 사람 덕에 한참을 기다리다 (계속 끝날 것처럼 보이는 통에 배낭도 그대로 짊어지고 계속 기다림. 그 사람 결국 내가 나올 때까지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찍고 있었음) 겨우 지도를 얻으며 물었다. Linea 버스 터미널(페루는 종합 고속버스 터미널이 없고 각 버스회사마다 독자적인 터미널을 운영한다. Linea는 페루 북부지역을 운행하는 버스회사 이름)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택시란다. 내가 바보지, 왜 가장 빠른 길을 물어봤을까. 제일 싼 길을 물었어야지, 라고 며칠 뒤에야 생각이 나더군.

어쩔 수 없이 택시 호객꾼에게 잡혀 드려야 할 판이다. 결국 다시 내려와 그린택시 팻말을 목에 건 사람을 따라갔다. 가격을 물으니 정찰제라며 팻말 뒤쪽을 보여주는데 55솔. 한화 25,000원쯤 된다. 어리바리 따라 나서는 게 아닌데, 택시 타고 나오면서 보니 공항 밖에 일반 택시들이 진을 치고 있다. 내가 탄 건 아무래도 모범택시쯤 되는 모양이다. (그린택시는 공항 안에서 합법적 영업이 가능한 택시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번 공항방문에서는 제법 똘똘하게 굴었으니 아주 헛돈을 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택시비가 아니었다. 탄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문화충격에 휩싸인 쥔장.

사람인 척하는 차와 자동차인 척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차와 사람이 한데 뭉쳐 다니는 광경은 참으로 당황스러웠으니, 차가 지나가는데도 사람들은 그 앞을 휙휙 지나간다. 차는 사람을 보고 멈출 생각이 없다. 경적만 울려댈 뿐. 그제야 론리가 '이것만은 가지고 가세요'에서 왜 귀마개를 꼽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차들이 왜 하나같이 긁혀 있고 테이프 덕지덕지인지도. 타블로이드 신문을 무릎에 펼쳐두고 짬짬이 읽는 것(짬짬이, 라 함은 신호에 멈췄을 때와 차가 막혀 천천히 가고 있을 때 모두를 포함한다)도 불안해 죽겠는데 대체 이 사람들 뭐 하자는 건가, 얼이 빠졌다. 한번은 웬 남자와 내가 탄 택시가 서로 양보 없이 지나가다 부딪칠 뻔한 상황을 보고 으헉, 깜짝 놀랐더니 기사 아저씨가 쟤 왜 저런다냐 하는 얼굴로 한동안 쳐다보다가 "옴브레(남자)?" "시(네)!" 했더니 막 웃는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냐고. 아이고야, 나 완전 한국 촌뜨기 된 듯.

페루의 자동차들
<페루의 자동차들>

두 시간 같은 20분이 지나 터미널에 도착. 내가 그렇게 모자라 보였던 건지 이 아저씨, 60솔 줬더니 대놓고 5솔은 팁으로 달란다. 됐거든요! 그러나 정작 험난한 하루는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다 사전준비 없이 무작정 떠난 내 탓이다.


스페인어를 못 하는 사람과 영어가 안 되는 사람이 만나면

발권하는 직원한테 아이패드를 띄워 예약내용을 보여 줬더니 발권 시스템을 한참 뒤진다.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온 사람을 처음 본 모양새다. (아이패드도 처음 보았을지 모른다.) 어찌 어찌 예약여부는 확인한 것 같은데 미리 출력되어 있는 티켓 철을 뒤적이더니 "I don't have a ticket(표 없어요)" 하는 거다. 뭐라? 밑도 끝도 없이 표가 없다면 어떡해?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나 뭘 물어도 I don't have a ticket. 그 와중에도 '텐'을 들은 것 같아 영어로 "제가 너무 일찍 온 건가요? 밤 열 시에 다시 올까요?" 해 봤지만 돌아오는 건 불쾌한 표정의 스페인어 답변뿐. 그래도 눈칫밥 40년, 결국 지금 발권은 안 되니 밤에 다시 오라는 얘기렷다. 그게 아니어도 지금 당장 뭘 할 수는 없어 뵈고, 일단 배낭이나 맡기자.

큰 짐도 각자 알아서 버스 하단 짐칸에 넣고 찾는 한국과 달리, 페루 고속버스에는 비행기 수하물 수속처럼 짐을 받아 관리해 주는 직원이 따로 있다. 이 사람이 짐에 번호 태그를 달고, 주인에게 표딱지를 준다. 도착해서 짐을 찾을 때도 짐에 붙은 번호와 티켓이 일치하는지 확인 후 내어준다. 추가 수하물에 대해서는 추가운임도 받는다. 물론 이 모든 서비스는 비싼 버스일 때 얘기다. 이 동네는 버스 회사와 좌석 등급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 두세 배도 차이가 난다.

짐 수속원은 참 착하게 생겼지만 영어라곤 '예스'도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게, 내가 밤 열 시 반 버스를 탈 건데 그 때까지 배낭 좀 맡아 달라는 얘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일이삼사오, 부에노스 디아스, 아디오스, 베사메무초...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다고는 하지만 얼마 되지도 않을뿐더러 그게 언제인데 생각이 날 리가. 이때 오지랖 택시 기사 (여기까지 데려다 준 기사 아니고 터미널에 진 치고 있는 기사 중 한 명) 등장. 오지랖은 고마운데, 그게 걸맞은 영어는 갖추질 않아서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계속 짐 수속원에게 티켓을 보여 주라고, 그래야 짐 맡아 준다고, 참 친절히도 설명하신다. 아 티켓 없다고! 저 언니가 안 줬다고!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이따 밤에 다시 오면 준다고 했다고! 아이패드 열어서 예약증 보여주면서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이 소동은 결국 기사 아저씨가 나와 아이패드를 데리고 발권 데스크에 가서 좀 전의 그 무서운 언니한테 스페인어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에휴. 어쨌든 이제 짐도 덜었으니 리마 탐구생활을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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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9/04 11:34 2013/09/0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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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처음 탄 건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방학이 되었고, 서울로 출장왔던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창가좌석에 앉아 바라본 바깥은 얼마나 신기했던지. (그리고 그놈의 날개는 왜 그리 커서 풍경을 가로막는지!) 그 후로도 한동안 창가사랑은 계속되었고, 어쩌다 날개가 막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되면 마냥 좋아서 헤실거렸다. 처음으로 해외에 나갔다 오는 길엔 한국에 돌아오기 싫어서 멀어지는 육지를 보며 억지눈물을 흘리기도. (슬프긴 한데 눈물은 안 나오고. 달리 싫은 감정을 표현할 길은 없고. 그래서 억지로 막 울었다, 하하.)

그러나 이제 비행기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져서인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는 걸 점점 더 싫어하게 돼서인지, 나이를 먹어서인지, 나이가 듦에 따라 배뇨작용이 활발해져서인지, 딱히 어떤 계기도 없이 뚜렷한 기억도 없이 이제 나는 복도쪽 자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아버지가 내게 창가좌석을 내어준 것 같은 기분으로, 나 역시 창가는 초짜들에게 양보하게 된다. 그러나 말이 좋아 '양보'지, 저 사람 저러는 양을 보니 비행기 몇 번 안 타봤군 호호, 하는 맘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다 떠나 장거리 비행에서 맘껏 먹고 '마시'려면 복도좌석은 필수. 각 열두 시간, 여덟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기에 인천에서부터 복도자리를 부탁해 두었다. 다행히 첫 구간은 복도 쪽이었지만 토론토-리마 구간은 좌석정리 중이라 배정을 할 수 없단다. 그리고 토론토 공항에서 약간 불안한 맘으로 받아든 보딩 패스에는 아악, 선명한 WIN. 에이 참,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번호를 보니 앞쪽이다. 이만하면 선방한 셈.

탑승하는데 힝공사 직원이 나름 서비스라고 "아리가토~" 하길래 "노노, 아임 코리안" 해 주었다. 분명 여권을 봤을 텐데 아리가토가 한국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해외에 나올 때마다 곤니치와와 아리가토는 참 지겹게 듣지만, 매번 거슬리는 걸 보면 나도 새삼 '조선의 딸'이구나 싶다. 정말 새삼스러운 감정이지만. 예전에 수업시간에 <<내셔널리즘과 젠더>>를 읽으면서 사안을 '객관화'하기 어렵고, 뭔가 학문탐구와 무관해 뵈는(?) 묘한 감정이 추가로 생기는 걸 보며 우리는 역시 조선의 딸인가 보다, 했었는데.

아무튼. 에어캐나다는 프레스티지 구간을 거쳐야 이코노미 좌석을 찾아갈 수 있는 구조인데, 이코노미 구간으로 들어갔는데도 내 번호가 안 나온다. 엥, 혹시 설마 말로만 듣던 공짜 좌석승급이 내게도 임하신 건가 두근두근, 하고 쫄래쫄래 한 바퀴 돌다 승무원한테 붙잡혀 표를 보여주니 좀 아까 지나친 그 프레스티지 좌석으로 안내해 준다. 아마 프레스티지가 다 안 팔려서 불쌍한 배낭여행객 하나 구제해 준 모양이다. 에어캐나다님, 정부시책에 반하는 냉방정책은 용서할게요. 이코노미보다 더 두껍고 좋은 담요 고마웠어요. 담요 하나 더 달랬더니 군말 없이 꺼내준 건 더 고마웠구요. (결국 담요 얘기에서 시작해 담요로 끝난 비행담)

여담. 이번에 새로 얻게 된 풀리지 않을 궁금증. 왜 기체는 내가 화장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요동치는가. 커피에 홍차, 주스, 과일 등등으로 엄청 활발해진 이뇨작용 덕분에 거의 2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에 갔는데, 꼭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앉기만 하면 기체가 요동치며 좌석벨트 매라는 안내방송 나왔다. 기체 잘못인지 내가 너무 자주 간 것인지. 그 와중에도, 아 이 상태에서 무슨 일 생기면... 내 마지막 모습이 이 꼴이면... 죽어서도 좀 부끄러운데;;; 그렇지만 이 와중에 어떻게 할 수는 없고 어쩌지;;; 싶었다. 허 참, 결국 창가건 복도건 비행기에선 그냥 소식하는 게 진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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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tcetera

2013/09/02 15:17 2013/09/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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