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의에 의해 타고 들어간 링크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방선거를 맞이하여 투표안내문이 '세대주' 앞으로 오는 데 대한 개선을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투표안내문을 받은 이래로 계속 나홀로 세대를 구성했었기에 투표안내문이 세대주에게만 온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건 나의 불찰(?)이다. 아무튼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중앙선관위원회가 공직선거법에 의거하여 투표안내문을 각 세대주에게 발송하는 것이 여성 및 젊은 세대의 투표참여와 관련하여 차별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에 선거에 대한 공평한 정보접근을 위해 투표안내문 발송용봉투에 투표권자(당 세대 선거인) 전원의 이름을 표기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이에 관한 선관위의 답변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에서 투표안내문을 세대주에게 발송하도록 규정한 것은 일반적으로 세대는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대주에게 투표안내문 등 선거정보를 보내더라도 세대주와 세대원들이 선거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현실을 고려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흥미로운 건, 이 짧고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제안과 답변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뜯어내 살펴야 할지 나도 참 대책이 안 선다.


1.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이름의 직무유기

쉬운 것부터 가자. 아직도 공문에 이렇게 무식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니 놀랍도다. "일반적으로 세대는 가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니, "세대주와 세대원들이 선거정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현실"이라니, "일반"적이지 않은 집은 대체 어쩔 거야. 세대가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세대주가 혼자 보고 버려도 되나요? 안 보고 그냥 버려도 되지 않나요? 세대주가 나쁘거나 게을러서, 혹은 참으로 개인주의적이어서 세대원이랑 '정보 공유' 안 하면 또 어쩔 거냐구. 이런 우려는 민우회가 저 제안을 하면서 든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가족들이 전반적으로 선거에 대해, 특히 지방선거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선거공보물이 왔더라도 내 앞으로 오지 않는 이상 잘 뜯어보지 않게 되고 아버지가 뜯어본 공보물을 찾아서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한 사람이라도 더 투표에 참여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선관위가 이런 식으로 뭉뚱그리는 건 직무유기 아닌가? 차라리 "올바른 제안이긴 하지만 업무 처리의 효율과 비용의 문제" 내지는 "공직선거법 사안이므로 국회와 협의" 운운했다면 동정이라도 얻었을 거다.

여기서 선관위에 퀴즈. 많이 부실하긴 하지만 가족관계등록법이 왜 개정됐을까? 바로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증명'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자녀를 입양한 경우, 재혼해서 새로 가족을 구성한 경우 등등등, '가족'을 이룰 수 있는 온갖 경우의 수를 무시한 채 생물학적 부와 모, 그리고 그 둘이 공동으로 낳은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만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정상가족' 틀에 갇히지 않은 '가족(과 이를 구성하는 개인)'은 자신들이 노출하길 바라지 않는 정보가 국가증명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국민을 '보호'한다는 국가가 나서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한 셈이 되었으니 이렇게 꼴이 우스울 수 없다.

선관위는 '선거'만 관장하느라 몰랐나 본데 이런 사례 좀 보고 배우시라. 당신들의 나라에는 "일반"인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신들 나라 사람이다. 국회도 알고 한나라당도 아는데(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은 한나라당에서도 냈었다) 왜 당신들만 모르나.


2. "일반"이라는 이름의 정보침해

그런데 이 "일반"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민우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김개똥(부), 홍말똥(모), 이소똥(자)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 치자. 그리고 선관위가 단체의 제안을 받아들여 투표안내문에 세대원의 이름을 다 적는다 치자. 한데 이건 등기도 아니라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우편함에 그냥 대충 끼어 있다(부피도 좀 커야 말이지). 그래 옆집 앞집 윗집 사람이 지나가다 봉투에 쓰인 이름을 읽는다(일부러 읽지 않는대도 다가구 우편물은 건물별로 한데 모아두는 데가 많잖은가). 응? 저 집은 식구가 왜 저래? 애가 아빠를 닮았길래 의심도 안 했더니만 알고 보니 여자가 애 데리고 재혼했구먼(현행법에 따르면 투표권이 나오는 나이에는 재혼한 아버지의 성으로 바꾸고 싶어도 못 바꾼다!), 쯧쯧. 이런 집은 어떤가. 홍말똥(모), 이소똥(자). 아니 저 집 남편은 외국 지사 발령 받아 가 있다더니 이혼녀구만? 또 이런 집은? 홍말똥(모), 홍소똥(자). 이그, 저 집은 남편이랑 사별했다더니 알고 보니 '미혼모'구만, 운운하는 얘기가 암암리에 퍼지지 말라는 법 없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권리를 구제할 수 있는 A안, 그리고 조금 더 적은, 그러나 A안으로 혜택을 볼 사람들보다 좀 더 '심각한' 권리 침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B안이 있을 때, 어느 단체가 소위 '선택과 집중'으로 A안을 미는 걸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건 A안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에게 왜 B안을 택하지 않았냐고 따질 게 아니라 내가 B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A안을 시행하기 위해 B 그룹 사람들의 권리를 '현저히' 침해하는 건, 피해야 하는 일이다. '운동'하는 단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을 민우회는 왜 '저질렀'을까? 혹시 이로 인해 얻는 '이득' 내지 '구제'가 '침해'보다 크다고 생각했다면, 그러니까 "비(非)세대주 투표의  정보접근에 대한 차별 개선 및 투표참여율 제고"가 원치 않는 정보 노출로 인해 받게 될 피해(여기도 '가족관계등록법 퀴즈' 내 드릴까요?)를 상쇄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래서 '강행'했다면(사실 민우회가 저 제안서를 보내기 며칠 전에 얘기를 들었다. 회원으로서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을 근거 삼아 반대했다. 그런데 결국 제안서가 발송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자초지종을 물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다) 굉장히 실망스러울 거다.


3. 젠더 감수성 vs 정보 감수성

그렇다면 "일반" 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심'해도 좋은 것일까. 글쎄, 이런 가정은 어떤가. 주민등록번호만 뺀다면, 옆집 사람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주소랑 이름 줄인데 뭐 어떤가. '왠지' 께름칙하다면 왜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만 쏙 뺀 주민등록등본'과 민우회에서 제안한 '전 세대원 이름 병기'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마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내 눈엔 별 차이 없어 뵈는데(뭐, 투표권 없는 사람은 빠지기는 하겠네), 어떤가?

정보가 각각의 자리에 '있는 것'과 그것을 '모아서 보여주는 것'은 천양지차다. 전교조는 왜 NEIS 도입을 반대했을까? 인권단체들은 왜 구 여권 발급 운동을 벌이면서까지 전자여권을 반대했을까? 왜 시민단체들은 민간 보험사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보유한 의료기록에 접근하는 걸 막으려고 할까? 각각의 사안에는 각각의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안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사생활 침해와 개인정보 '집적'에 대한 우려다.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한데 묶는 게 보기에도 좋고 제어하기도 편하겠지만 관리 대상에게 정보의 집적은 잠재적인, 혹은 실질적인 위협이다. 모으기 불편하면 불편할수록 안전해지는 게 바로 개인정보다.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그거슨 진리' (세대원들 이름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것이 심각한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정녕 '민우회'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운동과 불화'하겠다). 하여 나는 한국여성민우회도 연명했던 "NEIS 문제의 올바른 해결과 정보인권 수호를 촉구하는 전국 1,089개 민주시민사회인권단체 기자회견문"에 나오는 문구를 그대로 돌려주고자 한다. "작금의 문제를 '정보인권'의 관점에서 이성적으로 바라보기를 다시 한 번 강력히 촉구한다."

매사 정보 감수성이 "일반"인들보다는 조금 높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건대 젠더 감수성과 정보 감수성, 둘은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는 관계가 아니며 두 가지 모두 운동과 활동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젠더 감수성과 정보 감수성이 충돌하지 않게 하면서 이 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훌륭한 아무개 회원의 제안대로 봉투 겉면에 세대 내 모든 유권자에게 보낸 것임을 명확히 하거나 수신인을 "유권자(이름이랑 헷갈리면 '일동'이라고 하든가, 아무튼 방법은 찾아보면 있을 거다)"라고 하는 게 아닐까. 어떻든지 간에, 투표권을 가진 세대원 이름을 모두 쓰는 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요는, 저런 중선관위가 선거를 관장하는 나라에 사는 것은 이미 충분히 부끄러우니 단체 회원인 것까지 부끄럽게 하지는 말아 달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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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21:31 2010/06/07 21:31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얼마 전 번역본으로 출간된 <권력의 병리학>이다. 전체 500쪽이 넘는 책을 이제 머리말까지(60쪽;;;) 읽었는데, 시작 부분은 좀 지루하다. 아니, 지루하다기보다 늘어진달까. 문장이 상당히 길어서 누가 누구를 수식하는지, 뭐가 어디에 속하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보지 않으면 눈으로만 훑기 십상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미주에 지쳐 버렸는데, 몇 문장 안 가 한 바닥씩 나오는 주석을 처리하려면 미주밖에 방법이 없었겠다 싶으면서도 인용출처로 점철된 게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주석까지 모두 읽는 나로서는 두꺼운 책의 앞뒤를 왔다 갔다 하기가 영 번거롭다. 게다가 그 긴 미주를 읽고 돌아오면 이미 본문은 까먹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 일쑤.

그러나 머리말을 건너뛰었더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없었을 것이다. 머리말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한 이틀간 계속 머릿속을 헤매고 있어서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계속 성가시게 하는 건 세 쪽에 걸친 상황묘사. 배경은 과테말라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줄리아와 함께 마을의 보건 운동 지도자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에 앞서 어떤 교육을 참관하도록 초청받았다. 그 교육은 어느 성당의 학교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에우에테낭고 시 너머로 낮은 산이 보이고 이 산으로 이어지는 진흙탕길 끄트머리에 그 성당이 있었다. 교육 내용은 성 역할이었다. 교육 대상은 원주민들이었고, 교사는 수도에서 온 두 명의 젊은 여성이었다. 날씬한 몸매의 교사들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보스턴에서 온 우리와 차림새가 비슷했다. 또한 그들은 미국의 대학 혹은 그 영향을 받은 재단이나 국제 관료 사회의 언어를 썼기에 말투도 우리와 비슷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과테말라시티에서 온 그 여성들은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민들에게―약 스무 명가량의 젊은 여성이었는데, 그중에는 예외적으로 줄리아의 아버지도 있었다―어린 시절에 관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어른인 학생들이 아동용 책상에 비좁게 앉아서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렸다. 교사 한 사람이 그림을 높이 들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의 내용은 성 역할이었다.
  나는 이런 수업이 어떻게 계속 진행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가자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었고, 과테말라시티에서 온 교사들이 직접 물을 때에만 말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했고, 통역자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더군다나 죽음을 비롯해서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지역 주민들은 교사들이 세워 놓은 목표와는 자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서 열 살 때부터 동생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교사(기대에 차서): 그러니까 당신 아버지는 당신이 여자라서 다르게 취급한 거지요?
       학생(사실대로): 아니, 그렇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했어요.

  어색한 정적이 뒤따랐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졌고, 내 동료들도 그랬음이 틀림없었다(오필리아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적 때문에 불편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 수업은 모욕적이었다. 주민들은 집단 학살과 강제이주를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는데, 교사들은 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대했다. 주민들은 주요 도시들, 우리 단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의도를 가진 단체들, 모든 질문에 '정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로부터 가져온 주제에 관해서 질문을 받고 있었다. 직접적인 위해는 없었꼬, 그 주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식을 바꾸고자 하는 이 수업이 지난 수십 년간 폭력을 겪어 온 이 지역 주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분명 의식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야 할 쪽은 이들이 아니라 과테말라시티와 워싱턴 D.C.에 있는 영향력 있는 자들이었다.
  보건위원회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줄리아가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신호가 반가웠다. 안뜰을 가로질러 흙바닥의 낮고 어두컴컴한 조리실로 들어서면서, 나는 오필리아에게 "희생자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워크숍"을 해달라는 제안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낮게 속삭였다. 우리는 희생자들의 정신이나 문화를 개조하려고 멀리 과테말라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 <권력의 병리학> 32~34쪽

글쓴이는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이 원론적인 수준에서 '의미 있는 주제'라고 하지만 실상 묘사된 상황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의미 없는 주제'라고 생각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어른인 학생들이 아동용 책상에 비좁게 앉아서"라는 식의 서술부터(그들이 뭔가 다른 것을 배우거나 토론하고 있었다면 "어른 학생들이 비록 아동용 책상이었지만"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청바지 입은 젊은 교사들'에 담긴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애들이 쓰잘 데 없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지 않는가. 인용문을 바로 뒤따르는 문장을 보면 더욱 그렇다. "내 생각은 기우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열정 넘치는 보건위원회의 위원들은 엉성한 제안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보건위원회 위원 만세.

아 물론 물론 지은이는 이런 '교육'에 대한 원흉으로 과테말라와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자들"을 지목하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어떤 맥락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지은이 눈에 비친 수업 한 토막 가지고 저렇게 써내려간 게 나는 몹시 불편하다. 그가 정말 이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를 통해 "영향력 있는 자들"을 탓하고 싶었다면, 지은이는 좀 더 세심하게 그 상황을 살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수업을 진행한 여성들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에 차서' 어떤 답을 유도하려 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남에게 성 인지력(이든 뭐든)을 교육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일 게다.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장에서 하는 교육이 정작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다는 건 당연히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이라니, '성 역할(원어는 뭐였을까?)'의 영역은 따로 있고 이와는 별개인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의 영역은 따로 있나? '성 인지력'은 먹고 살 만한,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된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것인가?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에도 성별성은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돌려보면, 더 이상 그런 주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성들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겪는다면 여성은 그동안 "'보다'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을 겪는다. 아래 인용글을 보자. 지역과 숫자를 조금만 바꾸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전 세계의 난민과 국내 피난민의 80%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20세기 후반의 전쟁의 규모와 성질에 의해, 과거에는 없었던 다수의 사람들이 분쟁으로부터 벗어나 집을 떠났다. 이 때문에 1990년대에는 많은 상황에서 분쟁 그 자체보다 전쟁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이 공공보건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성(gender)에 주목한 데이터는 적지만, 그래도 난민 캠프에서 여성이나 소녀는 남성이나 소년보다 오염된 물이나 오물에 더 많이 접촉한다. 또 강간이나 성적 착취의 위험도 더 많으며,경우에 따라 지뢰에 의해 수족을 잃어버리는 수도 많다.

여성과 소녀가 기본적인 일상필요 활동을 담당하고, 먹거리나 연료, 여물이나 물 등을 조달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활동을 하는 한편, 전쟁에 의해 숫자가 감소한 남성들은 보다 간단하게 여성을 먹이로 삼는다. 최근 밝혀졌듯이 서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 유엔 평화유지 부대·원조 일꾼(worker)에 의한 소녀·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보스니아에서 분쟁 이후의 신탁통치령에서 국제경찰에 의한 여성·소녀의 매매는, 남성 평화유지 부대·원조 일꾼, 경찰에 의한 약탈의 실태, 그러한 남성에게 먹거리·생활 필수품, 물리적 안전을 의존하는 난민 여성·소녀가 노출된 위험을 나타내고 있다.

조악한 사망률 데이터는, 추방된 여성·소녀에 대한 건강상의 충격을 감추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회·환경 관계의 충격·데이터의 경우 성(gender)에 근거한 분류를 하는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기록된 적은 사례 중 하나로 방글라데시에 있는 난민 캠프가 있지만, 거기에서는 1세 미만의 여아 사망률은 남아 사망률의 2배이고, 5세 이상의 소녀·여성은 남성의 3.5배의 사망률이다. 다른 예로 자이레 동부의 난민 캠프에 있는 르완다의 난민 가족 중 여성이 가장으로 되어 있는 가족은 남성이 가장으로 되어 있는 가족보다 영양실조가 많다.

성(gender)에 근거한 데이터는 적지만 많은 사람들이 '난민의 여성·소녀가 남성·소년보다 사망률이 높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것은 난민 캠프에서 보건·식품 제공 체제가, 남성·소년에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성(gender) 평등이 주지되어 있지 않은 경우, 난민 캠프에서 여성이 가장인 가족·과부·소녀들은, 식품·의료 서비스를 받는 줄의 마지막에 서 있다. 보호와 평등법이 없는 경우, 식품·의약품을 교환조건으로 성을 제공하도록 강요받는다.

(출처: http://www.peacemaking.co.kr/news_view. ··· _no%3D64)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처럼, 지은이가 제기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몹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아이티나 러시아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내게는 몇 년 전 가난한 사람들의 흡연율이 부자들보다 훨씬 높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몹시 놀라고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생과 사만큼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를 다하는 것일 터. 그러나 거기에 무게를 두는 나머지 살아남는 것 자체를 위협 받는 사람들에게는 성 감수성 교육이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읽히게 해서는 안 된다.

끝으로,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은 '젠더 감수성 향상 교육' 정도로 번역하는 게 더 나았겠다. 아마 Gender sensitivity라고 되어 있는 걸 저렇게 번역한 게 아닐까 싶은데, 이 바닥(?)에서는 보통 개인적 차원에서 (성)차별을 인지해 내는 것에 대해서는 '젠더 감수성'이라고 한다. '성 인지'라는 말은 주로 정책분야에서 쓰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뭐랄까, 집단의 느낌을 준다(그래서 처음에는 왜 거기서 '성 인지력 향상 교육'을 하는 걸까 의아했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젠더 감수성('성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데도 있더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쓰다 보니 아직 본문도 읽지 않은 주제에 너무 성급하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 역할과는 관계가 없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사건들"이라는 말에 대한 생각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두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 느낀 것들, 그러니까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생각들은 다음에 정리할 기회가 오길 바란다. 어쨌든 나는 아직도, "아니 이런 얘기를 지금까지 한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하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건강권을 사회적으로, '권력의 병리현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토록 부족했었다니, 지은이도 옮긴이(들)도, 참 외롭고 쓸쓸했겠다.

<권력의 병리학>
폴 파머 지음 / 김주연·리병도 옮김 / 후마니타스 펴냄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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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5 16:20 2009/03/2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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